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왜 공자인가? 바다가 넓어야 고래가 산다. 공자를 이해하려면 사유의 스케일을 키워야 한다. 사실이지 대한민국이라는 비좁은 울타리 안에는 공자가 필요없다. 다만 세계시장을 바라본다면 공자가 필요하다. 21세기 인류문명을 다시 설계하겠다는 커다란 야심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공자가 필요하다. 개인의 정신수양을 기대한다면 공자는 필요없다. 소승적인 태도라면 곤란하다. 대승적인 태도로 보아도 공자는 거추장스럽다. 더 높은 돈오의 경지로 올라서야 한다. 그대 안의 공자를 죽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강물을 떠나 인류문명이라는 큰 바다에 이르러 다시 공자를 찾아야 한다. 일은 ‘복제≫조합≫연출’된다. 복제하려는 자에게는 공자가 필요하다. 조합하려는 자에게는 노자가 필요하다. 연출하려는 자에게는 스티브 잡스가 필요하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공자가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스승이 아니다. 노자에게는 제자가 없다. 석가도 스승이 아니다. 태국불교에는 여승이 없다. 스승이 제자를 거두는 시스템인데 비구니의 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스승과 다르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나 예수의 제자들도 다르다. 그들은 진짜 스승이 아니다. 복제 포지션에 서 있어야 진짜다. 전수하려고 하면 가짜다. 앞의 글에서 말했지만 당신이라면 부족민의 돌도끼와 문명인의 쇠도끼 중에서 어느 것을 쓰겠는가? 지구인의 90퍼센트는 과학이라는 쇠도끼와 종교라는 돌도끼 중에서 돌도끼를 선택한다. 돌도끼가 제 손에 맞기 때문이다. 제 손을 내세우면 곤란하다. 그게 불필요한 자기소개다. 스승은 지식을 전수하는 자가 아니다. 돌도끼를 던져버리고 함께 가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배우려고 하는 것은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은 도서관에 잔뜩 있다. 진짜는 큰 일을 벌이는 것이다. 큰 바람이 불고 큰 난리가 나야 인간은 큰 일을 벌인다. 20세기만 해도 유명한 지성인이 많았다. 왜? 2차대전 때문이다. 지성인의 말을 듣지 않고 까불다가 인류는 재앙을 겪었다. 그제서야 아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은 사실을 후회하게 되었다. 지금은 지성인이 없다. 전쟁이 없으니 배가 불렀다. 교만해진 것이다. 큰 일을 벌이지 않는다. 돌도끼를 쇠도끼로 바꾸는게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큰 일이다. 하나를 바꾸면 전체를 다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승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전수하는 사람이 아니다. 큰 일을 먼저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낱낱이 조사할 필요는 없다. 공자의 제자 재여는 3년상을 반대하고 1년상을 주장하다가 공자에게 까였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1년상도 길다. 1년상을 주장한 재여를 보수꼴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여는 유물론자에 급진주의자라 할 수도 있다. 학문적으로는 공자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사람이다. 한편으로 공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재여만이 공자가 벌인 일을 이해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봐야 한다. 묵가도 유가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간결한 상례를 도입했지만 묵가 역시 유가에서 갈라져나온 학파다. 재여와 묵가와 법가는 공자와 다르나 발전된 형태다. 3년상이 옳으냐 1년상이 옳으냐를 따진다면 바보다.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거다. 1년상으로 줄였으면 1년도 길다고 해서 6개월로 줄였을 것이고 점차 줄어서 유가도 묵가처럼 흔적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공자가 은나라 출신이기에 은나라의 3년상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공자를 반여성주의자로 매도하는 것도 어리석다. 공자의 여성에 대한 발언은 거의 없는데 ‘여자와 소인배는 다루기 어렵다.’는 한 구절이 알려져 있다. 단지 이것만 기록된 것이다. 왜 이것만 기록되었을까? 원래 부족민은 남자와 여자가 다른 부족에 속한다. 역시 그런 시대였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는 여자만 쓰는 여자어가 있을 정도이다. 여자끼리 의자매를 맺고 평생 연락하며 지내는 관습도 있다. 옛날에는 여자공간, 남자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많은 부족민은 여자만 집을 가진다. 남자들은 마을회관 비슷한 건물에 모여있을 뿐 집이라는 것이 원래 없다. 나무 밑에서 비를 맞으며 잠들기도 한다. 부족민의 집이 작은 이유는 여자가 집을 짓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녀가 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문명의 진보다. 소년은 원래 여자를 미워한다. 여자를 사랑하는 본능과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한 열패감 때문이다. 여자 앞에서 당황하는 자신이 창피하고 싫은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2천5백년 전 인물인 공자에게 그런 것을 따진다면 이상한 거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진짜 공자는 노자와 장자 텍스트에 반영된 안티유가까지 포함된 거대한 공자다. 도덕경의 반 유가적인 내용은 후대의 첨가다. 근래에 발견된 마왕퇴의 원본에는 유가를 까는 내용이 없었다. 진짜로 배워야 할 것은 천하중심적 사유다. 중국인은 스스로 중국이라고 여겼다. 스스로 중앙이라고 생각해야 진짜가 나와준다. 로마 역시 지중해 바다의 중앙에 있다. 미국인이 꼴통인 이유는 자기들이 변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텍사스는 확실히 의사결정의 변방이다. 일본인이 삐딱선을 타는 이유도 변방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앙에 있다. 과거에는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시대에는 영국이 중앙이었다. 지금 프랑스와 영국은 변방이다. 한국은 변방이지만 관점을 달리 하면 의사결정의 중심이다.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이 만나는 경계에 있다. 서구문명과 아시아문명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중러미일 사이에서 바퀴의 축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중앙이라고 믿고 큰 일을 벌여야 한다. 돌도끼를 쇠도끼로 바꾸는 일은 큰 일이다. 의사결정은 원래 큰 일이다. 큰 일로 보면 도교의 반유가적 내용까지, 묵가의 발전된 내용까지, 법가의 변형된 내용까지 모두 유가의 큰 강의 지류가 된다. 의견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일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