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하지 않는 개인적인 글입니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우리시대는 해독되고 있는가?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인간들은 무리지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명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로 간다면 정보화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가 혁명의 세기라면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의 등장, 구조주의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인상주의 화풍의 석권, 대중음악의 유행, 재즈와 팝아트, 매스미디어의 등장.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모색들이다. 확실히 이전시대와 차별화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러나 양차세계대전 후 나타난 실존주의, 매스미디어, 인상주의, 대중음악 등은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른 흐름이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패러다임은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뀌는 현상이다. 전부를 변하게 하는 하나는 생산력의 변화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가 20세기 이후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생산력의 변화 하나가 촉발한 ‘전부의 변화’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사실주의가 아니라 인상주의, 고전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으로 간다.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가 도리어 탈사회주의를 촉발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과 밀접한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도리어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인상주의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그룹이 주장하는 진보의 전망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기획한 닫힌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의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고 있다.
계몽에서 소통으로 간다
사회주의는 계몽운동이다. 고전주의는 계몽운동이다. 사실주의도 계몽운동이다. 이는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모럴은 진보진영의 기획의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군주가 궁궐 앞에 광장을 개설한 것은 그 광장을 이용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위력을 과시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광장은 지금 무질서한 민중들에게 접수되고 말았다.
광장은 민중의 창발성에 의해 다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 장사치와 광대패와 웅변가와 이방인이 모여들어 제멋대로 상품을 거래하고 희극을 공연하고 군중을 선동하며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지식인이 ‘이상주의’라는 기획의도로 개설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고전주의라는 계몽의 광장이 민중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인상주의, 대중음악, 팝아트라는 소통의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은 전부 바꾸자는 것이다. 전부 바꾸려면 계몽이 아니라 소통이어야 한다. 이상주의를 앞세운 지식의 통제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것이어야 한다. 민중의 창발성에 의존해야 한다. 소통에 의해 전부 바뀐다.
세상 전부에 맞서기
사상(思想)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란 또한 무엇인가? 세상이라는 주어진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하나의 스탠스에서 얻어진 각각의 포지션들이다.
사상은 하나로 통일된 인식과 판단의 ‘체계’다. 사상은 체계한다. 체계한다는 것은 아이디어를 합치고 갈라서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모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통일시켜 놓은 것이 사상이다.
왜 아이디어들을 통일시켜야 하는가? 대응하기 위해서다. 맞서기 위해서다. 응전하기 위해서다. 어디에 맞서는가? 세상에 맞선다. 먼저 세상이 있었고 그 세상에 인간은 내던져졌다. 그 세상과 충돌한다. 그리고 응전한다.
사상은 체계한다. 가르고 합쳐서 세상과 맞선다. 사상이 합치는 것은 인식이고 가르는 것은 판단이다. 인식은 눈과 귀와 코와 몸으로 얻은 정보를 머리에서 합친다. 합쳐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맞섬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행동은 오늘의 행동과 내일의 행동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판단은 가른다.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인식은 정보를 합치고 판단은 행동의 순서를 가른다.
적이 나타났다. 인식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정보를 합친다. 판단은 왼손으로 막고 오른손으로 치기로 행동을 가른다.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을 갈라야 한다. 그러므로 인식은 체(體)로 합치고 판단은 계(系)로 가른다.
인식은 합치므로 질서가 필요하고 판단은 가르므로 그것을 연결시킬 가치가 필요하다. 체계(體系)의 체(體)가 인식을 합치는 몸통이라면 계(系)는 판단과 행동이 ‘갈라지는’ 팔다리의 관절이다.
● 철학의 인식 - 질서와 가치를 통일하여 내적 정합성에 도달한다.
● 사상의 판단 - 주어진 환경에 맞서 체계화된 인식으로 대응한다.
● 이념의 행동 - 사상을 널리 타인과 공유하고 전파하며 실천한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맞섬은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순서로 전개된다. 몸통은 합치고 팔다리는 가른다. 합치는 몸통이 가르는 팔다리를 지배한다. 인식이 몸통이 되어 판단을 지배한다. 판단이 팔다리가 되어 행동을 지배한다.
철학이 인식과 판단을 통일하여 내적 정합성을 부여함이라면 사상은 이를 대외적으로 표방함이다. 철학이 안을 바라본다면 사상은 밖을 바라본다. 철학은 안을 통일하고 사상은 밖에 환경에 맞선다.
이데올로기는 이를 타인과 공유하고 널리 전파한다. 철학은 인식하고 사상은 판단하고 이념은 행동한다. ‘환경(세상)≫인간(실존)≫인식(철학)≫판단(사상)≫행동(이념)’의 순서로 세상에 대한 인간의 맞서기는 전개된다.
