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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500 vote 0 2018.05.28 (17:10:36)

      
    구조론의 기원


    구조론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쉽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쪽을 보고 있으므로 어려운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백번 쯤 반복하여 말해줘도 악착같이 손가락만 바라보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말로 해봤자 안 된다. 막대기로 때려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줘야 한다.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눈의 문제다. 눈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먼 산을 파고 있다. 물리적으로 타격해서 바로잡을 밖에. 조론은 필자가 아홉살 때 처음 착상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아홉살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거다. 


    17살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는 얼개를 만들었다. 24살 때 존재론과 인식론의 형태를 완성했다. 구조론은 존재론이다. 연역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으로 접근하므로 어렵다. 귀납하므로 어려운 것이다. 결과에서 원인을 보느냐 원인에서 결과를 보느냐다. 애초에 방향이 틀리므로 설명해서 이해하면 더 문제다. 


    잘못된 이해는 무지보다 고약하다. 설명하지 않겠으니 이해하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느껴라. 왜? 내가 느꼈으니까. 나는 누구한테 구조론을 배운게 아니다. 누구에게 설명을 들은 적이 없으니 설명할 수도 없다. 혹시나 알아들을까 싶어 억지로 설명하면서도 반대로 잘못 알아듣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구조론은 너무 단순해서 따로 설명할게 없는데 자꾸 설명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나마나 인식론의 귀납으로 접근하고 있는 거다. 설명해서 알아들었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은 오해했다는 말이 된다. 존재론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가고, 인식론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따라간다. 사과와 배와 복숭아와 감은 과일이다. 


    아니다. 자연에 과일이 있을 리 없다. 과일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자의로 지어낸 것이다. 사과 배나 감이 인간의 입맞에 맞춰주려고 당도를 높이고 신맛과 떫은 맛을 보탠 것은 아니다. 거짓 관념에 속지 말자. 사과든 배든 복숭아든 인간과 상관없이 자연의 질서를 따라온 것이다. 그 질서는 자연 그 자체에 내재하는 원리다. 


    그것이 존재론이다. 구조론을 배우려면 존재론을 따라야 한다.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식론으로 넘어간 반역자다. 배신자라 하겠다. 구조론의 길을 저버린 배신자들에게 선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악의를 품고 오해하려고 기를 써야 가능한 실수를 면전에서 태연하게 저질러댄다면 묵과할 수 없다. 

    

    정 이해가 안 된다면 필자가 한살때부터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온 경로를 되밟아보기 바란다. 필자가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은 한살 때 일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잊어버렸지만 나는 한살때부터 지식의 축적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더랬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생각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한살 때 일어났다. 그때 나와 남의 구분선이 존재함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50년 동안 나의 모든 사유를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인간의 사유는 근본 나와 남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타자성의 이해다. 그것이 출발점의 출발점이다. 이게 없으면 사유 자체가 불가능한 거다.


    내가 한 살때 모든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타자성인데 사람들과 대화해보니 타자성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더라. 대화가 돼? 소실점과 비슷하다. 소실점은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런데 동양사 5천년 동안 그 수 많은 아시아인들 중에 소실점을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보면 보이는데 왜 못보지?


    눈을 감고 다니나?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것이다. 기본의 기본이 있고 출발점의 출발점이 있고 시작의 시작이 있다. 그게 안 된다는 사람과의 대화는 불능이다. 필자와 같은 음치에게 화음을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단조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사람을 이해 못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느낌이 안 와준다.


    나는 한살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다수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때는 한살때와 두살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재미로 혼자 놀았다. 일곱살 때 마지막으로 쓰러지기까지 햇볕에만 나가면 속이 거북하고 쓰러지는 병이 있어서 나무 그늘에서 혼자 생각하며 놀았다. 생각이 조금씩 발전해가는 과정을 죄다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만만하게 보았다. 세상을 통째로 한 방에 보낼 큰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홉살 때 유레카를 불렀다. 선생님이 도서관의 낡은 국어사전을 나눠주고 사전찾기를 숙제로 내준 거였다. 여러번 했던 이야기다. 제일 궁금한 단어가 보지였는데 찾아보니 씹이라고 써놨다.

