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 대문에는 기고하지 않습니다)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을 뒤늦게 보았다. 흥미있는 소재이기는 하나 영화의 실패에 대한 예감 때문에 보지 않았던 영화 - 나는 불량관객이다.
역시 실패한 영화였다. 처음부터 망가졌으면 밉지나 않지.. 그럭저럭 잘 나가다가 막판에 반전이랍시고 왕창 삽질해서 더 아쉽다. 흥행실패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새로 장르를 개척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니 - 영화미학으로 실패한 점은 문제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난 영화들... 블레어 윗치, 퍼니게임, 지구를 지켜라, 미져리, 엑스페리먼트, 김기덕과 홍상수의 여러 영화들.. 그리고 한국식 ‘깨는 영화’의 원조인 주유소 습격사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영화들이다. 실험실의 생쥐를 실험하듯이 인간을 한정된 공간에 가둬놓고.. 온갖 방법으로 고문하고 실험한 다음.. 보고서 한 장을 달랑 제출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경악하게 된다. 감춰두고 싶었던 인간의 치부.. 그 적나라한 실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깨달음의 한 소식을 던져주는 것이 영화의 성공이다.
구타유발자들을 보고 관객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배워갔을까? 악은 반드시 징벌되어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교훈? 폭력의 악순환은 나쁘다는 바른생활의 훈화? 장가 못가서 비뚤어진 농촌청년 문제? 젠장 감독이 관객에게 이런 소리나 하려고 영화공부 하셨나?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는 깨달음의 한 소식이 없다. 홍상수에도 있고 김기덕에도 있는 것이 원신연에는 없다. 그러므로 실패다.
말 나온 김에.. 잠시 삼천포를 들러보기로 하면.. 감독의 단편 ‘빵과 우유’도 물건이라는데.. 상이란 상은 휩쓸었다는 문제의 영화.. 여전히 계몽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역겨운 것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망치질이라곤 생전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었다는 거.. 리얼리티가 확 사라졌도다.. 삽질 한번 안 해본, 육체를 사용하는 기술을 전혀 배우지 못한.. 근육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노동자 역할을 맡겨? 젠장 그러기 있냐. 그러면 안 된다. 이건 불성실하다.
다시 진주로 방향을 잡으면.. 구타유발자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빵과 우유’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리얼리티가 없다는 거다. 다른 이유로의 실패라면 몰라도 리얼리티의 실패라면.. 큰 문제다. 이건 초보적인 실수인 거다.
원신연은 아마 시골이라곤 생전 구경도 못해본 사람 같다. 그는 자연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 김기덕과 대비가 된다. 하필 겨울에 촬영을 해서..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모든 배우들이 1.5센티 정도 공중부양을 하고 있더라.
숲이 주는 으스스한 공포를 찍으려면 숲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겨야 한다. 카메라의 높이를 지상 50센티로 낮추어야 바스락거리는 가랑잎들의 함성소리-그 공포스런-를 들을 수 있다. 외떨어진 공간이 주는 공포를 찍으려면 그 외딴공간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겨야한다. 김기덕의 섬이 그렇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섬이 주인공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사물에 비추어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섬의 이야기를 사람에 ‘의물화’ 한 것 같다.
예컨대.. 낚시꾼들이 호수에 낚시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여인의 음부에 낚시바늘을 들이미는 행동과 같다. 음부에 낚시바늘을 넣는 장면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는 관객들 있었다. 그런 고매하신 분들이 왜 호수에 낚시대를 담그는 장면에서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그것이 김기덕의 항변이다.
자연은 본래 완전하다. 여인의 나신처럼 완전무결하다. 그 완전함이야 말로 인간이 숭상해야 할 성(聖)스러움이다. 그 완전함에 어떤 식으로든 생채기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짓이다. 낚시꾼이 낚싯대를 감히 물 속에 드리우는 그 잔인한 행위와.. 면도칼로 사람의 생살을 저며내는 소박한 행위가 무엇이 다르랴?