존재는 곧 맞섬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 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 환경은 거칠기 짝이 없는 생존경쟁의 생태계 환경이다. 환경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판단의 체계가 필요하다. 곧 사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여 세상과 맞선다. 목수는 망치와 끌이 맞서는 도구다. 선비는 붓으로 세상과 맞선다. 지식인은 진리로 세상과 맞선다. 인간은 사상으로 세상과 맞선다. 사상이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다.
타자는 방망이로 투수의 공에 맞선다. 맞서려면 자세를 잡아야 한다.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사상이 타자가 투수의 공에 맞서기라면 철학은 타자가 방망이로 힘을 끌어모으기다.
사상은 밖의 변화에 맞서고 철학은 안을 짜임새있게 통일한다. 개인의 내부에서 성립하면 철학이 되고, 이를 외적으로 표방하면 사상이 되고, 사상을 다수와 공유하고 널리 소통하면 이념이 된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의 ‘밸런스의 축’이 있다. 타자는 상체와 하체의 밸런스로 스탠스를 잡는다. 철학은 질서와 가치, 합치기와 가르기, 인식과 판단이라는 체계로 인간 존재의 스탠스를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이어내는 것은 ‘맞섬’이다. 모든 맞서는 것에 밸런스가 있고 스탠스가 있다. 사상은 세상과 맞섬이고 철학은 나(我)와 맞섬이고 이념은 다 함께 맞섬이다. 인식으로 맞서고 판단으로 맞서고 행동으로 맞선다.
나(我)는 손(手)에 창(戈)을 쥔 자세다. 손에 창을 들고 적과 맞서는 스탠스다. 그것이 나의 실존이다. 무릇 하나의 존재란 곧 하나의 맞섬이다. 외부환경의 교섭에 응하여 맞설 때 내가 있고 맞서지 않을 때 나는 없다.
인간의 실존이란 손에 창을 쥐고 세상과 맞서는 것이다. ‘맞선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글의 시작이요 끝이다. 나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인식의 맞섬, 판단의 맞섬, 행동의 맞섬으로 글을 이어간다.
세상 모든 맞서는 것에는 스탠스가 있고 그 스탠스의 내부에는 밸런스가 있다. 그 밸런스의 축이 있다. 수레는 굴대가 축이다. 그 축을 중심으로 대칭과 평형의 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를 중심으로 패러다임은 전개한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맞섬이 축이다. 정치는 여당과 야당의 맞섬이 축이다. 스포츠는 우리편과 상대편의 맞섬이 축이다. 드라마는 주인공과 악역의 맞섬이 축이다. 사랑은 여자와 남자의 ‘마주서기’가 축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반드시 맞섬이 있고, 맞섬에는 밀고 당기는 균형의 축이 있고 그 반향을 외부에 전달하는 날이 있고, 축과 날 사이의 밸런스를 통제하는 스탠스가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 사이에 체계가 있다.
우리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사상이든 21세기라는 이 시대 역사의 방향성에서 유도된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지구촌 인류문명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문명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 이 시대 역사와 문명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성’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배경과 맞서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를 사상한다. 우리는 지금 ‘현대’를 사상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사회주의, 사실주의,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20세기 진보주의의 비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그것이 21세기다.
구조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열린사회, 인상주의, 팝아트, 대중문화, 매스미디어.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는? 삶의 양식의 변화다. 생산력이 1라운드면 생산관계가 2라운드이고 삶의 양식은 3라운드다.
삶의 양식은 곧 문화다. 21세기의 도전에 대한 우리의 응전은 한 마디로 ‘문화’여야 한다. 20세기의 혁명이 유일하게 계몽이라는 성과를 낳았다면 21세기의 변혁은 문화와 양식을 성과로 남긴다. 후세를 위한 새로운 소통의 구조를 남긴다.
문화는 ‘양식’을 남긴다. 양식은 ‘미학’을 남긴다. 미학은 ‘완성’을 남긴다. 완성은 ‘소통’을 열어젖힌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새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 양식의 완성 곧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쌍방향적 의사소통 구조의 완성으로 간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하고 삶의 양식의 변화로 전개된다. 내부에 변화를 촉발하는 동력원이 있다. 밸런스의 축이 있다. 그 밸런스의 축이 전개하여 소통구조의 혁신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완성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완성은 이탈리아의 한 도시 피렌체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대 시대정신의 정수를 담아내는 미학적 양식을 세련되게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 이전에 먼저 와서 광야에 뿌려둔 씨앗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이스 시대의 이상주의다. 그리이스 정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완성시켰다. 뿌리가 있기에 계승될 수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역시 르네상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문명은 당송시대가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남조문화가 먼저 있었다. 당송시대가 로마라면 남조문화가 그리이스다. 로마문명이 그리이스 문명의 표절과 복제에 불과하듯이 당송시대의 문명은 남조문화의 계승에 불과하다.
