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게시판 달뜨는밤님의 질문에 답하는 글입니다. - 다 이야기하자면 복잡해진다. 괜한 이야기 해서 더 헷갈리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관심이 있다면 읽어주시고.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깊숙한 부분을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겠고. 대략 수박 겉핧는다면. 불교는 바라문교에서 유래한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아리안 족이 드라비다족을 지배하면서 계급차별 논리를 만들어낸 거. 지배종족에게는 뭔가 특별한 거시기가 있다는 거다. 그 거시기가 뭐냐면 거시기다. 퇴계의 이원론까지 연결되는 그것은 한 마디로 차별. 차별은 관계의 차별이다. 그렇다면 정답이 나온 거. 정답은 관계. 관계는 문제의 해법이면서 동시에 문제 그 자체다. 관계의 이중성을 직시해야 한다. 바라문교로부터 이어져온 역사적 배경 안에 석가의 깨달음이 있는거고. 그러한 바라문교적인 배경으로 보면 석가는 인연이 중해서 즉, 전생의 까르마 덕분에 원래 깨닫도록 다 세팅이 되어 있었던 거다. 석가는 명상을 해서 마침내 깨달은 것이 아니라, 전생에 좋은 까르마를 많이 저축해놔서 이번 생에 깨닫도록 결정되어 있었던 거. 그러니까 적금이 만기되어 적금 탄 거다. 전생에 부어놓은 곗돈 탄 거다. 대중이 급행으로 부처되는 방법은 석가를 만져서 특별한 거시기를 빼먹는 거 뿐. 깨달음 근처에 가도 겨우 1점 딸 뿐이고,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고 득도하고를 백 번 해야 부처된다면 누가 하겠는가?
이런 해괴한,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 않은 논리는 아직까지 불교를 지배하고 있다. 라즈니쉬도 그거. 라즈니쉬에게 롤스로이스를 바치면 옆자리에 앉게 해주는데, 옆에서 라즈니쉬를 살살 만지면, 특별한 거시기가 살금살금 전염되어 울트라 스페셜 까르마가 초특급으로 쌓인다는 헛소리. 다단계와 비슷함.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불탑에 탑돌이를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좀 만져보자. 석가의 오라를 살금살금 빼먹자. 이런거. 결론인 즉 석가의 소승적 깨달음은 한 마디로 왕족출신이라는 저거 아부지 빽으로 된 거고, 빽없는 사람은 깨달을 수 없고, 단지 열심히 수행하여 1점 따면 여자는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고, 노예는 1점 따서 다음 생에 평민으로 태어나고, 개는 절집 개로 봉사하면 1점 따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정도에 그친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이에 응답한 것이 대승이다. 석가가 왕족인 것은 왕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국을 건설하면 된다. 이게 대승. 여기서 말하는 왕국이 그 왕국이 아님은 물론. 한국말은 좀 생각하고 들어야 함. 중핵은 금강경이다. 금강왕국이다. 진리가 왕국이다. 진리가 왕자를 낳는다. 여기서 불교는 보편성과 역사성을 획득한다. 석가는 깨달았다. 왜? 왕자니까. 누구나 왕자 되면 깨달을 수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나도 왕자 되겠다. 그렇다면 번호표를 뽑고 대승불교라는 금강왕국 왕자공장에서 왕자자리 신청서를 쓰시라. 뭐 이렇게 된 거다. 왕자가 왕자인 이유는 사람들이 왕자 대접을 해주기 때문이다. 누구든 왕자대접을 받으면 왕자다. 누구나 왕자 대접을 해주는게 대승이다. 그 묘리는 금강경에 다 써놨다. 근데 문제는 사이트 접속해서 신청서 다운받아야 한다는 거. 그 전에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거. 여전히 골때리는 문제들이 남아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선종불교다. 선종은 중국 특유의 도교사상과 죽림칠현으로부터 비롯되어 남조문화로 꽃피운 미학정신이 대승불교와 결합된 것이다. 그러니까 왕국공장에 가서 신청서 쓸 필요도 없이 왕자되는게 선종불교다. 무엇인가? 왕자가 왕자인 이유는? ◎ 소승불교 – 저거 아부지 빽으로 왕자가 된다. ◎ 대승불교 –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왕자대접을 해준다. ◎ 선종불교 – 자기가 자기에게 왕자대접을 하면 왕자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에게 왕자대접을 하는 것인가? 