 

    씹을 찾아보니 보지라고 써놨다. 자지는 좆이었고 좆은 자지였다. 젖은 유방이었고 유방은 젖이었다. 돌려막기잖아. 이건 아니지. 국어사전을 이따위로 기술한다는게 말이나 돼? 드디어 인류문명의 어떤 약점을 봐버린 거였다. 막연하게 인류는 모르지만 나는 알지 하고 있었는데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운명은 정해졌다.


    그 이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었는데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체계다. 인류문명은 체계가 없다. 뒤죽박죽이다. 예컨대 지구인이 외계행성을 탐사하다가 외계인이 사는 별을 찾았는데 그 별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애초에 없었다. 어? 얘네들 수학도 모르다니 띨하잖아. 그렇다면 밥이지.


    이런 느낌이다. 인류의 허술한 구석을 봐버린 것이다. 어른이 되면 국어사전을 쓰는 체계를 발표해야지 하고 그때부터 지혜를 하나씩 모았다. 이건 단순히 국어사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의 체계에 관한 것이다. 구조론은 일곱살 쯤에 어렷품하게 품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단서를 아홉살 때 얻은 것이다. 


    구조론을 발전시킬 요량으로 모아둔 많은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다 까먹어 버리고 지금은 몇 개만 기억하고 있다. 라고한다의 법칙도 그 중의 하나다. 선생님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둥 하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면 라고한다를 뒤에 붙여보는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어 말되네?


    이는 관점의 발견이다. 사건 속에 당사자로 뛰어들지 말고 사건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객관화 시켜 관찰해야 한다. 사실과 사건의 차이다. 링 위에 오른 선수가 되면 안 된다. 주관이 아닌 객관이어야 한다. 자기소개형 말투는 안 된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논리를 전개하면 안 된다. 보통 말한다.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있기는 개뿔 뭐가 있다는 거지?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되어야 하는데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하는건 전제를 생략하는 무리수다. 함부로 주고받기 언어 속으로 뛰어들면 안 된다. 역시 내가 알아낸 규칙 중에 하나다. 숨은 전제 찾기다. 대화의 편의를 위해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넘어가는 거 말이다.


    그걸 깨고 들추고 폭로해야 한다. 그래야 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한 번은 방학공부라고 방학 때 나눠주는 책이 있는데 숙제가 가득이었다. 아마 거기서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학이 강물에 한쪽 다리로 서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할 목적 때문이라는 거였다. 위하여다. 위하여면 일단 비과학이다.


    과학은 전제와 진술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의하여라야 한다. 에너지가 치고 나가는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 학이 한쪽다리로 서는 이유는 학 뿐만 아니라 모든 조류가 다 마찬가지인데 발가락과 다리의 구조가 한쪽다리로 서는게 편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하여는 목적이며 목적은 외부에서 주어지므로 가짜다.


    원인은 내부에 대칭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의하여다. 이 규칙만 알아도 거의 모든 오류를 초단위로 짚어낼 수 있다. 어떤 목적과 의도를 위하여 어쩐다고 말해지면 가짜다. 문장의 어색함을 느끼는 것인데 그냥 느껴진다. 말하자면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화음을 느끼듯이 느끼는 것이다. 강한 느낌이 온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위화감이 느껴진다.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나는 잊지 못하는 것이다. 왜? 불쾌하니까. 과거에는 만화 중에 코를 바늘처럼 뾰족하게 그리고 입을 옆에 그리는 만화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런 그림체를 볼때마다 불쾌했다. 왜 코가 바늘처럼 뾰족하고 입은 위치를 이동하여 뺨에 가서 붙어 있다는 말인가?


    기분이 나빠진다. 마찬가지다. 위하여 어떻다고 써놓은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 않은가? 스치로폴로 유리창을 닦아보자. 삐익 하는 소리가 난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가? 이런건 그냥 느끼므로 3초 안에 판단이 선다. 아닌건 아닌 거다.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건 무조건 틀린 거다. 논리를 들여다 볼 필요없다.