영국은 세익스피어가 굵은 방점을 찍었다. 세익스피어 이후 세익스피어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발달한 미국문명은 양식의 완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이스 정신에 맞먹는 미국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결여된 로마문명이 그리이스 문명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역시 이상주의가 결여된 미국문화는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문화의 표절에 불과하다.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이상주의가 축이다. 이상주의란 불완전한 인간이 신(神)의 완전성에 맞서는 것이다. 가장 크게 각을 세우는 것이다. 거기서 진리라는 질서와 욕망이라는 가치가 유도되고 그 둘의 밸런스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찾아진다.
8세기 신라 왕실문화의 극성, 12세기 고려 귀족문화의 번성, 17세기 조선 선비문화의 완성에 이어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우리의 삶의 양식은? 진정한 이 시대의 모럴은? 그것이 우리의 철학이요 사상이요 이념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인상파는 빛을 그렸다. 빛을 그리려면 빛이 비치는 야외로 나가야 한다. 야외로 나오면 유화물감은 변질된다. 그 시점에 빛을 쪼여도 변색되지 않는 안료가 발명되었다. 인상주의의 등장은 과학의 혁신에 기반하고 있다.
쿠르베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그려라’고 했다. 눈으로 그리기 어렵다. 안료가 변색되기 때문이다. 명암이론과 색채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르베 이전에는 눈으로 그리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인상주의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주의가 일구어낸 기교와 형식이 도리어 그 고전적 형식미를 극복하는 낭만주의를 촉발한 예와 유사하다.
인상주의는 빛에 도전한다. 빛은 과학이다. 명암이론과 색채이론과 변질되지 않는 안료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빛에 도전하기 어렵다. 과학이 사실주의를 만들었고 그 사실주의가 인상주의를 촉발한 거다.
무엇인가? 안료의 발명과 색채학의 발달이 생산력의 변화라면 사실주의의 등장은 생산관계의 변화다. 인간의 관념이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자연의 대상이 주체가 되는 회화로 계급 사이에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사실주의가 인상주의를 촉발한다. 인상주의는 회화에 대한 인간의 태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무엇인가? 현대성(la modernite)이라는 물결이다.
인상주의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변혁과 관련이 있다.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지식인이 독점하는 계몽의 가치가 퇴색하고 관객이 주체가 되는 소통의 가치가 확립된 것이 인상주의로 전개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화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따른 회화의 재구성이다. 쿠르베는 자연의 사실에서 그 조형적 질서를 찾아내었고 마네와 모네는 빛의 인상에서 그 조형적 질서를 찾아낸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참(眞)된 리(理)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옥(玉)+리(里)로 보석세공사가 옥을 갈아내는 결이다. 옥은 결대로 갈아야 한다. 결이란 무엇인가? 나이테가 결이다. 그래서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한다.
나이테는 무엇인가? 나무 자신의 내적인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다. 나무가 세상에 맞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실존적 스탠스다. 나무의 자아가 그 아(我)의 손(手)에 창(戈)을 쥔 것이 나이테다.
진리는 존재의 나이테다. 진리는 만유에 공통된 나이테다. 반드시 나이테가 있다. 결이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결이 있다. 결이 리(理)다. 진리는 존재의 결이다. 결이란 사물 자체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밸런스와 스탠스의 질서다.
모든 존재는 내면에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감추고 있다.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곧 자기다움이다. 자기다움이 결이다. 내가 나 다운 것이 나의 결이다. 인상주의가 바로 그것을 찾아내었다.
성경이나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메시지가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조형적 본성을 찾아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비로소 진정한 현대회화의 확립이다. 바로 그것이 21세기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현대성’이다.
고흐와 피카소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회화를 추구하는 조형적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은 본래 그것을 욕망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거간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브로커다. 뚜쟁이의 짓이다. 성경에서 빌어온 메시지,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한 다리 건너 관객에게 중계방송 한다면 그것은 사이비다.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미학은 사물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찾아낸다. 결을 찾아낸다. 리(理)를 찾아낸다. 나이테를 찾아낸다. 숨은 질서를 찾아낸다. 도공은 흙에서 결을 찾아내고 석수장이는 돌에서 결을 찾아내고 목수는 나무에서 결을 찾아낸다.
인간에게는 인식과 판단과 행동이라는 일 사이클의 결이 있다. 곧 철학과 사상과 이념으로 전개한다. 회화는 빛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고 음악은 소리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고 영화는 액션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다.