일단 걸음걸이부터 왕자걸음으로 걷고, 말투도 궁중용어를 쓰고, 방귀도 왕자방귀만 뀌고. 이게 점수다. 수행하여 스스로 왕자의 자격을 갖추라는 말이다. 근데 점수는 이 지점에서 다시 소승불교로 되돌아왔다. 다른 점은 소승불교는 전생에 닦은 걸로 해먹는데, 점수는 두타행을 해서 면벽 10년, 장좌불와 10년, 동안거 하안거 몇 십년.. 이런 걸로 해먹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점수는 본질에서 소승으로의 퇴행이다. 결국 아부지 빽이다. 점수를 주장한 신수도 측천무후 빽으로 된 거다. 요즘 스님들도 그렇다. 어떤 스님이 토굴에서 10년 정도 수행했다고 하면 다른 스님들이 한 수 접어준다. 그만한 대접을 해준다. 조폭이 깜빵에서 한 10년 썩다 나오면 조직에서 대접해주는 것과 같다. 돈오점수란 본래 깨달음은 돈오이나 그것은 점수에 의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점수돈오다. 이게 바뀌어서 돈오 하고 난 다음에도 점수를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뒤집어졌는데, 본질은 한 10년간 토굴에서 개고생을 하고 나와야 왕자 대접을 해준다는 거다. 결론은 절집에서 동료스님들이 인정을 해줘야 왕자가 되는 것이며 동료스님 빽으로 된다는 거고 그것은 아부지 빽으로 된다는 것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거다. 대승에서 멀어졌다. 김기덕 감독은 황금사자 빽으로 왕자되었고, 싸이는 빌보드 빽으로 왕자되었다. 돈오돈수는 결국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사회의 진보를 통해서 왕자가 된다는 입장이다. 사회 안으로 뛰어들 수 밖에.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밖에. 물론 사회가 꼭 인간사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가 개인 것은 개대접을 받기 때문이고,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개나 인간이나 전혀 차이가 없다. 인간은 오직 관계 안에서만 상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 그 자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간이 인간대접을 해주기 때문이 아니고, 인간사회 그 자체가 작동하고 있고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들은 진화를 멈처버렸기 때문에 개인 것이고 인간은 인간사회의 진보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의 진보 시스템 안에서만 자기 가치를 높일 수 있다. 개떼는 있어도 개사회는 없다. 인간사회는 있다. 그 안에 진보가 있다. 시스템이 있다. 스타일이 있다. 입자가 있다. 존재가 있다. ◎ 소승 – 전생의 업보로 왕자된다. ◎ 대승 – 사회의 대접으로 왕자된다. ◎ 돈오 – 자신의 대접으로 왕자된다. ◎ 점수 – 중들의 대접으로 왕자된다. ◎ 점수돈오 – 중들의 대접을 받은 다음에 돈오한다.(본래의 점수) ◎ 돈오점수 – 돈오한 다음 중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타협의 산물) ◎ 돈오돈수 – 자신을 대접하고 사회를 바꿔간다.(성철의 주장) 돈오돈수는 성철스님이 새롭게 주장한 것이고, 돈오점수는 사찰의 낡은 관습으로 돈오에 저항한 것이며, 돈오는 혜능의 입장이고, 점수는 신수의 입장이다. 점수가 돈오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점수먼저 해야 돈오된다는 논리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의 본의는 돈오이며, 점수도 역시 돈오이며, 점수가 돈오를 반박한 적이 없으며, 점수개념은 오직 사찰의 시스템 때문에 생겨난 변종인 것이다. 돈오없는 그냥 점수는 있어본 적이 없다. 깨달음은 관계를 바꾸는 것이며, 그러므로 본질에서 깨달음은 돈오다. 돈오점수는 돈오의 파워로 니가 한 번 사찰을 장악해보라는 것이다. 돈오돈수는 세상을 바꾸면 되지 사찰을 장악해서 뭣하느냐는 거다. 근데 스님들은 밥먹여주는 사찰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돈오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돈오한 증거로 스님들을 제압하고 사찰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세월이 흘러 점수된다.