    김어준의 되도 않은 음모론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장난하나? 사람을 아주 초딩 취급하네. 화가 나는 것이다. 일단 느끼고 다음 판단하고 분석한다. 4학년 때는 대구에 있다는 무슨 학생과학관까지 가서 실험을 했는데 결과를 발표하란다. 누구도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못했다. 돌고돌아 내가 지목을 당할 차례다. 


    나는 자석과 쇠 사이에 어떤 힘의 방향성이 있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말하자면 자기장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선생님은 나의 견해를 일축했다. 선생님이 스스로 말한 실험결과는 자석이 쇠를 당긴다는 것이었다. 당기긴 개뿔 자석에 무슨 손가락이라도 달렸다는 말인가? 어떻게 당겨?


    당기려면 먼저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잡지? 나는 선생님의 말에 승복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틀렸고 문교부가 틀렸고 인류가 틀렸다. 그때는 교육부가 문교부였다. 이 사건은 내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수년 동안 무수히 생각했다. 왜? 뇌가 간질간질 했기 때문이다. 뭔가 답을 알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느낌은 일단 왔다.


    설명할 언어가 없을 뿐이다. 구조론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닫힌계 혹은 장이다. 토대이기도 하고 축이기도 하다. 그런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석과 쇠를 통일하는 제 3의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것은 시스템 속의 존재이며 곧 메커니즘으로 존재하며 반드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어떤 존재라는 것은 언어적으로 말이 안 된다. 존재는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구조론 용어로 말하면 조건문과 반복문의 담론 안에 전제와 진술의 명제가 있고 그 안에 다시 주어와 술어가 있고 다시 명사와 동사가 있고 마지막에 단어와 관측자가 있다. 언어는 대칭과 대칭과 대칭과 대칭과 대칭으로 있다. 


    하나의 사건 안에 다섯 개의 대칭이 있으며 그게 없으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냥 있다는건 말이 안 되고 뭔가 있을만한 건덕지가 있고 비빌 언덕이 있고 내용물이 있고 컨텐츠가 채워져 있어야 한다. 껍데기만 있으면 안 된다. 모든 존재는 메커니즘적 존재이며 사건의 존재이고 에너지의 경로를 지정하는 의사결정 존재다.

    

   그냥 있다는건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된 것이다. 즉 가리켜지고 지목된 것이다. 그냥 지목하면 다 있나? 그럼 귀신도 있고 요괴도 있고 초능력도 있고 다 있겠네? 있는건 있고 없는건 없다. 빛이 있으므로 그림자는 없다. 인간에게 지목될 수 있으나 실체가 없다. 자체의 통제가능성이 없다. 빛은 스스로를 통제하니 곧 파장이다.


    그림자는 파장이 없다. 명목적 존재이나 실질적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게 아니라 존재하는 양식에 의한 존재이며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반드시 있다. 각자의 레파토리가 있다. 각자의 포트폴리오가 있다. 갖춤이 있다. 어떤 통일성이 있다. 하나로 있고 일원적으로 있다. 이원론은 틀렸고 일원론이 맞다. 


    학교에서 린네의 분류이론을 배웠다. 이거다. 린네는 생물을 분류했으니 나는 무생물을 분류해보자. 가까운 것부터. 가까운 것은 물건이다. 물건 앞에 물체 있고 물체 앞에 물질 있고 물질 앞에 물성 있고 물성 앞에 물리 있다.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하루는 교생 선생님께 제논의 궤변을 배웠다.


    이 문제의 답을 찾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물론 수학자들이 과거에 다 해명한 문제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가 한 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왜? 자연에 크기가 없기 때문에. 어떤 크기가 아니라 크기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아킬레스가 한 걸음을 가면 거북이는 반걸음을 간다. 이를 반복한다.


     반의 반의 반의 반의... 계속된다. 끝나지 않는다. 아킬레스와 거북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없고 크기도 없고 운동도 없다. 없을 뿐 아니라 그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크기가 있으면 무한대의 딜레마 때문에 우주가 건축될 수 없다. 어딜 가나 무한대 개념이 괴롭힌다.