서예에 있어서는 추사가 그 ‘결’을 완성했다. 석봉의 글씨는 다만 자와 획의 결을 따를 뿐이다. 석봉은 자획의 질서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반면 추사는 종이와 먹과 붓의 대결에서 숨은 결을 찾아내고 있다.
존재는 맞섬이다. 결은 맞섬이다. 먹은 퍼짐으로 종이에 맞서고, 붓은 날램으로 먹에 맞서고, 종이는 빨아들임으로 붓에 맞선다. 추사의 글씨에는 종이와 붓과 먹이 치열하게 맞서서 고민하고 다툰 흔적이 남아있다.
추사의 글씨는 과학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색채학에 기반한 과학이었듯이 추사는 금석학이라는 과학에 기초하여 초기 금석학적 사실주의에서 말년에 이르러 추사체 특유의 인상주의까지 단번에 전개시켜 버린 것이다.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전개
사실에서 인상으로의 전개는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전개가 된다. 고전주의가 객관이라면 낭만주의는 주관이다. 추사의 금석학이 객관적 회화라면 그가 개발한 추사체는 주관적 회화이다.
사회주의는 객관이다. 실존주의는 주관이다. 과학의 객관이 생산력의 변화를 낳고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생산관계가 역전되어 생산자의 객관에서 소비자의 주관으로 시장의 질서가 바뀐다.
작가의 메시지가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 그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주체가 되는 회화로 거대한 역전이 일어난다. 무대 위의 연사가 주체가 되는 웅변에서 무대 밖의 관객이 댓글을 다는 인터넷으로 역전된다.
이상주의에 기초한 진보의 기획의도는 객관이었다. 과학이었다. 그러나 그 과학이 촉발한 21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민중들 개개인의 주관이다. 소통이다. 곧 ‘현대성’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맞서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그 과학은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첨단 촬영기술은 판타지와 결합하여 점점 더 주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성공은 피아노줄을 이용한 액션기술이었다. 역시 과학의 발전이 홍콩영화의 성공을 이끌어낸 것이다. 객관의 과학이 도리어 예술을 주관화 시킨다. 그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20세기의 영화는 자연의 표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이었다. 21세기에는 CG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의 내면까지 주관적으로 묘사하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극장가는 점점 더 김기덕식 판타지의 지배로 가고 있다.
사실주의 이전의 아카데미즘이 성경이나 희랍신화의 메시지를 매개로 이용한다면 쿠르베는 자연을 매개로 이용하고 마네는 빛을 매개로 이용한다. 관객 개개인의 내면에 숨은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현대성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수준에 도달했다. 김기덕이 이 시대의 고흐다.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주제의식은 고전회화가 성경을 이용하듯이 남의 것을 매개삼는 것이다. 관객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끌어내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
구조주의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체계 내에서 요소들 상호간의 긴밀성에서 얻어지는 극적 긴장감에의 도달을 목표로 한 미학적 양식의 완성을 추구한다. 곧 체계 내에서 요소들 상호간의 밸런스를 찾아내는 것이다.
밸런스는 맞섬에서 얻어진다. 맞서는 지점을 찾는 것이 구조주의다. 나이테를 찾고 결을 찾는다. 음악에서는 음과 음이 맞섬이 있고 회화에서는 빛과 빛이 맞섬이 있고 문학에서는 단어와 단어의 맞섬이 있다.
그러한 맞섬들에서 호흡과 운율과 리듬과 밸런스가 얻어지고 그 밸런스들을 통제하는 스탠스가 성립된다. 그 스탠스가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그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곧 직관이다. 인상주의는 관객의 직관에 의존한다.
평론가는 객관으로 설명하지만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낸다.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내지만 관객은 직관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작가는 메시지를 숨겨두려 하지만 관객은 단지 자신의 체험과 일치하는 패턴을 인식할 뿐이다.
