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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653 vote 0 2006.02.23 (17:50:41)


석봉의 글씨는 누가 봐도 명필이다. 아무도 석봉의 글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칠기 짝이 없는 추사의 글씨가 예쁘게 잘 쓴 석봉의 글씨 보다 더 높은 값을 받는 근거는?

독일차가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리 가구가 명품인 이유는? 일본차는 왜 잘 팔리고 있는 것일까? 왜 전위예술가들은 길거리에서 알듯모를듯한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공통점은 자기류의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이다. 요는 그 기준이 썩 잘 드러나 있는가이다.

석봉체는 필획 사이의 균형에서 얻어지는 긴장감이 글씨의 가치를 판정하는 룰이 된다. 그것은 석봉체의 룰이다. 추사는 다르다. 추사체는 종이와 먹의 대결, 그리고 붓과 종이의 대결을 반영하고 있다.

먹은 번지려 하고 붓은 나아가려 하고 종이는 붙잡으려 한다. 양자간에 혹은 삼자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조화도 있다. 거기서 긴장감이 얻어지는 것이다. 잠이 확 달아나게 하는 선선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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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것은 또 무엇인가? 무릇 글씨란 것은 사람이 읽고 쓰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다. 그 글자의 용도를 잊어버려야 한다. 추사의 글씨에는 먹과 종이의 대결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하고 있다는 말이다. 먹이 한지(韓紙)에 번지는 속도와 붓의 날래기가 정채있게 대결하고 있다. 먹이 빠른가 붓이 빠른가 해보자는 거다. 그러한 대결 자체에 충실하기다.

무엇인가? 미학의 요지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곧 비교할 수 있는가이다. 비교대상이 부각되어 있는가이다.

글씨에는 여러 가지 성질이 있다. 음도 있고 뜻도 있고 모양도 있다. 복잡하다. 이래서는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의견통일에 실패하게 된다. 잊어버리기다. 그 중 하나만을 특별히 부각해 보이기다.

하나의 글자 안에는 필획들의 대결이 있다. 좌우 상하로 전개하는 삐침과 점과 가로획과 세로획의 긴장된 구도가 있다. 그 논리에 충실한 것이 석봉체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에는 종이의 마음이 나타나 있지 않다. 먹의 마음도 나타나 있지 않다. 더욱 그 글씨를 쓰는 서예가의 마음도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부품의 정교함이 제시될 뿐 그 자동차가 도로 위를 질주할 때의 스피드와 굉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카레이서의 흥분감이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지 않는다.

독일차라면 소음이 없기로 유명한 일본차와 달리 일부러 약간의 엔진음을 남겨둔다고 한다. 그 소음조차도 온전한 한 대의 자동차를 구성하는 일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대의 성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운전자의 편의를 희생시켜야 한다. 추사체가 그러하다. 먹의 마음과 붓의 마음을 최대한 끌어내기 의해서는 글자의 가독성을 일정부분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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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관객들은 백자 달항아리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크게 비어 있다. 아기자기한 모양도 없고 화려한 그림도 없고 청자의 상감도 없다. 비어 있음으로 해서 단순화 된다. 그제 판단기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추사체는 가독성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자동차의 성능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 페라리가 최고의 속도를 끌어내기 위해서 운전자의 편의를 희생시켜 가며 딱딱하고 불편한 운전환경을 제공하듯이 말이다.

백자 달 항아리는 천하에 쓸모 없는 그릇이 되었다. 그 항아리는 꽃을 꽂아두기에도 적당하지 않고 된장을 담아두기에도 역시 적당하지 않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도리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달 항아리를 박물관에 전시하여 둔다면 어떨까? 어느 구석도 적당하지 않다. 그 항아리는 용도가 없기 때문에, 쓰임새가 없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킬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 박물관의 한 가운데 자리 곧 정 중앙의 위치에 전시해야 한다. 그만치 고집이 세다.  

하나의 작품에는 많은 구성소들이 있지만 위대한 걸작은 다른 많은 요소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단 하나의 기준을 최대한 끌어내고, 그 가치의 극한에 도달해 보임으로써 비교판단이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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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이 복잡한 도시 가운데서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남쪽과 북쪽의 극단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서 있는 위치가 산의 기슭인지 중턱인지를 판단하려면 그 산의 정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명품은 하나의 물건이 가지는 여러 성질들 중에서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마침내 극점에 도달하며 그 극점이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때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자기류의 기준이 드러나 있는가가 중요하다. 왜? 관객과의 쌍방향 의사소통을 위해서.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하여. 역사의 변곡점에 서서 군중이 방향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능한 목수가 한 채의 장롱을 짠다고 치자. 그 가구의 용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목적도 용도도 기능도 잊고 오로지 그 가구의 몸체인 오동나무의 논리에 충실하기다.