문단에도 이와 비슷한게 있는데 동료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야 등단된다거나 혹은 신춘문예를 통과해야 등단된다거나 하는게 사찰의 점수시스템을 모방했다고 볼 수 있다. 사기다. 생쇼를 하는 거. 깨달음은 돈오이며 점수는 사찰에 머무를 구실에 불과하다. 돈수도 필요없다. 돈오 한 단어로 이야기는 끝났다. 이러한 본질을 지적한 사람은 경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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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관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평범한 가죽도 소리를 내면 북이 되고, 평범한 나무토막도 소리를 내면 목탁이 되고, 평범한 쇠붙이도 소리를 내면 범종이 됩니다. 관계를 바꾸어야 소리가 납니다. 그것은 자신을 창의적인 존재로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며, 세상을 창의하는 무대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며, 창의하는 세상과 창의적인 자신이 범종과 당목의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이며, 북과 북채의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제 소리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목탁은 나무토막에 불과하며,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쇠붙이에 불과하며, 소리가 나지 않은 북은 쇠가죽에 불과합니다. 팽팽하게 긴장시켜 제 안의 소리를 온전히 끄집어내게 하는 것이 스타일입니다. 돈오 스타일로 안내합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권합니다. 소리나는 책입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90년 대에 김용옥의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돈오점수라는 글귀를 보았슴.그 때 김용옥은 한국 선종 중들이 돈오만 강조하며 하도 중생들에게 사기를 치니 돈오하고 점수 후 다시 돈오하라는 식으로 글을 쓴 것으로 기억함.
그 책에서 김용옥은 중들에게 깨닫고 공부하고 또 깨달아라 일갈했던 것으로 기억함.머리깍고 먹물 옷 입었다고 그리고 염불왼다고 중생들 위에서 쑈하지 마라고 함.그리고 성철 스님을 비판했던 것으로 생각됨.
동렬님의 글을 보니 문득 20년 전 읽은 책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어쨌든 김용옥의 책을 읽고 종교는 제게서 멀었졌슴.
용옥이 형이 먼가를 아는 형님은 아니죠.
점수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돈오와 대칭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돈오는 총이 있다는 거고 점수는 사격 좀 한다는 건데 이건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돈오는 자동차가 있다는 거고 점수는 운전면허증이 있다는 건데 이건 개념이 다른 거죠.
면허를 먼저 따고 나중에 차를 살 것인가 아니면
차를 먼저 구하고 나서 도로주행을 연습할 것인가 이딴 소리는 전혀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그런 논쟁은 자동차가 없는 나라에나 먹히는 논쟁입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지난 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 네이버 검색을 하다보니
어떤 블로그에서는 성철 스님이 틀렸다고 하더라구요.
인도 불교에는 깨달음에 대한 매뉴얼이 있어서
시기별로 수행하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그런 게 없어서 진짜 깨달음이 뭔지 배울 수가 없다라고 하더군요.
위에 까뮈님이 말씀하신
김용옥의 얘기와 같네요.
개인적으로
성철스님이 조계종 중종 취임법어에서 했다는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山是山 水是水) "라는
내용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그게 전에 언젠가 동렬님이 설명해주신
"순간의 완전성" 개념과 통한다고 생각해왔던지라
그 블로그의 글은 뭔가 갸우뚱 했죠.
