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다시 읽기 당신은 이곳에 왔다. 안으로 더 들어와야 한다. 입구에서 깐죽대기 없다. 이곳은 특별하다. 당신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곳에서 당신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자세로 자신의 전부를 바꿀 결의를 가져야 한다. 자신을 바꾸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게 뭔지 여기서 찾아보겠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반응하든가 혹은 반응하지 않든가다. 당신이 이전에 구조론적인 상황을 겪어본 경험이 있다면, 평소에 구조론적인 생각을 해봤다면 당신은 반응할 것이다. 전율할 것이다. 그 경우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그 뿐이다. 나는 당신을 초대하지 않았고 당신과 거래하지도 않는다. 반응했다면 계속 가는 것이고 반응하지 않는다면 퇴장하는 수 밖에. 구조론은 사건의 매개변수를 센다.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사건의 매개변수는 몇인가? 하나의 사건을 완결시키는 데는 몇 개의 의사결정이 필요한가? 당신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왜? 그것을 세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수는 셀 수가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의 수는 세지 못한다. 더 치명적인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조차 없다는 점이다. 구조론에서 많이 쓰는 에너지, 리스크, 확률, 연역, 동적균형 이런 단어는 원래 없다. 더욱이 사건의 맥락을 추적하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나는 묻는다. 내가 말하기 앞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생각해본 적 있다면 당연히 반응한다.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다.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손가락은 왜 다섯인가? 넷이면 물건을 잡기에 불편하다. 여섯이면 많아서 거치적거린다. 다섯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 무게중심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다. 뭔소린가? 물체를 상대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중력을 상대하는 것이다. 중력은 지구 중심으로 내려꽂힌다.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손 안에 든 미꾸라지를 놓치지 않고 움켜쥐려면 몇 개의 손가락이 필요한가? 무게중심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면, 물체에 중력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이 둘만 있어도 넉넉히 물건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물체를 운반하려면 무게중심을 확보해야 하고 중심을 확보하려면 중심을 도출해야 한다. 중심을 확보하려면 대칭을 만들 손가락 셋이 필요하다. 들어올리면 거기서 운동방향으로 에너지를 추가해야 한다. 셋으로 잡고 넷으로 든다. 셋으로 잡는다는 것은 손가락을 물체와 대칭시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며, 넷으로 든다는 것은 중심을 장악한 상태에서 다시 손가락의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다. 상대와 똑같으면 안 되고 상대를 이겨야 한다. 씨름을 하더라도 상대가 100이면 나의 100을 투입하여 균형을 이룬 다음 추가로 거기에 10을 더하여 상대를 제쳐 쓰러뜨려야 한다. 그런데 왜 손가락은 다섯인가? 그 상대방이 움직이는 물체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운동을 멈출 1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건 직접 물체를 들어보면 된다. 물론 네 손가락으로도 들 수 있다. 이때는 손가락 하나가 둘의 역할을 한다. 혹은 물체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물체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다. 보통은 에너지의 존재를 간과하여 셋으로 들기에 충분하다고 여긴다. 고전극의 형식은 3일치의 법칙이다. 행동은 하나여야 하며 하루 안에 끝나야 하며 하나의 장소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거다.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사건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각별하다. 왜 4일치나 5일치는 아닌가? 왜 일치해야만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은 행동의 일치다. 시간과 장소는 후대에 와서 잘못 해석한 거다. 그것은 완결성이다. 수호지나 서유기처럼 잡다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식이면 피곤하다. 연극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 경우 작가가 관객에 대해 우위에 서지 못한다. 