    계산을 하다보면 수렴되지 않고 확산되는 경우가 있다. 뭔가 잘못된 거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비례다. 비례는 둘의 대칭이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이 있는게 아니라 대칭과 자리바꿈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공간과 시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둘의 대칭이 있으면 축이 있으므로 물질이 되고 계가 있어야 하므로 에너지가 된다. 


    세상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로 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대칭의 형태다. 다섯 가지 대칭이 다섯 가지 매개변수를 이루어 밀도, 입체, 각, 선, 점을 이루니 곧 사차원에서 0차원까지 다섯 차원이 우주를 조직하는 씨줄날줄을 이룬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분류하다가 패턴의 반복을 보고 찾아진 것이고 원리는 이거다.


    반복되는 패턴을 먼저 찾아놓고 그게 정체가 뭔지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낸 것이 존재론과 인식론 곧 연역과 귀납이다. 관측의 딜레마다. 존재는 사건이며 인간의 관측을 통한 사건에의 개입이 모든 착오의 근원이다. 이를 알아낸 것이 24살 때다. 그리고 구조론은 완성되었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줄 안다는 것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세상은 에서에서 으로의 이행이다. 이런 규칙들을 정했는데 두꺼운 노트 여섯권에 써서 대전 유등천변 어느 바위 밑에 비닐로 싸서 감춰놓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에서에서 으로는 화살표를 의미한다. 존재는 화살표다.


    우리는 어떤 존재를 주로 점으로 표시하지만 화살표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건의 진행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점으로 표시하는건 인간의 눈으로 관측하는 기준이고 존재 그 자체의 사정을 따르면 모든 존재는 화살표로 나타내져야 한다. 반드시 방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대략 이렇게 20년쯤 걸려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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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4 (23: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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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성의 철학

 

    아기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분리불안이다. 어머니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더 끔찍한 것은 어머니가 남이라는 인식이다. 아기때 어머니는 나의 신체 일부와 같았다. 일심동체였다.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첫 돌이나 되었을 무렵이다. 이가 나서 젖을 뗄 시기가 되었는데 아둔한 아이였는지 여러번 어머니의 가슴을 깨물어서 혼이 났다. 그때 엄마의 꾸지람이 내게는 치명적이었다. 칭찬만 듣다가 처음으로 꾸지람을 들은 것이다. 어지럽다. 나는 바보인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젖을 떼려고 극단적인 요법을 쓴다. 


    고추장요법과 식초요법을 시도했지만 이미 밥을 먹고 있을 때였으므로 통할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김치요법을 썼는데 신김치의 검게 변색된 부분을 젖무덤에 여러 개 붙이고는 '에비다' 하고 겁을 준 것이다. 큰 두려움을 느꼈다. 혀로 느끼는 맛으로는 반응하지 않다가 시각적인 이미지에는 강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후 어머니 가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김치 이파리가 무서웠겠지만 이후로도 가슴 근처로 가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거절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막무가내로 고집 피우고 뗑깡 부리면 다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타자성과 관련하여 기억나는 최초의 사건일 뿐이다. 이후 무수히 나냐 남이냐의 경계선에서 번민하게 되었으며 그때마다 나는 충격받았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부잣집에 가 보고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하는 식이다. 시골 부자집 안방은 방이 너무 깨끗하고 가구도 너무 현란했다. 


    번쩍거리는 자개장에 커다란 거울이 떠억하니 버티고 있었다. 겨울 내내 한 번도 씻지 않은 나의 시커먼 발바닥을 용납할 수 없는 공간이다. 나는 배쳑받고 밀려났다. 나와 남 사이에도 금이 있고 가족과 외부인 사이에도 금이 있다. 나와 세상 사이에도 금이 있다. 그 금은 내게 잔인했다. 아이 때 세상은 내편이었다. 


    엄마는 나의 신체 일부와 같았다. 산도 들도 하늘도 공기도 강아지도 닭들도 송아지도 언제나 내편이었다. 모두가 내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차갑게 거절당한다. 아이는 그만 상처입는다. 원래 눈에 띄는 것은 다 내차지였다. 들판의 수박과 참외도 당연히 내것이었다. 내가 봤으니까 내것이지. 