사실주의의 기반이 된 색채학의 발달을 비롯한 과학적 혁신이 객관이면, 그 과학의 혁신을 반영한 작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는 주관이고, 그 작가와 소통하는 관객의 감상은 패턴인식의 직관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줌은 아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승은 제자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이 작가의 작품을 직관함은 관객 자신의 체험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한 번도 밀밭에 가 보지 못한 사람은 고흐의 밀밭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그 찬란한 가슴저림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작가와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
철학은 인식하고 사상은 판단하고 이념은 행동한다. 과학은 객관으로 인식하고 예술은 주관으로 판단하고 민중은 직관으로 소통한다. 관객 자신의 미적 본성에서 조형적 질서를 찾아 작가와 바로 소통한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우리시대는 해독되고 있는가?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인간들은 무리지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명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로 간다면 정보화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가 혁명의 세기라면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의 등장, 구조주의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인상주의 화풍의 석권, 대중음악의 유행, 재즈와 팝아트, 매스미디어의 등장.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모색들이다. 확실히 이전시대와 차별화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러나 양차세계대전 후 나타난 실존주의, 매스미디어, 인상주의, 대중음악 등은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른 흐름이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패러다임은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뀌는 현상이다. 전부를 변하게 하는 하나는 생산력의 변화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가 20세기 이후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생산력의 변화 하나가 촉발한 ‘전부의 변화’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사실주의가 아니라 인상주의, 고전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으로 간다.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가 도리어 탈사회주의를 촉발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과 밀접한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도리어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인상주의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그룹이 주장하는 진보의 전망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기획한 닫힌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의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고 있다.
계몽에서 소통으로 간다
사회주의는 계몽운동이다. 고전주의는 계몽운동이다. 사실주의도 계몽운동이다. 이는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모럴은 진보진영의 기획의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군주가 궁궐 앞에 광장을 개설한 것은 그 광장을 이용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위력을 과시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광장은 지금 무질서한 민중들에게 접수되고 말았다.
광장은 민중의 창발성에 의해 다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 장사치와 광대패와 웅변가와 이방인이 모여들어 제멋대로 상품을 거래하고 희극을 공연하고 군중을 선동하며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지식인이 ‘이상주의’라는 기획의도로 개설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고전주의라는 계몽의 광장이 민중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인상주의, 대중음악, 팝아트라는 소통의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은 전부 바꾸자는 것이다. 전부 바꾸려면 계몽이 아니라 소통이어야 한다. 이상주의를 앞세운 지식의 통제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것이어야 한다. 민중의 창발성에 의존해야 한다. 소통에 의해 전부 바뀐다.
세상 전부에 맞서기
사상(思想)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란 또한 무엇인가? 세상이라는 주어진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하나의 스탠스에서 얻어진 각각의 포지션들이다.
사상은 하나로 통일된 인식과 판단의 ‘체계’다. 사상은 체계한다. 체계한다는 것은 아이디어를 합치고 갈라서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모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통일시켜 놓은 것이 사상이다.
왜 아이디어들을 통일시켜야 하는가? 대응하기 위해서다. 맞서기 위해서다. 응전하기 위해서다. 어디에 맞서는가? 세상에 맞선다. 먼저 세상이 있었고 그 세상에 인간은 내던져졌다. 그 세상과 충돌한다. 그리고 응전한다.
사상은 체계한다. 가르고 합쳐서 세상과 맞선다. 사상이 합치는 것은 인식이고 가르는 것은 판단이다. 인식은 눈과 귀와 코와 몸으로 얻은 정보를 머리에서 합친다. 합쳐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맞섬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행동은 오늘의 행동과 내일의 행동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판단은 가른다.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인식은 정보를 합치고 판단은 행동의 순서를 가른다.
적이 나타났다. 인식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정보를 합친다. 판단은 왼손으로 막고 오른손으로 치기로 행동을 가른다.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을 갈라야 한다. 그러므로 인식은 체(體)로 합치고 판단은 계(系)로 가른다.
인식은 합치므로 질서가 필요하고 판단은 가르므로 그것을 연결시킬 가치가 필요하다. 체계(體系)의 체(體)가 인식을 합치는 몸통이라면 계(系)는 판단과 행동이 ‘갈라지는’ 팔다리의 관절이다.
● 철학의 인식 - 질서와 가치를 통일하여 내적 정합성에 도달한다.
● 사상의 판단 - 주어진 환경에 맞서 체계화된 인식으로 대응한다.
● 이념의 행동 - 사상을 널리 타인과 공유하고 전파하며 실천한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맞섬은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순서로 전개된다. 몸통은 합치고 팔다리는 가른다. 합치는 몸통이 가르는 팔다리를 지배한다. 인식이 몸통이 되어 판단을 지배한다. 판단이 팔다리가 되어 행동을 지배한다.
철학이 인식과 판단을 통일하여 내적 정합성을 부여함이라면 사상은 이를 대외적으로 표방함이다. 철학이 안을 바라본다면 사상은 밖을 바라본다. 철학은 안을 통일하고 사상은 밖에 환경에 맞선다.
이데올로기는 이를 타인과 공유하고 널리 전파한다. 철학은 인식하고 사상은 판단하고 이념은 행동한다. ‘환경(세상)≫인간(실존)≫인식(철학)≫판단(사상)≫행동(이념)’의 순서로 세상에 대한 인간의 맞서기는 전개된다.
