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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 다운됐냐? 또 돌아왔다. ㅋㅋㅋ』 |
두렵지 않던 적은 없었다.
양단의 갈림길에 서성일 때마다
남들이 가지 않는 무성한 풀섶 길을
밤사이
먼저 와 매만져준 것은 너였다.
슬픈 통념이 권위의 날을 들이밀 때
맨몸으로 막으며 울어준 것은 너였다.
무수한 물음표 사이에서
기꺼이 쉼표가 되고
모두 다른 목소리지만 한
길을 열어준..
너는
비로소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으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너의 꿈을 지킬 힘이 되려 한다.
내 유일하고도 미약한 재능이
희망으로 불릴 수 있게 한 너에게
38개월의
노력을 바친다.
이천삼년십일월이십일
일곱번째 소리를 완성하며...
태지
- 다른 데 쓴 글을 정리했습니다. -
최근 음반시장의 침체가 서태지 책임은 아니겠지요. 서태지가 돌아온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구요. 영화계의 발전과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음악에 문회한인 저의 입장에서 서태지의 음악세계에 대한 평가 보다는 사회전반에 미치는 후방효과에 주목하면서 변화의 트렌드를 읽는데 주력해야겠지요.
권위주의에서 탈권위주의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더 많은 작은 권위들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서태지의 권위가 조중동의 권위를 깨고, 정치권력의 권위를 깨고, 관공서의 권위, 학교장의 권위, 완장의 권위를 깨부셔야겠지요.
서태지의 권위 또한 깨부셔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의가 있습니다만 그 문제는 음악인들의 몫입니다. 음악인들이 음악 그 자체의 권위로 가요계 내부에서 서태지의 권위를 깨뜨림은 가하나 음악세계 바깥에서 “젊은 놈이 존나 싸가지 없네”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죠.
문희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빠부대를 비난할 일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음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플러스 알파(?)를 소비하고 있거든요. 물론 문희준이 그 ‘다른 것’을 판매하면서 음악을 생산하는 척 위장함은 비판되어야 하지만.
일체의 권위는 깨부셔져야 합니다. 허나 그 방법은 더 많은, 작은 권위들을 생산하는 형태여야 합니다. 즉 언론 그 자체의 신성한 권위로 조중동을 깨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서프라이즈의 권위와 인터넷의 권위가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한다면서 신성한 언론 그 자체의 권위조차 부정한다거나 혹은 기성권력에 도전하는 서프라이즈의 권위, 인터넷의 권위도 부정한다면 이건 아닙니다. 요즘 ‘탈근대 푼수’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더군요.
탈근대 운운하는 푼수들은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한 ‘저항으로서의 권위 만들기’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나 소나 다 파쇼’라 이거죠. 조중동이 파쇼라면 안티조선도 파쇼다 이런 식입니다. 서태지가 권력을 비난하면 ‘서태지 너도 파쇼야’ 하고 대꾸하는 자들 있습니다. 이런건 인정 안합니다.
‘권위’는 원래 자연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다수의 행통통일을 위한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한 ‘의사결집 체계’로서 ‘권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권위가 공동체의 목적과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그 합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진짜라면 그 권위 안에 흐름이 있고 유동성이 있고 세대교체가 있습니다.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것입니다. 권위는 원래 고체가 아니라 액체에요. 권위가 권력을 형성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어벽을 치기 시작하면 권위가 왜곡되어 고체화 되고 화석화 됩니다. 그 사생아가 조중동이지요.
우리가 일체의 권위에 도전하고, 일체의 권력을 해체함은 그 화석화된, 그 고체화된, 그 피가 돌지 않고 흐름이 멈추어진, 맥이 꺼져버린 죽은 권위, 가짜 권위를 본래의 신성한 권위, 살아있는 권위, 맥이 뛰고 피가 돌고 호흡이 있는 진짜 권위로 바꾸겠다는 의미입니다.