    그런데 아니란다. 수박서리다. 이건 범죄란다. 순경이 잡으러 온단다. 치명적이다. 내가 거부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내가 거절되어야 하는 거지? 거절당하느니 먼저 거절해줄테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열살 무렵부터는 반공도서를 읽고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반공도서의 상투적인 패턴은 공산주의가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건데 나는 앞부분의 이상은 좋다에 꽂혔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 현실을 고쳐줄께. 이상의 공산주의는 좋은데 현실의 공산당이 나쁘다면 내가 공산당을 개혁하겠어. 중학생 때는 공산주의에도 흥미를 잃고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나냐 남이냐! 그 사이에 벽이 있다. 나는 상처입었고 좌절했다. 세상과 나는 다른 편에 속했다. 나는 가족의 편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편도 아니고 인류의 편도 아니다. 그 누구의 편에도 속할 수 없었다. 이왕 편을 가를 바에 좀 세게 가보자. 현실의 박정희 독재를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우주를 통째로 반대하기로 하자. 


    신을 혼내주기로 하자. 욕망에 지배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보기로 하자. 브레이크 없는 사유의 폭주는 즐거운 것이었다. 사실이지 이 문제야말로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는데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비슷한 것도 없었다. 서점가에 나온 철학책은 죄다 읽어봤는데 다들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더랬다.


    예컨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참으로 시시하다. 세상이 다 적인데 얼어죽을! 소유해도 적을 소유하고 존재해도 적이 존재하는 판에 유치하긴. 애초에 지구 인간 중에 말이 통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스승으로 삼을 만한 말이 통하는 친구는 동양에도 없고 서양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고 가능성도 없었다. 


    좋아하는 아이가 생기면 문득 나의 더러운 손발과 한 번도 하지 않은 양치질과 누더기인 옷을 떠올리고는 절망하게 된다. 이런 식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사귄다는 이야기는 많아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독약을 마신 기분이 된다고 쓰디쓴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좋다는 비참하다와 동의어였다. 


    한 살 때 느끼고 몸서리친 것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기준선이다. 나냐 남이냐는 호응하는가 배척하는가다. 호응하는 것은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부름에는 응답하고 질문에는 대답하고 친절에는 보답하고 구함에는 충족하여 주어진 과제에는응당하게 복수하는 것이 그리하여 사건을 완결시키는 것이 의미다.


    벌어진 판에는 어떻게든 맞대응을 하는 것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부름과 응답이며 그리하여 완결되어야 하며 마침내 완전해야 하며 그러므로 호응해야 한다. 철학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며 의미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응답할 수 없다. 차갑게 밀려난다. 떠밀려 배척된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본래 타자이며 나 자신조차도 때때로 타인이다. 실패다. 작품은 보기좋게 깨져버렸다. 어떤 경우에도 수습이 안 된다. 돌이킬 수 없다. 이 땅에 태어난 사실 자체가 실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별에는 내리는게 아닌데 말이다. 인생은 망쳐버린 시험이며 깨져버린 도자기며 구겨버린 원고지며 찢어버린 도화지다.


    인간은 족보로 응답한다. 3대를 이어가야 완성된다. 계통으로 응답한다. 하나로는 어림없고 둘로도 부족하고 3대까지 진도를 나가주어야 미적지근하게 반응이 오는 것이다. 내가 좋다고 들이대면 차갑게 밀쳐진다. 너도 좋잖아 하고 무마하려다가 개쪽팔고 실패한다. 내가 좋은건 일방적 선언이니 이유가 될 수 없다. 


    너도 좋은건 여전히 부족한 것이며 3대를 전개하여 너와 내가 함께 할 미래의 청사진이 펼쳐져야 비로소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전망이 서는 것이다. 통제권의 획득이다. 그러므로 미인을 보면 낙담하게 된다. 돈과 명성과 성공과 출세와 시험과 같은 것이 없는 원시 부족민의 삶이 더 근사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타자성은 대칭성이다. 대칭에 호응되지 않으면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면 질문에 답이 없고 친절에 보답없고 구함에 충족없으면 그것은 허무한 것이며 그러므로 실패인 것이며 당연히 망하는 것이며 그래서 의미가 없는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며 증폭되지 않고 공명되지 않아 복제되지 않는다.


