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입니다.-기고하지 않는)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은 근래에 유포된 생각이오. 150년 전 미국인들은 선량한 농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디언들을 설득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소.
그들은 150년 동안 고심했으나 아직도 인디언들을 선량한 농부로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소. 인디언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는 농부들의 삶을 경멸하였소.
백인 입장에서 그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오. 그들은 아직도 자존심 상해 하고 있소. 그들의 자존심 상함이 침략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소.
인디언의 교화(?)에 실패한 그들은 이번에는 이라크인을 교화해 보기로 목표를 정했소. 그들의 계획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있소.
어떻게 이 문명화 된 시대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오? 21세기의 이 문명은 이다지도 취약한 것이오?
인간의 삶은 마땅히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소. 그 공식은 자기류의 것이며 임의적인 것이오. 인간의 본성에 바탕하지 않은 것이오. 위험하오.
미국의 실패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오. 남아공 백인정부는 오랫동안 흑인 유목민들을 토지에 얽매인 농부로 만드는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소.
호주 정부는 티위오리진을 문명화(?) 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나 실패하였소. 최근 문제가 된 루마니아 대통령의 집시 비하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일이오.
중요한 것은 노동하는 문명인들이 노동하지 않는 야만인(?)들을 교화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오. 왜 실패하는가?
우리의 계획이 옳고 정당하다면 그들도 인간인 이상 마땅히 우리의 계획에 동참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들은 한사코 거부하는가?
이는 이 문명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문명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낳소. 과연 이 문명은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오?
노동하지 않는 유전인자가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면? 노동이 반드시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오.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진화과정을 이해해야 하오. 노동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생존목적의 필요에 의해 전개시켜온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오.
인류의 진화가 이백만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노동의 역사는 불과 1만여년이오. 노동은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할 수 있소.
지금 우리는 도시에서의 삶이 좋은 삶이라는 점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소. 질병의 퇴치, 수명의 연장, 교육기회의 보장 등의 이유로 말이오.
그러나 천년 전에는? 천년 전에는 거의 모든 질병이 도시에서 생겨났소. 도시는 더러웠소. 왜? 당시에는 화장실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오.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지 못했소. 페스트는 쥐가 옮겼지만 쥐가 번성하는 토대는 거리에 뿌려진 인간의 배설물이었던 것이오.(2층에서 창문을 열고 거리로 요강을 비우면 청소업자가 치워가는 시스템.)
도시에서 화장실이 사라진 것은 로마 몰락 이후의 일이고 로마시대에는 공중화장실이 발달해 있었소. 당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모든 질병의 매개가 되었소.
갈리아 전기를 비롯하여 로마시대의 기록물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야만한 게르만인의 숲에서의 삶보다 더 우월한 삶이라는 강조가 무수히 등장하오.
바르바로이들이 로마인들을 경멸했으므로 자존심 상한 도시민들이 바르바로이들의 인식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매우 고심했던 것이오.
그때만 해도 도시에서의 문명적인 삶과 광야나 숲에서의 자유로운 삶 중에 어느 쪽이 우월한 삶인가에 대한 결론이 명확히 나오지 않았던 것이오.
칠천년 전 길가메시 대왕은 광야에서 살고있는 부족민 엔키두를 문명화 시키는 사업에 착수하였소. 엔키두를 도시 우루크로 데려오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소.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어렵사리 친구가 되었지만 엔키두는 죽으면서 광야를 버리고 숲을 파괴한 자신의 삶을 후회했소. 그는 끝내 문명화 되지 않았던 것이오.
과연 도시에서 노동하는 문명적 삶과 광야에서의 자유로운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삶이겠소? 이것이 출발점이오.
우리의 출발점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없다면 이 문명은 실패하게 되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오.
걸인, 사기꾼, 강도, 양아치.. 이들 문명화 되지 않은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건강한 유전인자를 부러워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오.
인간은 진화하오. 노동과 문명은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이루어낸 것이오. 진화할수록 뾰족해지고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되오.
###
(덧글추가)
어떤 일이든 원점에서의 결정이 중요하다. 출발점에서 기초를 잘 다져두어야만 하는 거다.
기점에서 첫 단추를 잘못 꿰어버리면 이후로는 자동전개로 쭉 미끄러져 버리는 법이니까.
'노동할 것인가?'
'문명화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문제를 거의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 - 너무나 당연한 것.
문명? -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것.
이런 식이라면 위험하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항상 소홀하다. 그것이 인간,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조리함.
왜 일하는가? 왜 사는가?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혼자갈 것인가 함께 갈 것인가? 집단의 문명적 삶인가 개인의 자유스런 삶인가?
집단이 일구어낸 찬란한 문명(그러나 여히 미완성인)의 성과 속에 묻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스스로 개척해낸 작지만 완전한 나만의 고유한 미학적 영역을 확보해 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인간의 문명은 그만치 위태로워진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은 근래에 유포된 생각이오. 150년 전 미국인들은 선량한 농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디언들을 설득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소.