앞이 오동나무이면 뒤도 옆도 오동나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통일성의 논리, 전일성의 논리가 장인정신이다. 왜 통일되어야 하는가? 통일되어야만 비교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공통적으로 선명한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 극점에 도달하여 보이는 방법으로 랜드마크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또 전위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판단기준을 창안해내고 있다.

독일차라면 자동차는 기계적인 성능이 뛰어나야 하고 운전하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차라면 자동차는 안락해야 하고 승객의 편의에 맞게 인체공학적으로 최적화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차는 조금 더 운전자의 기준을 들이대고 있고 일본차는 상대적으로 동승한 승객의 입장을 기준으로 들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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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석가탑이 균형미의 극점을 찍고 왔다면, 고려의 상감청자는 세련미의 극점을 찍고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백자 달 항아리는 소박함의 극점을 찍고 왔다. 이는 곧 그 시대의 가치를 나타낸다. 시대정신이다.

이렇듯 새로운 룰을 제시하고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즉 가치의 비교판단이 가능한 작품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품이 아닌 것은? 용도와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실용적인 것이다. 라면은 먹는데 쓰고 옷은 추위를 막는데 쓴다. 이렇듯 용도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왜 명품이 필요한가? 그 사람의 진가를 한 눈에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단기준을 제시해야 하며 그 기준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명품은 적어도 그 기준을 제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왜 한국은 강한가?

왜 변방에서 온 후발주자가 강한가?
변방에서 온 자가 그 가치판단의 기준, 곧 변혁의 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온 자가 그 가치의 극한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시대정신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부에 위치한 자는 이것저것 다 챙겨야 한다. 용도와 기능과 목적과 형태를 두루 포섭해야 한다. 이래서는 의견통일이 되지 않는다.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기 위한 비교 자체가 불성립이다.

이런 식이라면 군중은 그만 방향을 잃고 흩어지고 만다. 의사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행동통일이 되지 않아 우왕좌왕 하게 된다. 지도자의 리더십이 먹히지 않는다. 변혁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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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중국이라 치자. 상해의 기준과 북경의 기준이 다르다. 중국의 자본가가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는데 중국이 아닌 한국의 기준, 서울의 기준을 들이대면 북경에서도 팔리고 상해에서도 팔리고 중경에서도 팔린다.

그러나 상해의 기준을 들이대면 북경에서 팔리지 않고 북경의 기준을 들이대면 상해에서 팔리지 않는다. 그들은 변방에서 온 한국의 기준을 들이대는 방법이야 말로 중국시장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그것이 한류가 성공하는 진짜 이유다. 변방에서 온 것이야말로 차별화가 가능하고 새로운 기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왜 이 제품이 다른 제품보다 나은지를 더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 시대의 흐름에 맞는 하나의 룰을 찾아낸 자가 변혁의 주체가 된다.
● 여러 가치들 중 하나를 부각하되 그 가치의 극한에 도달해 보여야 한다.
● 그 가치의 극한에서 시대정신의 랜드마크가 찾아진다.
● 변방에서 온 세력이 그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이심전심에 의한 행동통일을 가능케 하여 변혁의 주체가 된다.

변방은 끝이다. 끝까지 가본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의 전체과정을 한 눈에 꿰고 있어야 한다.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각자의 전문영역에 갇혀 담장을 쌓고 안주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변방에서 온 세력이 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경험한 베테랑들이 있다. 정상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정상의 극점을 찍고 온 세력이 있다. 그들이 시대정신의  랜드마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천하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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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운동장에 1천명의 사람이 흩어져 있다. 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리더가 그 군중들 중에 한 사람을 기준으로 정하고 ‘모여’를 외치게 한다면 어떨까?

지목당한 사람이 오른팔을 높이 들고 ‘기준’을 외치지만 군중들 가운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군중들이 모여든다 해도 트래픽이 증가되어 마찰이 일어난다. 앞으로 가는 사람과 뒤로 오는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된다.

그러므로 현명한 리더라면 그 무리들 중에 가장 왼쪽이나 오른쪽에 선 사람을 지목하여 기준으로 세우고 모여를 외치게 한다. 그래야지만 전체 군중이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여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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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서 만난다면 어떨까? 서로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체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 본 자 만이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상에서 본 풍경이다. 정상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 사이에는 통하는 것이 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거기서 변혁의 핵이 만들어진다.

어느 분야이든 자기 분야에서 끝까지 가 본 사람이 모여 있는 곳, 나는 서프라이즈가 그곳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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