안개 속의 고삼지.. 고삼지는 그 자체로 완숙한 여인이다. 성스러움이 그 가운데 있다. 그 여신다운 성스러움에 함부로 다가서면? 부정탄다. 이미 부정을 탔으므로 반드시 탈이 난다. 김기덕은 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원신연은 흙을, 흙의 아우성이라 할 흙먼지의 노래를, 바람을, 바람소리를, 바위를, 거친 바위의 호흡을, 나무를, 부서지는 나뭇가지들의 웅성거림을, 을씨년스런 저녁공기의 음울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에게 도보여행을 권해보고 싶다. 자연 속으로 1센티만 더 다가서기 바란다. 얼굴에 흙을 부벼보고 흙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여 볼 일이다.
원신연의 영화에서 자연은 무대 뒤로 밀려난다. 삼류연극의 무대세트처럼.. 야박한 대접. 자연은 배제시키고 몰려든 인간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린다.
왜 한적한 시골이 공포스러울까? 주인공인 자연을 배제시킬 때 자연이 뿔따구를 내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자연이 주인공이고 시골사람이 주인공이다. 도시인은 도리어 경계해야 할 이방인이다. -자연의 성스러움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 거기서 긴장감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다. 자연의 품 안에서 자연스러운 시골사람에 대한 감독의 몰이해.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은 지구를 파괴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4인의 무리는 유유히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에서 모든 인물들이 실패했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 퍼니게임의 감독은 적어도 관객을 고문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식으로든 성공이 있어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이해 - 그 한 소식의 깨달음에 성공하든, 관객을 고문하는데 성공하든, 자연의 은밀한 아우성을 들려주는데 성공하든, 웃기는데 성공하든.. 뭔가 성공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이야기가 된다.
최악은 성악과 교수를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구역질 나는 위선자로 설정한 것이다. 하얀 옷을 입혀 하얀 벤츠를 태워버린 결과.. 주인공들은 자연 속으로 1센티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공중부양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 극도로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들이 주는 공포를 묘사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 남자와 여자들은 자연의 품 속으로 함부로 발을 들이밀어 놓고도 전혀 자연과 접촉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정말 꼴사나운 언밸런스다.
주인공들이 죄다 구역질나는 인물이다 보니.. 구타유발자가 아니라 구토유발자.. 주인공을 옥죄어오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공격이 너무나 사리에 맞는 당연한 일로 여겨져서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퍼니게임의 피해자 일가족은 아무 죄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을 공격한다면 온당치 않다. 그러므로 관객은 극의 설정에 분개하여 몰입한다. 그러나 이병준이 연기한 몰상식한 교수 영선은 초장부터 귀싸대기 한대 때려주고 싶은 저급한 인물로 나온다. 한대 얻어맞게 생긴 인간이 결국 한대 얻어터지는 장면은 너무나 당연해서 싱거울 뿐이다.
영화는 너무 많은 억지웃음을 유발하려 한다. 그것도 극의 긴장감을 끊어버리는 4컷만화의 싱거운 웃음이다. 굳이 그렇게 웃기려고 해야만 했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코미디를 만든 것인가? 엑스페리먼트의 성공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너무 많은 억지 코미디가 방해해서 망쳐버린 것이다.
관객동원을 위해서라면 웃음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주는 언밸런스를 통해 웃겨야지 억지 에피소드로 웃겨서 안 된다. 작위적인 설정으로 웃기려 들어서 안 된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교육정도가 다른 두 사람을 한 공간에 가둬놓으면 거기서 자연히 웃음이 유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반부터 주인공을 너무 망가뜨려 놓아서.. 도시와 시골의 그러한 차이가 부각되지 않는다. 이병준은 너무 비루한 인물로 설정되었다. 도시의 신사와 시골의 자유인이 만나야 웃음이 유발된다. 도시 양아치와 시골 양아치가 만나서는 양아치굿판에 관객의 비웃음을 낳을 뿐.
영화는 또 너무 많은 시사풍자를 삽입하고 있다. 영화의 시사풍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엉뚱한 들이대기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장난하나 싶다. 하여간 여러 가지로 김샜다.
퍼니게임, 미져리, 엑스페리먼트, 관객을 고문하는 김기덕과 홍상수의 영화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보고서이다. 인간을 극한상황까지 몰고가서 기어이 그 본질을 실토하게 하는 것... 적나라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영화. 에스컬레이터를 타듯이 점차 수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는..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극한상황에 가기도 전에 먼저 추악해져 버렸다.