그들은 150년 동안 고심했으나 아직도 인디언들을 선량한 농부로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소. 인디언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는 농부들의 삶을 경멸하였소.
백인 입장에서 그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오. 그들은 아직도 자존심 상해 하고 있소. 그들의 자존심 상함이 침략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소.
인디언의 교화(?)에 실패한 그들은 이번에는 이라크인을 교화해 보기로 목표를 정했소. 그들의 계획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있소.
어떻게 이 문명화 된 시대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오? 21세기의 이 문명은 이다지도 취약한 것이오?
인간의 삶은 마땅히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소. 그 공식은 자기류의 것이며 임의적인 것이오. 인간의 본성에 바탕하지 않은 것이오. 위험하오.
미국의 실패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오. 남아공 백인정부는 오랫동안 흑인 유목민들을 토지에 얽매인 농부로 만드는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소.
호주 정부는 티위오리진을 문명화(?) 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나 실패하였소. 최근 문제가 된 루마니아 대통령의 집시 비하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일이오.
중요한 것은 노동하는 문명인들이 노동하지 않는 야만인(?)들을 교화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오. 왜 실패하는가?
우리의 계획이 옳고 정당하다면 그들도 인간인 이상 마땅히 우리의 계획에 동참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들은 한사코 거부하는가?
이는 이 문명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문명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낳소. 과연 이 문명은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오?
노동하지 않는 유전인자가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면? 노동이 반드시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오.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진화과정을 이해해야 하오. 노동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생존목적의 필요에 의해 전개시켜온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오.
인류의 진화가 이백만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노동의 역사는 불과 1만여년이오. 노동은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할 수 있소.
지금 우리는 도시에서의 삶이 좋은 삶이라는 점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소. 질병의 퇴치, 수명의 연장, 교육기회의 보장 등의 이유로 말이오.
그러나 천년 전에는? 천년 전에는 거의 모든 질병이 도시에서 생겨났소. 도시는 더러웠소. 왜? 당시에는 화장실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오.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지 못했소. 페스트는 쥐가 옮겼지만 쥐가 번성하는 토대는 거리에 뿌려진 인간의 배설물이었던 것이오.(2층에서 창문을 열고 거리로 요강을 비우면 청소업자가 치워가는 시스템.)
도시에서 화장실이 사라진 것은 로마 몰락 이후의 일이고 로마시대에는 공중화장실이 발달해 있었소. 당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모든 질병의 매개가 되었소.
갈리아 전기를 비롯하여 로마시대의 기록물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야만한 게르만인의 숲에서의 삶보다 더 우월한 삶이라는 강조가 무수히 등장하오.
바르바로이들이 로마인들을 경멸했으므로 자존심 상한 도시민들이 바르바로이들의 인식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매우 고심했던 것이오.
그때만 해도 도시에서의 문명적인 삶과 광야나 숲에서의 자유로운 삶 중에 어느 쪽이 우월한 삶인가에 대한 결론이 명확히 나오지 않았던 것이오.
칠천년 전 길가메시 대왕은 광야에서 살고있는 부족민 엔키두를 문명화 시키는 사업에 착수하였소. 엔키두를 도시 우루크로 데려오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소.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어렵사리 친구가 되었지만 엔키두는 죽으면서 광야를 버리고 숲을 파괴한 자신의 삶을 후회했소. 그는 끝내 문명화 되지 않았던 것이오.
과연 도시에서 노동하는 문명적 삶과 광야에서의 자유로운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삶이겠소? 이것이 출발점이오.
우리의 출발점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없다면 이 문명은 실패하게 되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오.
걸인, 사기꾼, 강도, 양아치.. 이들 문명화 되지 않은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건강한 유전인자를 부러워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오.
인간은 진화하오. 노동과 문명은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이루어낸 것이오. 진화할수록 뾰족해지고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되오.
###
(덧글추가)
어떤 일이든 원점에서의 결정이 중요하다. 출발점에서 기초를 잘 다져두어야만 하는 거다.
기점에서 첫 단추를 잘못 꿰어버리면 이후로는 자동전개로 쭉 미끄러져 버리는 법이니까.
'노동할 것인가?'
'문명화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문제를 거의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 - 너무나 당연한 것.
문명? -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것.
이런 식이라면 위험하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항상 소홀하다. 그것이 인간,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조리함.
왜 일하는가? 왜 사는가?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혼자갈 것인가 함께 갈 것인가? 집단의 문명적 삶인가 개인의 자유스런 삶인가?
집단이 일구어낸 찬란한 문명(그러나 여히 미완성인)의 성과 속에 묻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스스로 개척해낸 작지만 완전한 나만의 고유한 미학적 영역을 확보해 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인간의 문명은 그만치 위태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