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인가, 시민인가? 단지 폭력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력을 과시하는 것도 때로는 방법이 된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지리적으로 고립된 경우라면 어쩔 수 없다. 5월의 광주시민도 마찬가지다.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니 미국도 어쩌지 못하듯이 힘을 보여주는 것도 해결책이 된다. 문제는 지도자가 있느냐다. 누가 옳으냐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 누가 먼저 원인제공을 했느냐를 따지면 초딩이다. 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곧 통제가능성을 따지는게 구조론이다. 소요를 일으키는 쪽은 관망하는 제 3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있다. 권력측의 무능을 폭로하는 것도 전략이 된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제 3자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계속 소란이 이어지면 제 3자가 넌더리를 내고 도와주지 않는다. 신뢰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도자가 있다면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장기전을 선택했다면 비폭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가장 나쁜 것은 적대적 의존관계다. 소요를 일으키면 일부 흑인은 이득을 본다. 기다렸다는 듯이 약탈을 해서 수익을 올린다. 가게도 이득을 본다. 창고에 쌓여있는 재고까지 계산해서 보상을 받아낸다. 물론 한인상점은 탈세를 목적으로 매출을 누락했다가 손해를 본다. 세무서를 속이다가 보험사에 당하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집단 양쪽에 이러한 교착상태로 이득 보는 집단이 있다면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백인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 흑인도 이렇게 해도 된다는 논리는 비겁한 것이다. 강자의 철학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내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상대의 대응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심판 위치에 서 있는 제 3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 흑인사회 내부에서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흑인 지도자가 흑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야 문제가 해결된다. 무엇이 정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판은 피아간에 일어나는데 그 피아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아랍사회의 일부다. 사우디는 뭣하지? 아랍의 분열이 더 큰 문제다. 이스라엘 뒤에는 미국이 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문제로 좁혀서 보는 한 정의가 심판할 수 없게 된다. 구조가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사우디의 왕실이 친미를 선택하는 순간 팔레스타인의 재난은 결정된 것이다. 아랍이 아랍을 버렸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흑인경찰만 흑인을 체포할 수 있다든가 하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흑인이 같은 흑인을 공격하면 흑인사회 내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은 흑인 일부와 백인 일부 사이에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사실이다. 흑인 범죄자는 흑인사회 안에서 평판공격에 의해 처벌되어야 한다. 그런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중간관리자가 있어야 한다. 흑인사회 안에 갱단을 감시하는 별도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 미국 사회는 교묘한 방법으로 흑인들만 덤탱이를 쓰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있다. 의료보험이 그렇다. 공공의료를 거부하는 이유는 흑인에게 혜택이 가는게 눈꼴이 시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가난한 백인까지 희생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지금과 같은 인종갈등이 유지되는 것이 백인들이 은밀히 우월감을 느끼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원래 외부에 적이 없으면 내부에서 적을 만들어낸다. 피부색이 피아를 구분하는데 손쉬운 표지가 된다. 외부의 적인 소련이 몰락하자 내부의 흑인이 수난을 당한다. 외부지향이냐 내부지향이냐. 동물원의 동물이 괴로운 이유는 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이 없어서다. 적이 없으면 자기 신체를 물어뜯는다. 자기 안에서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동물이 행복하려면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을 합사해서 긴장을 조성해야 한다. 특히 붉은코아티처럼 성가시게 구는 동물이 좋다. 문제를 제공하고 문제 해결과정을 통해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
"동물원의 동물이 괴로운 이유는 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이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