영화 괴물이 초장부터 밝은 햇볕아래에서 괴물의 전체모습을 보여주어버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졌듯이.. 초반부터 ‘영선은 추악한 위선자’라고 다 알려주고 시작해서 흥미반감.. 미묘한 심리묘사로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것은 무성영화의 변사가 개입하여 그냥 자기 입으로 다 떠들어버린 것.
관객을 고문하는 영화들.. 왜 관객을 고문하는가? 이유가 있다. 선량한 주인공들을 불행에 빠뜨려 놓고 ‘이제는 주인공이 구출되겠지! 어디선가 흑기사가 나타나서 도와주겠지’ 하는 관객의 안이한 기대를 묵살하면서.. 관객들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한지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거침없이 말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의식 깊은 곳에는 그러한 추악한 본성이 숨어 있다. 네게도 있고 내게도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절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구타유발자는 결정적으로 삽질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한석규 그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한석규.. 이 쥐약먹고 죽을 놈의 못된 인간이.. 결국 쥐약먹고 죽었지만..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경찰나으리라는 양반이.. 저가 먼저 폭력을 시작했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는 거다.
찌질한 초등학생이 담임께 일러바치며..‘쟤가 먼저 때렸대요. 엉엉’ 이런 고자질 장면.. 원신연.. 권력의 폭력성을 관객에게 고자질이나 하겠다는건가? 관객이 그걸 모를까봐 친절히 알려주겠다고?
감독의 논리를 수긍할 수 없다. 누가 먼저 때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석규가 카리스마 넘치는 포즈로 ‘아무 일 없었던 거야’하고 상황을 정리한 장면에서 영화는 끝나야 했다. (그 장면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젠장.. 6월항쟁 때의 ‘무탄무석 무석무탄’ 논쟁을 연상시킨다. 경찰이 먼저 최루탄을 쐈기 때문에 대학생이 짱돌을 던진건가? 경찰이 최루탄을 안쏘면 학생들은 얌전하게 강의실로 돌아가서 수업을 받겠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라면 경찰이 최루탄을 안쏘면 쏠때까지 독재정권을 패주겠다. 왜?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니까.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란 말이다.
실패 1) 보편적 인간의 본성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때렸느냐, 누가 원인제공을 했느냐는 식의 특수한 상황논리를 들이댔다는 점.. 그 찌질하기 짝이 없는... 특수가 아니라 보편으로 가야 한다.
실패 2) 굳이 한석규를 죽이는 데서의 권선징악적 설정, 생뚱맞은 시사풍자, 작위적인 웃음유발이 너무 많았다. 여러 개의 사건을 얼기설기 짜깁기한듯.. 골빙이와 한석규의 스토리는 교수일행의 조난과 상관없이 갑자기 끼어든다.
실패 3) 도시와 시골의 충돌, 인간과 자연의 충돌, 자연인과 먹물의 충돌, 강자와 약자의 충돌에서 상황과 부대끼며 상황 자체가 유발하는 긴장의 힘으로 극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설정한 인간사회의 에피소드들을 나열했다는 점.
인간을 이해시키는 영화를 만들 일이다. 그 방법은 인간을 여러 상황에 두어보는 것이다. 그 상황은 극한적 상황일 수 있다. 미져리적 상황, 김기덕적 상황, 홍상수적 상황, 엑스페리먼트적 상황, 퍼니게임적 상황, 지구를 지켜라적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각각 훌륭한 한 편의 인간보고서가 나오는 것이다.
묻고 싶다. 당신은 정녕 인간을 이해하는가?
PS.. 원신연의 실패와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르의 영화는 다 볼만하다. 원신연의 영화는 실패지만- 관객은 감독의 설정 일부를 빌어 관객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장르의 영화는 더 시도되어야 한다.
지구를 지켜라-구타유발자들-김기덕과 홍상수의 영화들- 모두 약간의 부족함이 있다. 시도는 좋았는데 영화적으로 실패인 경우도 있고, 영화적으로도 성공이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도 있다. 그 모든 결핍을 완전히 채워내는 완벽한 영화가 이 장르에서 한 번 쯤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을 뒤늦게 보았다. 흥미있는 소재이기는 하나 영화의 실패에 대한 예감 때문에 보지 않았던 영화 - 나는 불량관객이다.