작가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게 되고 극의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대중은 노래부르기와 칼싸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동안 연극은 노래와 춤판에 액션에 뮤지컬로 변질되곤 했다. 연극이 점차 서커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등장하기 전에 연극이라고 하면 중국의 경극 비슷하게 무대에서 갑옷 입은 무사가 온종일 칼싸움을 하는게 보통이었다. 한시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넷이다. 왜 넷이어야 하지? 소설 작법에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있다. 왜 다섯이지? 넷이나 여섯이면 안 되는가? 논문이라면 서론, 본론, 결론 3단계다. 대개 3에서 5를 벗어나지 않는다. 6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 왜 3일까? 헤겔의 변증법도 3이다. 원인과 결과는 2다. 거기에 의사결정이 들어가면 3이다. 연극은 어떤 사건을 다룬다. 사건은 의사결정한다. 보통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죽는다. 결혼하면 희극이고 죽으면 비극이다. 극은 왜 결혼했는가 혹은 왜 죽었는가를 다룬다. 답은 모순의 존재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존재의 모순을 정면으로 파헤쳤다. 그러자 3일치법이 소용없게 되었다. 선인과 악인의 대결이라면 결과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인간의 내부에 선과 악이 섞여 있다면 고민을 해야 한다.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게 된다. 무엇인가? 3일치법이 사라져도 행동의 통일이라는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말이다. 극은 반드시 하나의 사건이라야 한다. 두 가지 이상의 사건을 옴니버스로 연결하는 수도 있지만 그건 9천원 받고 필름 돌려주는 극장측의 편의다. 하나의 사건이 아니면 관객이 갑이 되고 작가는 을이 되어 작품이 망한다. 로봇이 달걀을 들어올리려면 다섯 손가락이 필요하다. 세 손가락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꼼수다. 움직이는 병아리를 붙잡아 옮긴다면 어떨까? 반드시 다섯이라야 하는 거다. 정리하자. 주사위를 던진다면 매개변수는 몇인가? 즉 누가 속임수를 썼다면 당신은 몇 곳을 조사할 것인가? 손, 주사위, 공간, 시간, 데이터로 다섯을 조사해야 한다. 고스톱판에서 타짜가 속임수를 썼다면 첫째 사람을 조사하고 둘째 화투를 조사하고 셋째 공간을 조사하고 넷째 시간을 조사하고 다섯째 점수계산이 맞는지 조사해야 한다. 다섯곳이 조사된다. 더 필요없다. 문제는 보통 세 곳이나 네곳으로 만족한다는 점이다. 불안하지 않은가? 누가 속임수를 썼는데 당신이 세 곳을 조사했지만 트릭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거기서 멈출 것인가? 왜 더 조사하지를 않나? 더 조사한다면 어디를 조사해야 하나? 왜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막 뒤져보고 그랬던건 아닌가? 속임수라고 판단되면 동작그만을 외쳐야 한다. 움직이는 자가 범인이다. 어디서부터 조사할까? 순서가 바뀐다면 범인이 쾌재를 부른다. 타짜의 손바닥부터 조사해야 한다. 방석을 먼저 조사한다면 손바닥에 감춘 패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수법을 쓰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라도 그렇다.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하면 범인은 재빨리 따라붙은 동료에게 지갑을 넘긴다. 이때 소매치기 동료가 지나가는 행인인 척 하며 당신의 시야를 가린다. 바바리코트와 같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있거나 신문지를 펼쳐들고 있는 사람이 한패다. 갑자기 다가와서 신문지로 시야를 가리고 지갑을 또다른 동료에게 넘긴다. 구조론의 1단계는 질의 결합이다. 범인이 누구와 결합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타짜가 기술을 썼는데 먼저 사람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화투패를 손톱으로 긁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면? 당하는 거다. 일단 사람을 제압해야 한다. 이러한 순서를 당신은 생각해봤는가? 이런거 생각해보지 않고도 편하게 잠이 오던가? 아무 생각없이 실력만 믿고 타짜판에 끼어들려고 했나? 생각을 좀 해보고 야바위에 돈을 걸어도 걸어야 한다. 야바위는 어떤 방법으로 수입을 올릴까? 답은 정해져 있다. 구조론의 답은 5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도 간단하다. 완결성을 먼저 떠올린다. 완전한 것은 어떤 모형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답을 도출한 다음 빠진 것을 일단 있다고 친다. 미지수 X를 도입한다. 계산해보고 맞으면 그게 정답이다. 문제에서 답을 찾는게 아니라 답에 맞추어 문제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다. 답은 무조건 정해져 있다. 언제나 사건의 원인은 에너지의 유도다. 