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와 브리트니
‘모든 관계는 신과의 관계다’.. 라고 말하는건 김동렬이 그냥 하는 소리고, 삼촌팬들이 아이유를 좋아하는 거지.. 거기서 신이 왜 나와?.. 하고 웃어넘긴다면 깨달음과 거리가 먼 거다. 깜깜절벽이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도 어렵다는 말인가? 정신차려야 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버진’ 장사로 꽤 재미를 봤는데 들통이 나서 산통이 깨졌다. 왜 사람들이 브리트니의 성에 관심을 가졌을까? 착각이다. 아무도 거기에 관심없다. 성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실존적 의미에서의- 존재불안이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도 모르는가? 이상의 날개를 읽고도 모르는가?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고도 모르겠는가? 다 그 이야기 아닌가? 결혼을 앞두고 여자에게 묻는다. 경험이 있느냐? 그걸 묻는게 아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공(空)한 것이다. 무엇을 묻고 있는가? 남자가 두려워 하는 것은 낙오다. 공동체에서 혼자 배척되는 것이다. 남들은 동네형들 따라 집창촌에 가서 해봤다는데 나만 못해봐서 그들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되었다는 두려움 말이다. 섹스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낙오와 배제와 격리에 진정한 관심이 있는 거다. 섹스를 섹스로 이해한다면 아둔하다. 문제는 세상과의 접속이다.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면 패닉에 빠진다. 접속되어야 안심한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접속을 결정하는 부분이 바로 현대성이다. 사건이 터지고 정보가 들어와야 한다. 옛날에는 주로 결혼식이나 초상집에 모이는 것으로 세상과 접속했다. 결혼할 사람도 없고 초상도 없으면 생사람을 잡아서 접속시킨다. 아랍의 명예살인이다. 접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모든 사람이 ‘그 과부가 시집을 갈까 안갈까’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열녀문이 들어서야 마을의 위신이 서는데 하며 이론을 퍼뜨리는 수구꼴통 악마 꼭 나온다. 만약 과부가 재혼하면? 흉년이 들어도 과부탓, 빗물에 미끄러져도 과부탓.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것이며 다들 그렇게 미쳐서 돌아간다. 그 모든 것은 근원의 존재불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존재불안은 공동체의 중심으로 쳐들어가라는 유전자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중심은 무엇인가?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을 장악하면 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공(空)한 것이다. 이 정도에서 색즉시공 나와주신다. 공은 공기다. 마을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미묘한 공기. 분위기라고도 하고 무드라고도 한다. 가짜다. 허상이다. 실상을 보아야 한다. 마을에는 그것이 없다. 마을에 외지인이 이사와서 가게라도 열면 마을 사람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영업방해 일삼는다.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열면 그 공기가 부드러워진다. 그것이 공(空)이다. 그게 뭐냐다. 소년에게 묻는다. ‘꿈이 뭐냐?’ 마땅히 대통령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총리? 장관? 혼 난다. 이건 말귀 못 알아먹는 거다. 꿈을 물었지 누가 꿈을 물었느냐고? 누가 당신의 꿈에 관심이나 있대? 생각하라. 남의 꿈에 신경쓰는 바보는 없다. 7급 공무원? 싸대기 맞는다. 꿈이 뭐냐는 ‘내편이냐’다. 공동체의 일원이냐다. 등산을 하다가 일행을 잃어버렸을 때는 정상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아니면 대피소에서 기다리든지. 대통령은 정상이다. 정상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꿈은 대통령 뿐이며 다른 꿈은 불허다. 생각하라. 누가 당신 꿈에 관심있대나? 한편인지 묻는 거다. 정상은 무엇인가? 신이다. 완전성이다. 진리다. 모든 관계가 신과의 관계라는 말은 등산하다 일행을 잃었다면 정상에서 기다리라는 말이다. 모르겠는가? 접속된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는 거다. 결혼을 앞둔 남자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여자가 경험이 있느냐가 아니라 첫째 그걸 어디가서 떠벌릴 것인가, 둘째 그 경험으로 비교할 것인가다. 여자가 열 남자를 겪었다면 열명의 침실 성적표를 가졌다. 남자는 그 성적표가 두렵다. 경험없는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경험이 없는 척 하는 여자를 원하고, 둘째 그 비밀을 끝까지 지킬 여자를 원하는 것이다. 동네 망신이 두려운 거다. 아이유를 좋하하든 브리트니를 좋아하든 그러한 자기 내부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상징물을 돈 주고 구매한 것. 연극이다. 아이유는 배우가 연극을 하다가 무대를 이탈하여 도주해버린 것이다. 표반환 요구는 당연하다. 방법은 레벨을 높여서 또다른 연극무대를 개설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이데아를 제시하고 발해를 제시하였듯이 말이다. 