서태지도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계 내부에서, 음악인에 의해서, 신성한 음악 그 자체의 권위로서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 음악의 영역 바깥에서 부당하게 개입하여 “젊은 놈이 싸가지 없게” 이건 아니지요.
권위란 무엇인가?
이 나라 40, 50대 곧 박정희세대가 처음 사회에 진출했을
때를 돌이켜 봅시다. 예컨대 30년전 어떤 공학도가 첫 직장을 얻어 어느 건설현장으로
출근하여 막노동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면 어떻습니까?
작업을 지시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 간에 심각한 학력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권위주의가 아니면 안되지요. 20대 공학도가 외국어가 절반이 넘는 전문용어로 초졸학력의 50대 노동자와 대화가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수평적인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겠습니까?
권위주의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학력격차로 인한 의사소통의 단절 때문입니다. 학력 뿐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도 상당하지요. 미국이라면 인종문제가 권위주의의 장벽을 쌓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고 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실제로 산업현장에 가보면 일을 시키는 공대 출신 기사나 일을 하는 노동자나 학력이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문화, 환경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전반적으로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습니다.
이렇듯 탈권위주의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의사소통의 장벽’이라는 분명한 실체가 있는 거에요. 이를 물리적으로 해체하지 않고, 이념의 구호로만 탈권위를 외쳐봤자 또다른 권위주의를 만들어내고 마는 것입니다. 탈근대 운운은 한마디로 ‘먹물의 권위’로 억눌러서 ‘민중의 자발적인 권위의 창출’을 방해하겠다는 거지요.
그 저변에는 민중과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절망감, 민중을 통제할 수 없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민중은 ‘이해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이므로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서프라이즈 같은 이상한(?) 것이 나타나서 무슨 일을 벌이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지요. 임지현 등 일부 먹물들의 헛소리는 그 공포심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우입니다. 우리가 본 것이 전부입니다. 서태지는 그 이상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상한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목격한 것만으로도 서태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거에요.
서태지현상이 무엇입니까? 수평적 의사소통에 의한 자발적 의사결집이 가능한 시대의 상징입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평적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권위를 만들어가는 거에요. 다수가 행동통일의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위한 ‘의사결집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이겁니다.
학력에서, 졸업장에서, 완장에서, 권위가 나오고,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서 공동체의 행동통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권위를 만들고 이 권위가 낡은 완장의 권위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완장이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공유’ 곧 ‘코드’가 의사를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권위’는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입니다. 완장들에 의해 화석화 되었을 따름입니다. 탈권위는 죽은 권위를 되살려 내는 작업입니다. 더 많은 작은 영웅들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 작은 영웅들이 내부에서 권력화를 시도한다면 비판되어야 하겠지만, 그 권위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은 그 권위 그 자체의 신성성 하나 뿐입니다.
권위 그 자체의 본질적인 ‘신성성’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음악만이 음악가를 비판할 수 있고, 영화만이 영화감독을 비판할 수 있고, 문학만이 소설가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음악가가 혹은 영화감독이 혹은 소설가가 그 음악의 영역 바깥에서, 혹은 그 영화의 영역을 넘어서 까지, 혹은 그 문학세계 바깥에서도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마땅히 제지되어야 합니다.
도둑은 경찰이 잡습니다. 난폭한 폭력은 절제된 위력으로 제압합니다. 화석화된 권위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다면 신성한 권위가 제압합니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합니다. 권위 그 자체는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데나 ‘파쇼’ 딱지를 붙이는 탈근대 푼수들은 기성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결과를 두고 논하자 이겁니다. 실질적으로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조중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가 곧 ‘적’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죠. 지식인이라면 결과를 예상하고 움직여야 하며 최종적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권위는 깨부셔져야 하지만, 권위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굳은 것을 무르게 하고, 고체화된 것을 액체화된 것으로, 무기체적인 것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막힌 것은 뚫고 닫힌 것은 열고 무너진 것은 일으켜 세우므로서, 그 내부에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능한 형태로 바꾸기입니다.
권위는 부드러워질 뿐 본질에서 소멸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