    공간에서의 맞대응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다. 애초에 왕자로 태어나지 못했으면 실패다. 떳떳하지 않다. 시간에서의 맞대응은 가능하니 마땅히 3대의 계통을 이어가는 완전성을 얻어 복제하고 증폭되고 공명되고 망라되어야 한다. 하나로는 어림없고 둘로도 부족하고 3대까지 계통을 만들어가야 비로소 응답이 된다. 


    왜? 복제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은 잘해봤자 초딩 반사놀이의 반사 밖에 안 된다. 거꾸로 내가 부르는 위치에 서야 합당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공간에서는 세상의 부름에 엄마의 부름에 타인의 부름에 나는 응답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인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인생은 실패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에서의 가능성은 맞대응을 포기하고 대신 새로운 나의 신대륙을 개척하는 것이다.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하는 포지션에 위치해서는 절대 답이 없다. 사방은 꽉 막혀 있다. 내가 불려진 사실 자체로 실패다. 태어난 사실 자체로 이미 실패다. 반대로 내가 부르는 사람이 되었을 때 사건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복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불러냈듯이 내가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부름에 내가 응답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완전성이요 인간의 의미이니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내가 불려졌기 때문에 나 또한 누군가를 호출하여 불러내는 것이며 인생은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존엄으로 부르고, 자유로 부르고, 사랑으로 부르고, 성취로 부르고, 행복으로 부른다. 우리는 불리워주기 바라지만 가짜다. 합격자 명단에 불려지고 당첨자 명단에 불려지고 파트너 선택으로 불려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왕자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실패다. 불려지면 이미 을이다. 어떤 경우에도 비참에 비참을 더할 뿐이다. 


    왕자는 부르는 사람이다. 왕자가 가진 것은 대표성이다. 대표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와서 터 닦아 놓고 부르는 자의 특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3대의 계통을 완성할 때 부를 수 있다. 그렇게 터는 닦아진다. 비로소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호출할 수 있다. 사건의 원인으로 서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일의 시작으로 서서 결말을 불러낼 수 있다. 몸체의 머리에 서서 꼬리를 불러들일 수 있다. 플랫폼의 기관차가 되어 객차를 끌어들일 수 있다. 사건은 연쇄고리로 이어진다.  하나의 사건으로 또다른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럴 때 누군가의 가슴을 불지르는 한 알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다. 

      


    욕망을 이겨야 이긴다


     인생은 부름과 호응이다. 질문과 답변이다. 시작과 종결이다. 욕구와 충족이다. 원인과 결과다. 인간은 환경 속의 존재다. 환경이 가만 있는 인간을 불러내고 인간은 맞게 호응한다. 부름과 호응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로 대칭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의 역할은 상황에 맞게 응답하는 것이다. 맞장구치는 것이다. 호응하기 쉽다. 문제에는 답을 맞추면 된다. 


    과제에는 수행하면 된다. 시험에는 합격하면 된다. 동료에게는 선택받으면 된다. 그러나 실패다. 호응하는 자는 갑이 아닌 을의 포지션에 서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꼬리에 서기 때문이다. 사건은 방향성이 있다. 원인은 앞서가고 결과는 뒤따른다. 에너지의 통제권은 원인측에 있고 결과측에 없다. 인간의 역할은 호응이지만 호응은 꼬리의 예속이다.


    어린이는 호응하면 된다. 엄마가 부르면 응답하면 된다. 시키는대로 심부름 하면 된다. 학생은 호응하면 된다. 선생님이 문제를 출제하면 답을 맞추면 된다. 사건의 통제권은 엄마에게 있고 선생님에게 있다. 그래도 불만이 없다. 엄마는 내편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편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의 문제다. 어른이 되면 처지가 다르다. 내편이 아닌 거다.


    주도권 문제가 개입한다. 호응하면 종속된다. 공허해진다. 주변부로 밀려난다. 꼬리가 될 수 없다. 머리가 되어야 한다. 에너지의 통제권을 틀어쥐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본인이 먼저와서 광야에 깃발을 꽂아놓고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부름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면 구조론에서 금지 하는 자기소개다. 