역시 실패한 영화였다. 처음부터 망가졌으면 밉지나 않지.. 그럭저럭 잘 나가다가 막판에 반전이랍시고 왕창 삽질해서 더 아쉽다. 흥행실패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새로 장르를 개척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니 - 영화미학으로 실패한 점은 문제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난 영화들... 블레어 윗치, 퍼니게임, 지구를 지켜라, 미져리, 엑스페리먼트, 김기덕과 홍상수의 여러 영화들.. 그리고 한국식 ‘깨는 영화’의 원조인 주유소 습격사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영화들이다. 실험실의 생쥐를 실험하듯이 인간을 한정된 공간에 가둬놓고.. 온갖 방법으로 고문하고 실험한 다음.. 보고서 한 장을 달랑 제출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경악하게 된다. 감춰두고 싶었던 인간의 치부.. 그 적나라한 실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깨달음의 한 소식을 던져주는 것이 영화의 성공이다.
구타유발자들을 보고 관객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배워갔을까? 악은 반드시 징벌되어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교훈? 폭력의 악순환은 나쁘다는 바른생활의 훈화? 장가 못가서 비뚤어진 농촌청년 문제? 젠장 감독이 관객에게 이런 소리나 하려고 영화공부 하셨나?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는 깨달음의 한 소식이 없다. 홍상수에도 있고 김기덕에도 있는 것이 원신연에는 없다. 그러므로 실패다.
말 나온 김에.. 잠시 삼천포를 들러보기로 하면.. 감독의 단편 ‘빵과 우유’도 물건이라는데.. 상이란 상은 휩쓸었다는 문제의 영화.. 여전히 계몽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역겨운 것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망치질이라곤 생전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었다는 거.. 리얼리티가 확 사라졌도다.. 삽질 한번 안 해본, 육체를 사용하는 기술을 전혀 배우지 못한.. 근육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노동자 역할을 맡겨? 젠장 그러기 있냐. 그러면 안 된다. 이건 불성실하다.
다시 진주로 방향을 잡으면.. 구타유발자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빵과 우유’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리얼리티가 없다는 거다. 다른 이유로의 실패라면 몰라도 리얼리티의 실패라면.. 큰 문제다. 이건 초보적인 실수인 거다.
원신연은 아마 시골이라곤 생전 구경도 못해본 사람 같다. 그는 자연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 김기덕과 대비가 된다. 하필 겨울에 촬영을 해서..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모든 배우들이 1.5센티 정도 공중부양을 하고 있더라.
숲이 주는 으스스한 공포를 찍으려면 숲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겨야 한다. 카메라의 높이를 지상 50센티로 낮추어야 바스락거리는 가랑잎들의 함성소리-그 공포스런-를 들을 수 있다. 외떨어진 공간이 주는 공포를 찍으려면 그 외딴공간에게 주인공 역할을 맡겨야한다. 김기덕의 섬이 그렇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섬이 주인공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사물에 비추어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섬의 이야기를 사람에 ‘의물화’ 한 것 같다.
예컨대.. 낚시꾼들이 호수에 낚시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여인의 음부에 낚시바늘을 들이미는 행동과 같다. 음부에 낚시바늘을 넣는 장면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는 관객들 있었다. 그런 고매하신 분들이 왜 호수에 낚시대를 담그는 장면에서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그것이 김기덕의 항변이다.
자연은 본래 완전하다. 여인의 나신처럼 완전무결하다. 그 완전함이야 말로 인간이 숭상해야 할 성(聖)스러움이다. 그 완전함에 어떤 식으로든 생채기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짓이다. 낚시꾼이 낚싯대를 감히 물 속에 드리우는 그 잔인한 행위와.. 면도칼로 사람의 생살을 저며내는 소박한 행위가 무엇이 다르랴?