존재는 곧 맞섬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 위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 환경은 거칠기 짝이 없는 생존경쟁의 생태계 환경이다. 환경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판단의 체계가 필요하다. 곧 사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여 세상과 맞선다. 목수는 망치와 끌이 맞서는 도구다. 선비는 붓으로 세상과 맞선다. 지식인은 진리로 세상과 맞선다. 인간은 사상으로 세상과 맞선다. 사상이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다.
타자는 방망이로 투수의 공에 맞선다. 맞서려면 자세를 잡아야 한다.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사상이 타자가 투수의 공에 맞서기라면 철학은 타자가 방망이로 힘을 끌어모으기다.
사상은 밖의 변화에 맞서고 철학은 안을 짜임새있게 통일한다. 개인의 내부에서 성립하면 철학이 되고, 이를 외적으로 표방하면 사상이 되고, 사상을 다수와 공유하고 널리 소통하면 이념이 된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의 ‘밸런스의 축’이 있다. 타자는 상체와 하체의 밸런스로 스탠스를 잡는다. 철학은 질서와 가치, 합치기와 가르기, 인식과 판단이라는 체계로 인간 존재의 스탠스를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이어내는 것은 ‘맞섬’이다. 모든 맞서는 것에 밸런스가 있고 스탠스가 있다. 사상은 세상과 맞섬이고 철학은 나(我)와 맞섬이고 이념은 다 함께 맞섬이다. 인식으로 맞서고 판단으로 맞서고 행동으로 맞선다.
나(我)는 손(手)에 창(戈)을 쥔 자세다. 손에 창을 들고 적과 맞서는 스탠스다. 그것이 나의 실존이다. 무릇 하나의 존재란 곧 하나의 맞섬이다. 외부환경의 교섭에 응하여 맞설 때 내가 있고 맞서지 않을 때 나는 없다.
인간의 실존이란 손에 창을 쥐고 세상과 맞서는 것이다. ‘맞선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글의 시작이요 끝이다. 나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인식의 맞섬, 판단의 맞섬, 행동의 맞섬으로 글을 이어간다.
세상 모든 맞서는 것에는 스탠스가 있고 그 스탠스의 내부에는 밸런스가 있다. 그 밸런스의 축이 있다. 수레는 굴대가 축이다. 그 축을 중심으로 대칭과 평형의 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를 중심으로 패러다임은 전개한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맞섬이 축이다. 정치는 여당과 야당의 맞섬이 축이다. 스포츠는 우리편과 상대편의 맞섬이 축이다. 드라마는 주인공과 악역의 맞섬이 축이다. 사랑은 여자와 남자의 ‘마주서기’가 축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반드시 맞섬이 있고, 맞섬에는 밀고 당기는 균형의 축이 있고 그 반향을 외부에 전달하는 날이 있고, 축과 날 사이의 밸런스를 통제하는 스탠스가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 사이에 체계가 있다.
우리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사상이든 21세기라는 이 시대 역사의 방향성에서 유도된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지구촌 인류문명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문명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 이 시대 역사와 문명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성’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배경과 맞서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를 사상한다. 우리는 지금 ‘현대’를 사상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사회주의, 사실주의,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20세기 진보주의의 비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그것이 21세기다.
구조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열린사회, 인상주의, 팝아트, 대중문화, 매스미디어.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는? 삶의 양식의 변화다. 생산력이 1라운드면 생산관계가 2라운드이고 삶의 양식은 3라운드다.
삶의 양식은 곧 문화다. 21세기의 도전에 대한 우리의 응전은 한 마디로 ‘문화’여야 한다. 20세기의 혁명이 유일하게 계몽이라는 성과를 낳았다면 21세기의 변혁은 문화와 양식을 성과로 남긴다. 후세를 위한 새로운 소통의 구조를 남긴다.
문화는 ‘양식’을 남긴다. 양식은 ‘미학’을 남긴다. 미학은 ‘완성’을 남긴다. 완성은 ‘소통’을 열어젖힌다.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새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 양식의 완성 곧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쌍방향적 의사소통 구조의 완성으로 간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하고 삶의 양식의 변화로 전개된다. 내부에 변화를 촉발하는 동력원이 있다. 밸런스의 축이 있다. 그 밸런스의 축이 전개하여 소통구조의 혁신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완성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완성은 이탈리아의 한 도시 피렌체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대 시대정신의 정수를 담아내는 미학적 양식을 세련되게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 이전에 먼저 와서 광야에 뿌려둔 씨앗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이스 시대의 이상주의다. 그리이스 정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완성시켰다. 뿌리가 있기에 계승될 수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역시 르네상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문명은 당송시대가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남조문화가 먼저 있었다. 당송시대가 로마라면 남조문화가 그리이스다. 로마문명이 그리이스 문명의 표절과 복제에 불과하듯이 당송시대의 문명은 남조문화의 계승에 불과하다.