근데 이 또한 위태롭다. 자칫 모아이로 가는 수 있다. 그러므로 애초에 ‘버진’ 장사는 하는게 아니다. 수구꼴통의 존재불안에 편승하여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반드시 부메랑이 날아온다. 나는 순수해, 나는 착해, 나는 모범생이야.. 아주 고약한 거다. 차라리 싸이처럼 위악적으로 가는 것이 낫다. 나는 막 가는 사람이야. 이건 자유를 준다. 세상과 투쟁할 자유라는 무기를 나눠주는 것은 정상이고 존재불안으로 위협하여 집금하는 것은 고약하다. 범죄적이다. 사람들은 모범생을 원한다. 예의바르게, 겸손하게, 애국자답게. 그러나 이건 본심이 아니다. 그들은 두려워 하는 것이며 스트레스 받은 것이다. 남들은 잘 나가는데 자기만 뒤처져 있다는 열등의식. 세상은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없다. 예의, 모범, 겸손, 애국 따위 플러스적 가치들은 허상이다. 그걱은 공(空)이며 진실은 공동체와의 접속이다. 싸이처럼 야단스럽게 놀아주면 공동체를 느낀다. 착하게, 겸손하게, 예의바르게, 모범적으로, 애국적으로 처신하면 그럴수록 더욱 존재불안이 강해진다. 더욱 더 엄격해진다. 더 신경질적으로 된다. 누가 국민을 신경증에 빠뜨리는가? 애국자다. 처음에는 그냥 잘 살았다. 이웃마을에 열녀문 들어서는 바람에 다들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고 점수 매기고 차별하게 되었다. 순박한 민초들이 난폭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노자와 장자는 말했던 것이다. 공자의 유가 패거리들이 인간차별하는 논리를 발명해서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모범생장사, 애국장사, 겸손장사, 버진장사는 아주 나쁜 것이다. 정신병이다. 차라리 싸이처럼, 김기덕처럼, 김어준처럼, 김구라처럼, 노무현처럼, 낸시랭처럼 졸라장사, 씨바장사가 낫다. 위선은 정신병을 부추기고 위악은 그것을 해소한다. 차라리 또라이 흉내가 낫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돈이나 명성이나 출세나 기타등등 플러스의 목적은 거짓말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본질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공동체 안에서의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다. 그것은 공(空)이다. 스트레스가 없는 원시의 마을이라면 도덕도 예의도 겸손도 애국도 없이 편하게 잘 산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있다. 성 호르몬 때문이다. 돼지도 발정기가 되면 괜히 스트레스 받아서 벽을 들이받는다. 인간은 존재불안, 격리불안이라는 원초적 스트레스와 성 호르몬에 의한 스트레스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딱 하나 뿐이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만남이다. 제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신과의 만남을 이루는 것이다. 세상과 단단하게 접속되어 있으면서 끝없이 상호작용하여 뉴웨이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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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존재불안, 격리불안이라는 원초적 스트레스와 성 호르몬에 의한 스트레스의 지배를 받는다. -----------
존재불안, 격리불안, 성호르몬 스트레스 모두 결국 명령 아니겠소. 신의 명령
만나, 맞서, 맞물려, 하나되어, 낳아라.
정상에서 만나 완전성의 기쁨을 낳으라는 신의 명령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뭉크의 절규'가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수천가지 마음 중에
기쁨 걷어내고
혼란 걷어내고
사랑 걷어내고 온갖 다양한 마음 걷어내어
가장 맨 밑에 있는 마음을 끄집어 낸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뭉크의 절규'같은 그림일 것입니다.
태고에 빛이 있고
빛에 반응하는 생물이 생겨나서
빛에 반응하는 것은 기쁨 마음 아닌
절규 같은 마음 이었을 것 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베란다로 비치는 햇빛이 들어오면
상쾌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불로 얼굴을 가립니다.
무의식 중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짜증(설명한 단어를 못 찾겠습니다.) 입니다.
한 밤중에 방에서 누군가 형광등을 키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빛을 반가워 하지 않습니다.
'불꺼'하고 신경질을 냅니다.
빛이 아름다운 것이라 하더라도
맨처음 빛과 만남은 짜증(?)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혹시 태고에 빛과 마음이 만남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주말에 낮잠 자면 피로가 풀린다고 하는데
전 낮잠 자면 후회만 쌓입니다.
또 이렇게 하루가 흔적 없이 지나가는 구나!!!
그래서 주말에 잘 낮잠을 자지 않습니다.
책을 읽거나
트랙킹을 하거나
한 때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두려움'의 근거는 '존재 불안'에서 나온다.
선생님께 매 맡는게 두려워서 공부하고
산수공부 컨닝한게 탈로날가 두려워서 공부하고
미래에 빈털털이가 될까 두려워서 저축하고
건강을 잃을까 두려워서 걷고
그 두려움도 더 깊숙이 불안에서 나온다는 거
한가지 더
아름다움은 기쁨 아니라
아름다움은 절규라는 거
그냥 이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