    당신이 미녀를 얻었다 해도 그것은 미녀의 손을 빌린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타인의 손길로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이다. 이미 종속되어 있다. 당신이 돈을 벌었든 권력을 얻었든 무엇을 성취하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자위행위다. 자기소개에 자기위안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종속된다. 꼬리가 되어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시선과 평가와 뒷말과 평판에 몸을 맡기고 예속되고 마는 것이다. 예술가들 역시 자신의 작품성향이 자기만족적인 일종의 자위행위 혹은 자기위안이 아닌가 하고 서로 의심하고 토론한다. 언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소개형 언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예술은 자기만족적인 작품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시선의 방향이 문제다.


    안으로 닫아걸지 말고 밖으로 열려야 한다. 시선이 천하를 향해야 치고나가는 방향성이 얻어진다. 시선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면 그것으로 사건이 끝난다. 그러므로 허무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배가 고프다. 밥을 먹었다. 호응한 것이다. 배가 고픈건 과제요 밥을 먹은 것은 수행한 것이다. 과제를 수행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걸로 끝나면 공허하다. 


    마땅히 일의 다음 단계가 제시되어야 한다. 밥을 먹었으면 새로운 일에 착수해야 한다. 밥을 먹고 만족하는 것은 시선이 자기를 향하는 것이며 밥을 먹고 기운을 내서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는 것은 시선이 천하를 향하는 것이다. 마땅히 시선의 방향이, 에너지의 방향이 나를 향해서 닫히면 안 되고 밖을 향해서 열려야 한다. 왜 먹는가? 더하여 왜 사는가? 


    만족하려고? 성공하려고? 쟁취하려고? 행복하려고? 출세하려고? 그것은 시선이 자기를 향한 것이다. 에너지가 닫혀버렸다. 출구가 없다. 허무하다. 실패다. 만족과 성공과 행복은 신이 인간을 부려먹으려고 설치해 둔 미끼다. 속지 말아야 한다. 낚이지 말아야 한다. 치즈 한 조각에 홀리는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되지 말고 시선이 바깥으로 열려야 한다.


    천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에너지의 순환이 가능하다. 사건의 지속가능성이다. 내가 취하고 내가 먹으면 잘못이다. 내가 가지고 내가 챙기고 내가 사건의 종착점이 되면 안 된다. 나는 대통령이 되겠어. 박근혜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걸로 끝? 나는 출세하겠어, 나는 미인을 얻겠어, 나는 돈을 벌겠어 하며 자신을 사건의 종착역으로 만든다.


    그게 하지말라는 자기소개가 되고 지적 자위행위가 된다.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남북통일을 이루겠어. 내가 출세해서 기업을 일으켜 10만명을 고용하겠어. 하고 다음 단계의 계획이 나와주어야 자기소개의 퇴행을 극복한다. 자기를 배제해야 한다. 그것이 공자의 극기복례다. 그렇다면 정답은? 답은 언제나 이기는 것이다. 


    게임에 이겨야 한다. 타인과의 대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이겨서는 의미가 없고 세상과의 대결에서 이기고 신을 이겨야 한다. 나를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미녀를 만나되 미녀를 탐하지는 않아야 한다. 미녀와 의기투합해서 일의 다음 단계로 진도를 나가줘야 한다. 성공에 도달하되 성공을 탐하지는 말아야 한다. 성취하되 챙기지 않는 거다. 


    게임에 이긴다는 것은 자신은 적게 움직이고 타인은 많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낚시꾼은 적게 움직이고 물고기는 많이 움직인다. 물속의 것이 물 밖으로 나왔으니 많이 움직였다.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다. 나의 욕구를 충족하는게 아니라 천하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겠다. 욕망하지 말고 욕망하게 하라.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같다.


    이념은 욕망을 끌어내는 기술이다. 금전의 욕망을 끌어내는 자와 지적 허영심의 욕망을 끌어내는 자가 있다. 천하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자가 이기는 자다. 노무현이 세상을 크게 움직였다. 세상을 낚은 것이다. 그것이 대표성의 획득이다. 광야에 먼저 가서 깃발을 꽂아놓고 기다리는 것이 대표성이다. 낚이지 말고 낚아야 한다. 욕망에 낚이지 말라. 