영국은 세익스피어가 굵은 방점을 찍었다. 세익스피어 이후 세익스피어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발달한 미국문명은 양식의 완성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이스 정신에 맞먹는 미국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결여된 로마문명이 그리이스 문명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역시 이상주의가 결여된 미국문화는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문화의 표절에 불과하다.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이상주의가 축이다. 이상주의란 불완전한 인간이 신(神)의 완전성에 맞서는 것이다. 가장 크게 각을 세우는 것이다. 거기서 진리라는 질서와 욕망이라는 가치가 유도되고 그 둘의 밸런스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찾아진다.
8세기 신라 왕실문화의 극성, 12세기 고려 귀족문화의 번성, 17세기 조선 선비문화의 완성에 이어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우리의 삶의 양식은? 진정한 이 시대의 모럴은? 그것이 우리의 철학이요 사상이요 이념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인상파는 빛을 그렸다. 빛을 그리려면 빛이 비치는 야외로 나가야 한다. 야외로 나오면 유화물감은 변질된다. 그 시점에 빛을 쪼여도 변색되지 않는 안료가 발명되었다. 인상주의의 등장은 과학의 혁신에 기반하고 있다.
쿠르베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그려라’고 했다. 눈으로 그리기 어렵다. 안료가 변색되기 때문이다. 명암이론과 색채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르베 이전에는 눈으로 그리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인상주의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주의가 일구어낸 기교와 형식이 도리어 그 고전적 형식미를 극복하는 낭만주의를 촉발한 예와 유사하다.
인상주의는 빛에 도전한다. 빛은 과학이다. 명암이론과 색채이론과 변질되지 않는 안료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빛에 도전하기 어렵다. 과학이 사실주의를 만들었고 그 사실주의가 인상주의를 촉발한 거다.
무엇인가? 안료의 발명과 색채학의 발달이 생산력의 변화라면 사실주의의 등장은 생산관계의 변화다. 인간의 관념이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자연의 대상이 주체가 되는 회화로 계급 사이에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사실주의가 인상주의를 촉발한다. 인상주의는 회화에 대한 인간의 태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무엇인가? 현대성(la modernite)이라는 물결이다.
인상주의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변혁과 관련이 있다.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지식인이 독점하는 계몽의 가치가 퇴색하고 관객이 주체가 되는 소통의 가치가 확립된 것이 인상주의로 전개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화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따른 회화의 재구성이다. 쿠르베는 자연의 사실에서 그 조형적 질서를 찾아내었고 마네와 모네는 빛의 인상에서 그 조형적 질서를 찾아낸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참(眞)된 리(理)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옥(玉)+리(里)로 보석세공사가 옥을 갈아내는 결이다. 옥은 결대로 갈아야 한다. 결이란 무엇인가? 나이테가 결이다. 그래서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한다.
나이테는 무엇인가? 나무 자신의 내적인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다. 나무가 세상에 맞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실존적 스탠스다. 나무의 자아가 그 아(我)의 손(手)에 창(戈)을 쥔 것이 나이테다.
진리는 존재의 나이테다. 진리는 만유에 공통된 나이테다. 반드시 나이테가 있다. 결이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결이 있다. 결이 리(理)다. 진리는 존재의 결이다. 결이란 사물 자체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밸런스와 스탠스의 질서다.
모든 존재는 내면에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감추고 있다.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곧 자기다움이다. 자기다움이 결이다. 내가 나 다운 것이 나의 결이다. 인상주의가 바로 그것을 찾아내었다.
성경이나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메시지가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조형적 본성을 찾아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비로소 진정한 현대회화의 확립이다. 바로 그것이 21세기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현대성’이다.
고흐와 피카소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회화를 추구하는 조형적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은 본래 그것을 욕망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거간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브로커다. 뚜쟁이의 짓이다. 성경에서 빌어온 메시지,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한 다리 건너 관객에게 중계방송 한다면 그것은 사이비다.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미학은 사물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찾아낸다. 결을 찾아낸다. 리(理)를 찾아낸다. 나이테를 찾아낸다. 숨은 질서를 찾아낸다. 도공은 흙에서 결을 찾아내고 석수장이는 돌에서 결을 찾아내고 목수는 나무에서 결을 찾아낸다.
인간에게는 인식과 판단과 행동이라는 일 사이클의 결이 있다. 곧 철학과 사상과 이념으로 전개한다. 회화는 빛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고 음악은 소리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고 영화는 액션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결이다.
