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내가 초딩때 깨달은 만큼 기본은 간단하다. 간단한 기본을 제대로 아는게 중요하다. 별 건 아니고 어느날 사람들이 나와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뭔가 이상해. 왜 저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 생각은 당연히 이렇게 하는게 맞는데 왜 저러지?’ 뭐 이런 거다. 그래서 뭐가 다른지를 찾아서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홉 살 때다. 구조론의 관점은 내재적 질서로 보는 것이다. 내재적 질서란 인간의 관측을 배제하는 것이다. 최근에 적당한 단어를 찾았는데 ‘관성’이 그것이다. 관성을 ‘그 상태로 계속 머무르려는 성질’로 본다면 이는 귀납적 접근이고, 구조론의 연역으로 보면 관성은 물物 자체의 내재적 질서다. 질서를 포착하려면 계를 정의해야 한다. 관성은 성질이 아니라 계라는 말이다. 구조론은 계를 중심으로 내재적 질서를 추적한다. 속성과는 다른데 속성은 다른 것과 성질이 비교되는 것이다. 돌이 무거운 것은 지구의 중력이 작용한 바 내재적 질서가 아니다. 이는 관측된 것이다. 그 관측을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존재 그 자체가 남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외력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외력을 이겨야 대응한다. 외력을 이기려면 외력을 처리할 수 있는 구조를 내부에 갖추어야 하며 그것이 홀수일수는 없고 짝수다. 외력이 1이므로 1을 이기려면 2여야 하니 짝수인데 외력에 1로 대응하니까 2이면서 1로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즉 확산방향 척력 2가 수렴방향 인력 1로 바뀌면 외력에 대응할 수 있다. 그 외력을 처리하여 존재를 입증해내면 관성이다. ◎ 학계의 관성 –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상태를 관측하는 외부 관측자가 존재한다. 귀납적 인식이다. ◎ 구조론 관성 – 물物 자체의 내재적 질서, 물物이 외력의 작용에 대응할 수 있는 조건. 연역적 인식이다. 연역으로 보는 훈련이 중요하다. 관측을 배제한다. 반드시 인간이 관측하는게 아니다. 물物 자체도 서로 관측하고 있다. 건드린다는 이야기다. 그 건드림을 이겨낼 수 있는 조건들이 내부에 갖추어져 있고 그 조건이야말로 모든 추론의 절대근거이자 제 1 근거다. 이런걸 표현하는 언어는 근래에 찾았지만 초딩때부터 알고 있었다. 안 배워도 그냥 아는 거다. 사과를 먹어보고 신맛이 난다고 하면 외부 관측자가 개입한 것이고 사과산 성분이 들어있다고 말해야 내재적 질서다.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유식한 사람의 말하기 방법이잖아. ‘야 이 나쁜 놈아.’ 하는건 저자거리 사람들이고 ‘그 사람 내면의 악마성이 표출되었다.’ 하면 지식인 말투다. 초딩때 형들의 교과서를 보고 알았다. 근데 남들은 이렇게 안 하더라. 그때 나는 대단한걸 알아냈다고 의기양양했는데 어디 가서 말하기도 그렇고 쓸쓸했다. 외부의 비교대상을 찾지 말고 내부에 고유한 것으로 말해야 먹힌다. 뭐든 그렇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나는 쟤보다 낫다.’ 이런 식으로 쪽팔리게 말한다. 에구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말하느니 나같으면 자살하겠다. 쟤한테 없는게 나한테 있다고 말해야 씨가 먹히는 거다. 금이 무겁고 종이가 가벼운 것은 내부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이 개입한 것이니 이미 가짜다. 아는 척 하는 사람은 ‘너 왜 화났니?’ 하고 말하지 않고 ‘너 어디 아프니?’ 하고 상대방의 내적 질서를 탓한다. 구조론을 배우려면 이런 근본적인 것에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면 몇 분만 대화해보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나는 초딩때 알았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니 벽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다. 구조론에 대해서는 이런 기본에 대해서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으니 뭔가 코드가 안 맞는 느낌이다. 맨 처음 출발점을 잘 찍어야 한다. 기본의 기본의 기본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다. 거기서 코드가 맞고 거기서 말이 통해야 한다. 생각해 본 사람은 없는가? 사건으로 시작한다. 구조론은 일단 관측을 배제한다. 관측을 배제하면 무엇이 있나? 존재가 있다. 그런데 존재가 뭐지? 그것은 사건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에 올라타고 있다. 외력의 작용에 맞서 버티고 있다. 공간과 시간을 타는 그것은 사건이다. 사건은 버틴다. 존재가 떠억 하니 내 시야에 버티고 있으니 그것을 관성이라고 말해도 된다. 서로 방향이 다른 둘이 마주쳐 척력을 이룬 A와 B가 C를 공유하는 형태로 관성계를 이루어 인력을 성립시켰을 때의 모순을 처리하는 것이 사건이다. C를 공유하지 않으면 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순을 처리하지 못하면 계가 깨진다. 모순을 처리하면 사건이다. 모순을 처리하면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관성이다. 관성계라고 하듯이 사건계라고 해야 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그 꼬리를 잘라내고 하나를 독립시켜 보면 그것이 사건계다. 사건계가 관성계다. 사물은 그냥 있다. 그냥 있는게 아니라 외력의 작용에 대응하여 자기를 유지해내며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증발하지도 않고 말이다. 중력을 극복하면서 말이다. 깨지지도 않고 녹아버리지도 않고 말이다. 외력을 처리해내고 있다. 관성을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로 보는 것은 관측자 시점이다. 이론은 관측을 배제한다. 인간이 관측하지 않아도 사물이 관측한다. 영향을 미친다. 백금이 금보다 무거운 것은 지구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에서 질량을 측정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지구에서만 통하는 규칙은 폐기한다. 관측은 건드려서 작용반작용으로 아는 것이다. 이론은 내재하는 질서로 아는 것이다. 내재하는 것은 A와 B가 C를 공유하는 형태로 관성계를 이룬 것이다. A, B, C 삼자관계로 판정되어야 한다. 즉 공간과 시간은 우주에 널려있는게 아니라 물질 안에 시공간이 내재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구조론의 대칭과 호응이다. 물질이 부단히 외력의 작용을 처리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이 기어코 연출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별주의다. 구조론은 역할주의다. 구조론은 획일적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하다. 프레임이 획일적일 뿐이다. 같은 학교에 다녀도 전공이 다른 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을 조금 보고 획일적이다고 말하는 사람은 수학을 보고 1+1은 2라고 답을 정해놔서 기분나쁘다는 사람이다. 구조론이 오히려 질적인 면에서의 폭넓은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
◎ 질 – 구조론 : 전공에 따라 다르다.