모든 사건은 에너지에 의해 일어난다. 사물이 3이면 에너지 포함 5다. 사물은 관측에 대응하고 에너지는 사건에 대응한다. 인간의 관측으로 보면 귀납의 상대성이고 사건을 끌고가는 에너지의 결로 보면 연역의 절대성이다. 사건은 A가 B를 복제한다.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끌어낼 때 A와 B 사이의 변하지 않는 관계가 구조론이 도달해야 할 절대성이다. 곧 완전성이다. 이 모형을 정해놓고 때려맞추는게 아인슈타인 방법이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고수들은 다 그렇게 한다. 답은 정해져 있고 그것은 보나마나 다섯이며 거기서 빠진 퍼즐을 하나씩 채워나간다. 묻는 것은 평소에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본 사람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구조론을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럼 몇인데? 사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사건을 중요시했을까? 그것은 소통하기 위해서다. 관객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관객이 작품에 끼어들어서 자꾸 헛바람 넣으면 안 된다. 사건은 구조를 복제한다. 작가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관객의 마음 속에 옮겨놓는다. 그러려면 연결루트는 다섯이어야 한다. 모순이라는 형태로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또 의사결정이 있어야 한다. 공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서가 맞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값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 공간이 반드시 무대 한곳이거나 그 시간이 반드시 오늘 하루여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사람이 잘못 해석한 것이고 공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서는 중요하다. 모순, 의사결정, 장소, 시간, 전달까지 매개변수는 다섯이다. 내가 웃으면 당신도 웃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 눈을 맞추어야 한다. 내가 당신을 쳐다볼 때 당신도 나를 쳐다봐야 한다. 내가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오른손을 들었는데 당신이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뻘쭘하다. 서로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눈을 맞추고 손을 맞추고 공간을 맞추고 시간을 맞추고 또 손을 떼야 한다. 다섯 곳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하이파이브도 못한다. 이것이 의심되면 직접 해보면 된다. 문제는 보통 셋이라는 거다. 에너지를 보지 못하므로 셋 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측자의 포지션에 서므로 내부의 모순이 보이지 않는다. 사건을 격발하는 절차가 보이지 않는다. 사건은 원래 일어나 있다고 착각한다. 그 경우 독자가 작가를 이겨서 점차 늘어져서 수호지 되고 서유기 된다. 이야기가 직진하지 않고 자꾸 옆으로 삐져나간다. 셰익스피어는 작가의 입장에서 독자를 확실히 압도했다. 관객이 배우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시키지 못하게 했다. 중간에 흐름 끊고 딴소리 하기 없기다. 완결성이다. 곧 자연의 완전성이다. 왜 자연은 아름다운가? 봄여름가을겨울로 완결하기 때문이다. 왜 산천은 아름다운가? 봄에 꽃이 피었다면 가을에 열매가 열려서 완결시키기 때문이다. 산이 높다면 골이 깊어야 완결된다. 대칭으로 벌어졌다면 호응으로 수습해야 완결된다. 완결성이야말로 모든 논리의 최종보스다. 극이든 영화든 시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건축이든 자연이든 자체의 완결성이 없으면 실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다. 안희정이든 이재명이든 일베충이든 누가 어긋난 소리로 시비를 건다면 당신은 완결성을 제기해야 한다. 완전하지 않으면 소통은 실패요, 소통이 실패면 언어는 실패다. 차라리 침묵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서 선택을 고민한다. 의사결정해야 한다. 고전극은 답정너다. 주인공의 선택은 정해져 있고 반전의 여지는 없다. 주인공이 선택을 고민하는 데서 독자에 대한 작가의 승리는 달성된다. 독자를 이겨야 작가다. 독자가 작가에게 주인공을 살려라고 압박하면 이미 진 게임이다. 문학성이 없다.
모든 변방의 잡음을 침묵시키는 완결성이라는 논리의 최종보스를 전가의 보도처럼 당신은 휘둘러야 합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했듯이, 프랑스인이 잘못 해석한 것을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복구했듯이 말입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떠들지 말고 무슨 주장을 할 때는 완결성의 모형 互를 떠올리고 말해야 합니다. 안희정을 치든 홍준표를 치든 그러합니다. 적들은 완결성이 없습니다. 互가 없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