서예에 있어서는 추사가 그 ‘결’을 완성했다. 석봉의 글씨는 다만 자와 획의 결을 따를 뿐이다. 석봉은 자획의 질서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반면 추사는 종이와 먹과 붓의 대결에서 숨은 결을 찾아내고 있다.
존재는 맞섬이다. 결은 맞섬이다. 먹은 퍼짐으로 종이에 맞서고, 붓은 날램으로 먹에 맞서고, 종이는 빨아들임으로 붓에 맞선다. 추사의 글씨에는 종이와 붓과 먹이 치열하게 맞서서 고민하고 다툰 흔적이 남아있다.
추사의 글씨는 과학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색채학에 기반한 과학이었듯이 추사는 금석학이라는 과학에 기초하여 초기 금석학적 사실주의에서 말년에 이르러 추사체 특유의 인상주의까지 단번에 전개시켜 버린 것이다.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전개
사실에서 인상으로의 전개는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전개가 된다. 고전주의가 객관이라면 낭만주의는 주관이다. 추사의 금석학이 객관적 회화라면 그가 개발한 추사체는 주관적 회화이다.
사회주의는 객관이다. 실존주의는 주관이다. 과학의 객관이 생산력의 변화를 낳고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생산관계가 역전되어 생산자의 객관에서 소비자의 주관으로 시장의 질서가 바뀐다.
작가의 메시지가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 그 자체의 조형적 질서가 주체가 되는 회화로 거대한 역전이 일어난다. 무대 위의 연사가 주체가 되는 웅변에서 무대 밖의 관객이 댓글을 다는 인터넷으로 역전된다.
이상주의에 기초한 진보의 기획의도는 객관이었다. 과학이었다. 그러나 그 과학이 촉발한 21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민중들 개개인의 주관이다. 소통이다. 곧 ‘현대성’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맞서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그 과학은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첨단 촬영기술은 판타지와 결합하여 점점 더 주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성공은 피아노줄을 이용한 액션기술이었다. 역시 과학의 발전이 홍콩영화의 성공을 이끌어낸 것이다. 객관의 과학이 도리어 예술을 주관화 시킨다. 그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20세기의 영화는 자연의 표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이었다. 21세기에는 CG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의 내면까지 주관적으로 묘사하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극장가는 점점 더 김기덕식 판타지의 지배로 가고 있다.
사실주의 이전의 아카데미즘이 성경이나 희랍신화의 메시지를 매개로 이용한다면 쿠르베는 자연을 매개로 이용하고 마네는 빛을 매개로 이용한다. 관객 개개인의 내면에 숨은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현대성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수준에 도달했다. 김기덕이 이 시대의 고흐다.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주제의식은 고전회화가 성경을 이용하듯이 남의 것을 매개삼는 것이다. 관객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끌어내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구조주의적 접근
구조주의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체계 내에서 요소들 상호간의 긴밀성에서 얻어지는 극적 긴장감에의 도달을 목표로 한 미학적 양식의 완성을 추구한다. 곧 체계 내에서 요소들 상호간의 밸런스를 찾아내는 것이다.
밸런스는 맞섬에서 얻어진다. 맞서는 지점을 찾는 것이 구조주의다. 나이테를 찾고 결을 찾는다. 음악에서는 음과 음이 맞섬이 있고 회화에서는 빛과 빛이 맞섬이 있고 문학에서는 단어와 단어의 맞섬이 있다.
그러한 맞섬들에서 호흡과 운율과 리듬과 밸런스가 얻어지고 그 밸런스들을 통제하는 스탠스가 성립된다. 그 스탠스가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그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곧 직관이다. 인상주의는 관객의 직관에 의존한다.
평론가는 객관으로 설명하지만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낸다.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내지만 관객은 직관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작가는 메시지를 숨겨두려 하지만 관객은 단지 자신의 체험과 일치하는 패턴을 인식할 뿐이다.
사실주의의 기반이 된 색채학의 발달을 비롯한 과학적 혁신이 객관이면, 그 과학의 혁신을 반영한 작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는 주관이고, 그 작가와 소통하는 관객의 감상은 패턴인식의 직관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줌은 아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승은 제자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이 작가의 작품을 직관함은 관객 자신의 체험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한 번도 밀밭에 가 보지 못한 사람은 고흐의 밀밭을 진정 이해할 수 없다. 그 찬란한 가슴저림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작가와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
철학은 인식하고 사상은 판단하고 이념은 행동한다. 과학은 객관으로 인식하고 예술은 주관으로 판단하고 민중은 직관으로 소통한다. 관객 자신의 미적 본성에서 조형적 질서를 찾아 작가와 바로 소통한다. 그것이 현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