구조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다양성을 부정한다고 화를 낸다. 그런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이번에는 평등주의를 해친다고 화를 낸다. 구조론이 다양성을 말한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또 평등해야 한다고. 그런데 모순되잖아. 다양하면 불평등하기 마련이다. 억지로 평등을 강조하면 획일적으로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별주의다. 사람의 행동이 저마다 다른 것은 물, 불, 흙, 공기의 사원소가 사람마다 다르게 배합되었기 때문이다. 백인은 촉촉함(moist) 성분이 많고 흑인은 건조함(Dry) 성분이 많고 남자는 차가움(cold) 성분이 많고 여자는 뜨거움(hot) 성분이 많다는 식이다. 문재인은 흙이고 이재명은 불이고 안희정은 물이고 안철수는 공기 되어 사라졌다. 이런건 딱 봐도 가짜다. 온도라는 것은 관측자가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척도가 되면 과학이 아니다. 언뜻 다양하지만 량적 다양성에 불과하다. 질적 다양성이라야 진짜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촉촉함moist, 건조함Dry, 차가움cold, 뜨거움hot음 인간이 개입한 것이고 오직 운동으로만 설명되어야 한다. 그럼 정지해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지? 정지상태로 운동하고 있다. 그것이 관성이다. 백킬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반대방향으로 100키로의 속도로 공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공은 제자리에 떨어진다. 공은 정지해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운동상태로 정지해 있다. 운동은 관측자에 대해 성립할 뿐이다. 관측자가 반드시 사람일 이유는 없다.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 안에 순수운동은 없다. 뉴턴은 절대시공이라는 관측자를 제시했다. 관성을 만들어낼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절대시공을 부정했다. 관성은 외부 관측자가 아니라 내부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다. 아인슈타인이 어려운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초딩이 봐도 알 수 있는 당연하 상식이다. 뭐든 외부에 있으면 어색한 것이다. 이런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잖아.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데 대사를 못해서 장막 뒤에서 누가 대본을 읽어준다면 어색하잖아. 더빙을 해도 동작을 맞춰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구조론은 역할이 관성을 만든다고 말한다. 비유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피부색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한 셈이다. 언뜻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차별주의다. 데카르트는 피부색이 어떻든 성적만 본다. 대단한 진보다. 그러나 성적지상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진보가 노상 평등을 말하지만 그게 위험하다. 평등할수록 하나의 기준에 맞춰져서 획일화 된다. 평등이 독재를 부른다는 말이다. 과거처럼 수시모집 없애고 학력고사 하나로 대학 보내는게 평등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평등할까? 그래도 강남 애들은 과외 받아서 서울대 진학을 독식한다. 평등이 안좋다. 뉴턴은 모든 학생이 같은 과목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역시 굉장한 진보처럼 보이지만 위험하다. 획일화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을 공부하면 곤란해진다. 인문계와 실업계가 나눠져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성적이 어떻든 각자 노력한다고 말한다. 즉 공부 잘하는 학생은 공부로 노력하고 공부 안하는 애들은 게임으로 노력하니 노는 애가 더 바쁘다. 구조론은 각자 사건이 다르다고 말한다. 임무가 다른 것이다. 전공이 다르다. 어떤 전공은 매우 노력해야 하고 어떤 전공은 놀면서 해도 된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다섯가지 관점을 합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구조론이 먼저고 아인슈타인, 뉴턴,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를 차례로 적용해야 한다. 피부색이 다른건 분명하지만 피부색은 가장 나중에 판단되어야 한다. 피부색으로 먼저 걸러버리면 위태롭다. 먼저 걸러야 하는 것은 전공이다. 게임이 전공이면 하루종일 게임만 해도 된다. 노래가 전공이면 하루종일 노래만 불러도 된다. 춤이 전공이면 하루종일 춤춰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교양과목은 공통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성적은 그 다음에 평가해야 한다. 피부색은 최후에 검토할 수 있다. 흑인역할을 백인 배우에게 맡길 수는 없다. 남자역할을 여자배우에게 맡길 수는 없다. 마지막에는 피부색도 보고 성별도 본다. 먼저 전공을 보고 다음 실력을 보고 다음 공통요소를 보고 다음 성적을 보고 최후에 개인의 고유한 사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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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때 알아차린 것을 지금까지 지켜와 성장시키신 것이 대단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대중의 관념에 묻혀서
자신이 어릴때 이상하게 생각한 것들을
대부분 망각하거나 휩쓸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