안개 속의 고삼지.. 고삼지는 그 자체로 완숙한 여인이다. 성스러움이 그 가운데 있다. 그 여신다운 성스러움에 함부로 다가서면? 부정탄다. 이미 부정을 탔으므로 반드시 탈이 난다. 김기덕은 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원신연은 흙을, 흙의 아우성이라 할 흙먼지의 노래를, 바람을, 바람소리를, 바위를, 거친 바위의 호흡을, 나무를, 부서지는 나뭇가지들의 웅성거림을, 을씨년스런 저녁공기의 음울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에게 도보여행을 권해보고 싶다. 자연 속으로 1센티만 더 다가서기 바란다. 얼굴에 흙을 부벼보고 흙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여 볼 일이다.
원신연의 영화에서 자연은 무대 뒤로 밀려난다. 삼류연극의 무대세트처럼.. 야박한 대접. 자연은 배제시키고 몰려든 인간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린다.
왜 한적한 시골이 공포스러울까? 주인공인 자연을 배제시킬 때 자연이 뿔따구를 내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자연이 주인공이고 시골사람이 주인공이다. 도시인은 도리어 경계해야 할 이방인이다. -자연의 성스러움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 거기서 긴장감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다. 자연의 품 안에서 자연스러운 시골사람에 대한 감독의 몰이해.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은 지구를 파괴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4인의 무리는 유유히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에서 모든 인물들이 실패했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 퍼니게임의 감독은 적어도 관객을 고문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식으로든 성공이 있어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이해 - 그 한 소식의 깨달음에 성공하든, 관객을 고문하는데 성공하든, 자연의 은밀한 아우성을 들려주는데 성공하든, 웃기는데 성공하든.. 뭔가 성공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이야기가 된다.
최악은 성악과 교수를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구역질 나는 위선자로 설정한 것이다. 하얀 옷을 입혀 하얀 벤츠를 태워버린 결과.. 주인공들은 자연 속으로 1센티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공중부양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 극도로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들이 주는 공포를 묘사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 남자와 여자들은 자연의 품 속으로 함부로 발을 들이밀어 놓고도 전혀 자연과 접촉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정말 꼴사나운 언밸런스다.
주인공들이 죄다 구역질나는 인물이다 보니.. 구타유발자가 아니라 구토유발자.. 주인공을 옥죄어오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공격이 너무나 사리에 맞는 당연한 일로 여겨져서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퍼니게임의 피해자 일가족은 아무 죄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을 공격한다면 온당치 않다. 그러므로 관객은 극의 설정에 분개하여 몰입한다. 그러나 이병준이 연기한 몰상식한 교수 영선은 초장부터 귀싸대기 한대 때려주고 싶은 저급한 인물로 나온다. 한대 얻어맞게 생긴 인간이 결국 한대 얻어터지는 장면은 너무나 당연해서 싱거울 뿐이다.
영화는 너무 많은 억지웃음을 유발하려 한다. 그것도 극의 긴장감을 끊어버리는 4컷만화의 싱거운 웃음이다. 굳이 그렇게 웃기려고 해야만 했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코미디를 만든 것인가? 엑스페리먼트의 성공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너무 많은 억지 코미디가 방해해서 망쳐버린 것이다.
관객동원을 위해서라면 웃음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주는 언밸런스를 통해 웃겨야지 억지 에피소드로 웃겨서 안 된다. 작위적인 설정으로 웃기려 들어서 안 된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교육정도가 다른 두 사람을 한 공간에 가둬놓으면 거기서 자연히 웃음이 유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반부터 주인공을 너무 망가뜨려 놓아서.. 도시와 시골의 그러한 차이가 부각되지 않는다. 이병준은 너무 비루한 인물로 설정되었다. 도시의 신사와 시골의 자유인이 만나야 웃음이 유발된다. 도시 양아치와 시골 양아치가 만나서는 양아치굿판에 관객의 비웃음을 낳을 뿐.
영화는 또 너무 많은 시사풍자를 삽입하고 있다. 영화의 시사풍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엉뚱한 들이대기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장난하나 싶다. 하여간 여러 가지로 김샜다.
퍼니게임, 미져리, 엑스페리먼트, 관객을 고문하는 김기덕과 홍상수의 영화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보고서이다. 인간을 극한상황까지 몰고가서 기어이 그 본질을 실토하게 하는 것... 적나라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영화. 에스컬레이터를 타듯이 점차 수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는..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극한상황에 가기도 전에 먼저 추악해져 버렸다.
