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에 쓰려다가 질문이 많아서 가져옵니다.)
<- 구조론 게시판 시험문제 3 - 성철과 숭산 숭산의 법문에서 눈여겨 볼 점은 숭산과 성철이 퇴계와 율곡처럼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는 점이다. 그 패턴은 같다. 성철이 일원론이면 숭산은 이원론에 가깝다. 그런데 불교는 원래 일원론이다. 반야심경은 색과 공의 이원을 인연 일원으로 통합하고 있다. 공이 인연을 통과하면 색이 되고, 색이 인연을 통과하면 공이 된다. 실상 인연 하나가 있을 뿐 공도 없고 색도 없다. 불교는 인연일원론이다. 불교의 본의는 대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구하는 데 있다. 십우도 마지막 장면은 다시 시장에 손을 담그는 입전수수다. 그런데 성철은 산중에 머물렀을 뿐, 시장에 손을 담그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게 아니라는 것이 숭산의 입장이다. 과연 성철은 대자비를 행하지 않았고 거리에서 중생을 구제하지도 않았다. 성철은 대중이라는 큰 종을 쳐서 천지를 뒤흔드는 큰 소리가 나게 했을 뿐, 대중이 요량껏 제 소리를 내는 것은 대중들의 각자 알아서 할 몫으로 남겨두었다. 문제는 숭산의 입장이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평상심이 도’라든가 ‘완전한 자유’라든가 ‘이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든가 ‘생각이 없으면 부처’라든가 하는 불교계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이미 완전한데 무슨 대보살행이 필요하고, 또 올바른 실천이 필요하고, 더하여 잡다한 기능이 필요하고, 유익한 실용이 필요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둥 저렇게 해야한다는둥 하는 세세한 규칙들이 필요하겠는가? ◎ 맞는 말 – 평상심, 완전한 자유, 완전하다, 생각이 없으면 부처. ◎ 허튼소리 – 올바른 실천, 기능, 실용, 대보살행, 이래라 저래라.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다. 결론은 수도승들이 포교승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포교승들이 수도승을 욕하는 것이다. ‘흥! 니가 그렇게 잘났냐?’ 이런거. 질투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숭산이 좀 노방전도사 같다. 그렇다면 왜 성철은 포교를 하지 않았을까? 기승전결의 ‘기’에 서면 그 뿐 이어지는 승전결은 구태여 필요하지 않다. 스트라디바리가 있으면 결국 누군가가 연주한다. 내가 성철을 만났고, 지금 성철을 이렇게 연주하고 있다. 종이 있으면 누군가 치는 건데, 숭산은 골목을 다니며 대중이 혹시 종소리를 못들었을까 걱정하여 옃장수 엿가위 두드리듯 하며 소음을 내고 있다. 결론은 숭산이 상부구조를 보지 못했다는 거. 신이, 진리가, 자연이, 인연이, 부처가, 역사가 성철이라는 악기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숭산이 거리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때 성철은 신을, 진리를, 자연을, 역사를, 인연을 만나고 있었다. 연주하고 있었다. 깨달음은 큰 만남이다. 스트라디바리가 명연주자를 만나는 것이다. 큰 만남이 큰 소리를 낸다. 그 뿐이다. 그것으로 이미 완성되었다. 더 필요하지 않다. 조바심 내지 않아도 만날 것은 결국 만나게 된다. 만나는 즉 깨달은 것이다. ‘쌤요. 그래서 뽀뽀했능기요?’ 만나서 뽀뽀했냐고 쌤한테 자꾸 물어보는 학생은 0점 처리다. 비오는 날 체육수업 빵꾸날 때 들려주는 쌤의 연애담은 거기까지. 원래 그런 거다. 사람들이 색즉시공은 좋아하는데 색과 공 사이의 인연은 모른다. 공은 도로와 같고 색은 자동차와 같은데, 차가 있어도 달릴 수 없고, 도로가 있어도 달릴 수 없다. 인연이라는 운전사가 있어야 비로소 달릴 수 있다. 인연은 1이고 공과 색은 2다. 공과 색을 논하면 이미 분별된 것이다. 프리즘과 같다. 빛이 인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색이 되고, 색이 다시 인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말은 완전성을 나타낸다. 실상은 산과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산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산수가 어떤 사람에게는 산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물을 준다. 각자 필요한 만큼 챙겨간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게 원문인데 맨 뒤에 ‘중은 중이고 대중은 대중이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 말이 일원론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적과 멸이 둘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짜 덩어리 진리를 이루고 있으니 따로 분리해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나온 이유는 조계종에서 성철을 종정취임식에 부르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전두환과의 만남이 예비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론은 세상이 다 하나의 통짜덩어리인데 왜 내가 구차하게 산을 내려가서 전두환을 만나야 하느냐 이거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중은 중이고, 대중은 대중이며 이들이 각기 따로 떼어져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원각이 보조하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관음과 묘음을 이루고 있으니 스스로 완전한데 구태여 만나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깨달음이 만남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성철은 전두환을 만나지 않고 이런 긴 변명을 했을까? 그것까지는 이야기 안 해도 될 거고. 만난다고 만나는게 아니다. 보아도 백안시다. 청안시라도 마음의 눈은 감고 있다. 스트라디바리를 옃장수에게 주지는 않는다. 섣불리 만나지 않는 것이 오지게 만나는 것이다. 변을 만나면 심을 만나지 못한다. 나는 성철을 만나지 않았으나 이미 성철을 만났다. 백련암을 찾아가서 삼천배를 하고 성철을 만난 사람 중에 성철을 만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스트라디바리를 연주하지 않았다. 근처에 얼쩡거렸을 뿐이다.
###
깨달음의 스타일은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고 가만이 앉아서 상대가 찾아오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깊은 산중에 숨어 있으면 누가 오느냐구요? 신이, 자연이, 진리가, 역사가, 상부구조가 작동하여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도 안 오면 어쩌냐구요? 커다란 만남을 이루어야 합니다. 커다란 만남이 큰 소리를 냅니다. 세상이 흔들리는 큰 소리를. 이 한 권의 책을 권합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무득
動하여도 분별에 着이 없고 定하여도 분별이 절도節度에 맞는 사람되는 것이 수도하는 사람들의 희망이요
목적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