지금 이 글을 읽고 그 모든 게 다 이해가 됩니다.
그야말로 '동렬 스따일'~~~~ 좋은 글... 꼭꼭 씹어먹겠습니다.
김용옥이 대단한 학자이긴 합니다. 글을 보면 정말 어쩌면 저렇게 공부를 많이해서 박식의 첨단을 달릴 수 있을까 무한지식에 감복할때 있습니다. 근데 역시 그도 사람인지라.... 깔때기 자체는 최고급 재질을 이용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을 했지만(세계적 석학이라 인정받아야 함.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인 made in korea 깔때기).... 깔때기 방향이 엇나가는 경우도 있고... 깔때기에 우유/석유/물/두유를 혼합해서 붓고 난 뒤에, 통과되어 나온 혼합물보고 이건 우유의 농간이라고 하는 경우도 간간히 보게되긴 합니다. 깔때기 자랑에 여념이 없는 천진한 모습도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올표 깔때기는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의 대단한 내공이 들어간 작품이라는 것이고, 도올 때문에 향후 우리나라의 국격이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습니다. 이미 중국에서부터 그런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궁금한게 있습니다. 동렬님은 숭산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전에 동렬님 글에서 숭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도 아주 호의적인 것 같지도 않은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숭산은 라즈니쉬 아류입니다.
깨달음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숭산의 코미디.. 사과를 내밀면서
당신이라면 이 사과를 어찌 하겠는가?.. 나라면 덥썩 베어물겠다 ㅋㅋㅋ
미친 쇄끼. 내한테 걸렸다면 뒈지게 맞았을 겁니다.
마음이 아픈데요. 제가 좀 숭산스님을 존경해왔던 터라..... 답변 감사합니다.
글고 동렬님 요번 사진 좋습니다. 천재+천진 이미지.. 조도를 조금 더 낮추면 분위기까지 있을 듯 ^^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또 제 경험에 비추어서 볼 때
서점의 자기개발서의 99.9%는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들어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쓴 깨달음 관한 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한국말로 번역한 책들
또 기타 국내의 누가누가 쓴 책들은 한결같이 읽을수록 허기만 지는데
이런 책들 모두 불태우면 시끄러운 세상이 좀더 조용해지지기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 계시겠지만, 아래는 저의 개인적이 견해입니다.
저는 성당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을 전주로 고등학교를 오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당의 종소리 사찰의 목탁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골에서
전주로 고등학교를 왔을 때 그렇게 종교가 다양한지 처음 알았습니다.
종교때문에 수학여행에 갈 수 없고 학교 단체생활에 참여할 수 없고
머리를 자르면 안되고 일요일날 친구를 만나면 안 되고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종교가 그렇게 사람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때 당시는 충격이었습니다.
처음 입사해서 인턴사원들간의 경쟁이 치열할 때 마음 잡으려고 잠깐 성당에서 교리공부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란...
집에 군대간 오빠는 있었지만, 성당에서 듣는 '하늘의 군대와 천사 (종류도 많음)',
업드려 빈다, 앉게 하시고, ~~하시고' 이런 수동적인 언어들
주교님과 신부님고 함께 평화의 교회를 이루라는 말 (왜 수녀님은 쏙 빼놓는데? 수녀님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신데..)
(대개 많았는데 지금은 이것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성당에서 쓰는 언어가 저와 맞지 않아서 하나하나 의문이어서
위의 내용들을 신부님께 기록해서 드렸더니 신부님은 단한마디의 답변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못 듣고 있고요. 앞으로도 못 들을 겁니다.
내가 여지것 겪은 자기개발서과 종교는
''나'라는 자아은 놔두고 내 밖에서 남을 찾아 그를 닮아가라' 이런 메세지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돈오'가 그간 고민해오던 저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