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신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참 좋겠다. 과연 신은 좋은 직업일까?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다는데 그다지 행복한 표정은 아니더라. 전지전능한 사람은 작가다. 주인공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맘대로다. 그러나 모든 작가들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 누구든 작심하면 신이 된다. 펜을 쥐기만 해도 신이 되고, 자판을 두들겨 패기만 해도 신이 된다. 그러나 제대로 신이 되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맘대로는 맘대로인데 맘대로 일을 저지르기 쉬워도 수습하기 쉽지 않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깨달을 수 있는데 제대로 깨닫기 어렵다. 아는 것은 물질이고 깨닫는 것은 일이다. 지식은 쉽다. 머리 속에 주워담기만 하면 된다. 깨달음은 어렵다. 얽힌 실타래를 살살 풀어야 한다. 일은 서로 연동되어 돌아가기 때문이다. 일은 불과 같다. 불을 방치하면 활활 타올라서 단번에 연료가 고갈되고 단속하면 풀이 죽어서 꺼져버린다. 지식과 깨달음은 방향이 반대다. 지식이 플러스면 깨달음은 마이너스다.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 깨달음은 만남이다. 만남은 균형이 중요하다. 촛불의 심지가 가늘면 촛농에 묻혀서 불이 꺼진다. 심지가 굵으면 촛농이 흘러내려서 망한다. 양초와 심지 사이에서 완벽한 비례의 지점은 단 하나다.
절에서 쓰는 굵은 양초는 모두 균형이 안 맞아서 불꽃이 파묻힌다. 한국의 누구도 그 균형의 지점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양초의 굵기는 세계적으로 같다. 균형만 맞으면 그때부터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 당신이 작가라면 선하고 악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밀당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신은 머리가 좋다. 머리좋은 사람은 합리적인 방법을 쓴다. 합리적인 방법은 되도록 반복되는 노가다를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다른 사람을 시킨다. 직접 삽질하기보다 삽을 주고 명령을 내린다. 신은 합리적이므로 참새와 메뚜기와 시궁쥐를 하나씩 창조하는 미련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유전자를 던져놓으면 지네들이 알아서 진화한다. 불을 붙여놓으면 양초가 알아서 탄다. 작가는 캐릭터를 쓴다. 선역과 악역의 대칭적인 캐릭터를 던져놓으면 지네들끼리 상호작용하여 소설을 끌고 간다. 신은 일하지 않는다. 일은 누가 하는가? 일이 일한다. 깨달음은 일을 일시키기다. 일 시켜먹기 쉽지 않다. 균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신이 되는 것이다. 전지전능해지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펜을 쥐기만 하면 주인공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 다만 균형을 맞추어 밀당이 계속 이어지게 해야 한다. 캐릭터가 지들끼리 상호작용으로 끌고 가게 해야 한다.
요즘 같은 망조경제시대에는 신도 사표내고 도망갈 판입니다. 우리가 신의 고뇌를 이해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한게 반드시 좋은 소식인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은 신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도 양초와 심지의 관계입니다. 진보를 서두르면 촛농이 흘러내리고 보수가 완강하면 꺼져버립니다. 딱 중간은 원래 없고 밀당을 해줘야 합니다. 단 밀당의 주도권은 언제나 진보에 있고 보수에는 없습니다. 보수는 필요한 악역이지만 수시로 밟아줘야 합니다. 보수와 일베는 밟히는게 일이니까요. 보수를 디딤돌 삼아 사뿐히 즈려밟고 더 높은 세계로 올라서야 합니다. |
악역이지만 수시로 밟아줘야 한다. -동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