영화 괴물이 초장부터 밝은 햇볕아래에서 괴물의 전체모습을 보여주어버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졌듯이.. 초반부터 ‘영선은 추악한 위선자’라고 다 알려주고 시작해서 흥미반감.. 미묘한 심리묘사로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것은 무성영화의 변사가 개입하여 그냥 자기 입으로 다 떠들어버린 것.
관객을 고문하는 영화들.. 왜 관객을 고문하는가? 이유가 있다. 선량한 주인공들을 불행에 빠뜨려 놓고 ‘이제는 주인공이 구출되겠지! 어디선가 흑기사가 나타나서 도와주겠지’ 하는 관객의 안이한 기대를 묵살하면서.. 관객들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한지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거침없이 말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의식 깊은 곳에는 그러한 추악한 본성이 숨어 있다. 네게도 있고 내게도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절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구타유발자는 결정적으로 삽질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한석규 그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한석규.. 이 쥐약먹고 죽을 놈의 못된 인간이.. 결국 쥐약먹고 죽었지만..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경찰나으리라는 양반이.. 저가 먼저 폭력을 시작했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는 거다.
찌질한 초등학생이 담임께 일러바치며..‘쟤가 먼저 때렸대요. 엉엉’ 이런 고자질 장면.. 원신연.. 권력의 폭력성을 관객에게 고자질이나 하겠다는건가? 관객이 그걸 모를까봐 친절히 알려주겠다고?
감독의 논리를 수긍할 수 없다. 누가 먼저 때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석규가 카리스마 넘치는 포즈로 ‘아무 일 없었던 거야’하고 상황을 정리한 장면에서 영화는 끝나야 했다. (그 장면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젠장.. 6월항쟁 때의 ‘무탄무석 무석무탄’ 논쟁을 연상시킨다. 경찰이 먼저 최루탄을 쐈기 때문에 대학생이 짱돌을 던진건가? 경찰이 최루탄을 안쏘면 학생들은 얌전하게 강의실로 돌아가서 수업을 받겠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라면 경찰이 최루탄을 안쏘면 쏠때까지 독재정권을 패주겠다. 왜?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니까.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란 말이다.
실패 1) 보편적 인간의 본성을 폭로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때렸느냐, 누가 원인제공을 했느냐는 식의 특수한 상황논리를 들이댔다는 점.. 그 찌질하기 짝이 없는... 특수가 아니라 보편으로 가야 한다.
실패 2) 굳이 한석규를 죽이는 데서의 권선징악적 설정, 생뚱맞은 시사풍자, 작위적인 웃음유발이 너무 많았다. 여러 개의 사건을 얼기설기 짜깁기한듯.. 골빙이와 한석규의 스토리는 교수일행의 조난과 상관없이 갑자기 끼어든다.
실패 3) 도시와 시골의 충돌, 인간과 자연의 충돌, 자연인과 먹물의 충돌, 강자와 약자의 충돌에서 상황과 부대끼며 상황 자체가 유발하는 긴장의 힘으로 극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설정한 인간사회의 에피소드들을 나열했다는 점.
인간을 이해시키는 영화를 만들 일이다. 그 방법은 인간을 여러 상황에 두어보는 것이다. 그 상황은 극한적 상황일 수 있다. 미져리적 상황, 김기덕적 상황, 홍상수적 상황, 엑스페리먼트적 상황, 퍼니게임적 상황, 지구를 지켜라적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각각 훌륭한 한 편의 인간보고서가 나오는 것이다.
묻고 싶다. 당신은 정녕 인간을 이해하는가?
PS.. 원신연의 실패와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르의 영화는 다 볼만하다. 원신연의 영화는 실패지만- 관객은 감독의 설정 일부를 빌어 관객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장르의 영화는 더 시도되어야 한다.
지구를 지켜라-구타유발자들-김기덕과 홍상수의 영화들- 모두 약간의 부족함이 있다. 시도는 좋았는데 영화적으로 실패인 경우도 있고, 영화적으로도 성공이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도 있다. 그 모든 결핍을 완전히 채워내는 완벽한 영화가 이 장르에서 한 번 쯤 나와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