[시론담론]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 ||||
이광서 아이부키㈜ 대표·논설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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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회항'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재판부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해 박창진 사무장의 복귀에 대한 보복성 징계 의사를 묻는다고 한다. 거대 갑이 작고 흔한 을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땅콩회항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 대한항공 승무원들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그들이 겪어온 당연한 일상이 이렇게 사회를 흔드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고. 성실하고 평범한 직장인인 박창진은 우리 사회의 흔한 '을'이다. 그리고 그는 가을바람에 마른 낙엽이 떨어지듯 을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쉽게 스러져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생기가 도는 표정과 확신에 찬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을이라는 반존재를 극복하고 비로소 온전한 존재로 우뚝 서고 있어 보인다. 사람은 '사이'다. 흔히 생각하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고 나와 너의 사이에 진짜 내가 있다. 자아는 그가 관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부터 형성되는 관계망을 통해서 규정된다. 마치 양자구름과 같다. 공간에 에너지가 투입되었을 때 입자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처럼 사람의 관계망 안에서 일련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자아가 모양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형이 우리 삶을 더 큰 스케일로 바라보게 해주는 그림이며 삶에 관한 바른 관점이다. 삶의 타임라인에 기록되는 것은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다. 이 중에 많은 이벤트들은 의미가 미약해 어쩌면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져갈 것들이다. 감정, 기억, 소유물, 만남과 같은 요소들은 지금도 의미없이 스러져간다. 이야기로 꿰어지지 못하면 스러질 반존재들이다. 이벤트에 의미가 담기고 그것이 스토리로 꿰어지면 비로소 하나둘 빛나기 시작한다. 개별 사건의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신 그것들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중단 없는 하나의 스토리로 꿰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선택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인간다운 선택을 하며 인간의 길을 걸어야 사람이다. 중립의 미덕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해이며 위선이다. 그것은 양비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회의적 유보상태를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중립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사건과 상관없이 독립된 실체를 상정하는 것과 같다. 개인이 선택과 결정과정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듯, 미디어도 분명한 관점을 지향해야 하며 예술은 물론이고 과학마저도 관점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치열한 객관성의 도구를 연마해야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특정한 관점으로부터 일련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인 것이다. 관점이란 관찰자의 위치를 말한다. 인류의 모든 활동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그곳은 바로 '이상주의'다. 다시 말해 시대의 이상주의로부터 도출된 지속적이고 의도와 선택이 있어야 분명한 실체를 가진 존재로 탄생하게 된다. 태어났다고 사람이 아니고 간판 달았다고 미디어가 아니며 무슨 학위 받았다고 학자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반존재이며 가능성을 제공할 뿐이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것은 우리 삶에 부과된 가장 절실한 질문이다. 우리는 관습을 깨는 지속적이고 용기 있는 선택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드러내야 한다. "제2의 박창진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복귀하겠다"는 사무장 박창진은 반존재인 개인을 넘어 자신이 있어야 할 바로 그 곳에 우뚝 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
과연 이 나라가, 대한항공이 그런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올려는 줄 수 있어도, 올려 놓는 것이 떨어 뜨리기 위해서라면....?
그러나, 역설의 역설이 있다.
인물과 세력의 짝짓기...
그 이전에 먼저 혼자서 살아서 사막을 건너오기....
현재도 이 패턴은 적용되고...
위의 가정이 실현되더라도 적용되는 패턴....
그건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