    욕망은 환경이 그대를 낚는 미끼다. 천하의 욕망에 불을 질러라. 예술이든 정치든 사업이든 같다. 스티브 잡스는 70억 인류의 어떤 욕망을 끌어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다. 워즈니악은 기계를 잘 만졌지만 스티브 잡스는 사람을 잘 만졌다. 사람을 만질줄 아는 자가 진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행동은 에너지의 흐름을 끊는 나쁜 행동이다.


    타인의 욕망을 일깨우는 행동은 에너지 흐름을 트는 좋은 행동이다. 세상을 흔들어 큰 소리를 끌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격렬한 반응을 끌어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반응하지 말고 반응하게 하라. 공자는 자신의 권력의지를 충족하지 않고 타인의 권력의지를 끌어낸 사람이다.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름 부르는 사람이 되라. 


    3대의 계통을 전개시켜야 가능하다. 1대가 먼저 와서 터를 닦고 2대가 집을 짓고 3대가 가게를 열어서 손님을 맞는다. 4대는 가게에 고객으로 오고 5대는 최종적으로 그것을 먹는다. 소비한다. 먹는 사람 되지 말고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지 말고 사람을 끌어들여서 일을 크게 벌여놓고 튀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의 일은 거기에 모여든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참된 진보는 목표의 달성이 아니라 방향의 제시라야 한다. 정치인은 대중의 권력의지를 끌어내고 예술가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끌어내고 지식인은 제자를 강의실로 끌어내고 기업인은 노동자를 생산현장에 끌어낸다. 잠든 사람을 일깨우고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세워 모두 가담하도록 한다. 


    그렇게 저질러놓고 튀어버린다. 인생의 게임에 이기는 방법이며 사건을 복제하는 방법이며 진정한 부름에 응답하는 방법이다. 3대가 전개되지 않으면 에너지의 방향이 자기를 향하므로 실패하게 된다. 제자를 키우든 후배를 돕든 자녀를 낳든 사건을 연결시켜 가야 한다. 보수는 연결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고 끝이다. 뒷감당은 나몰라라가 된다.


    진보는 어떻든 맥락을 이어간다. 김대중이 남북통일과업의 1대가 되고 노무현이 2대가 되고 문재인이 3대가 된다 보수는 그런게 없다. 김영삼의 후계자는 없다. 이명박은 독자적으로 컸다. 박근혜는 후계자가 없다. 역시 독자적으로 컸다. 그들은 단지 스카웃 된 것 뿐이다. 트럼프 역시 공화당의 적자가 아니다. 김영삼도 역시 노태우의 후계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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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19: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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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고한다의 법칙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둥 되도 않은 개소리가 초딩 교과서에 너무 많았다. 염소 두 마리를 끈으로 연결하여 묶어놓고 양쪽에서 먹이를 준다. 연결된 끈이 짧아서 어느 쪽도 앞에 놓인 먹이를 먹지 못하는 판이다. 마침내 두 마리 염소가 화해하여 다정하게 같은 쪽의 풀을 함께 먹는다. 바른생활 교과서의 한 장면이다.


    말이나 돼? 힘센 놈이 이기는 거지! 힘싸움을 해서 확실하게 서열을 정해놓으면 두고두고 의사결정이 쉽잖아. 먹이는 한 무더기인데 두 마리 염소가 한꺼번에 주둥이를 들이밀다가 입술끼리 충돌하면 꼴사납잖아. 뭐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중요한건 내가 기억했다는 점이다. 외나무 다리에서 두 마리 염소가 마주쳤다.


    서로 교착되어 고민하다가 마침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다른 염소가 그 위를 지나간다. 해결끝. 개소리다. 우선 외나무다리는 위험하니 건너지 말아야 한다. 중간에서 마주칠 것 같으면 미리 말을 해서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야지. 염소 등 위로 걸어가다가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등을 짓밟고 가라는게 말이나 돼?


    외나무다리 중간에서 마주쳤다면 힘대결을 벌여서 약한 쪽이 뒷걸음질로 물러서는게 맞지. 말도 안 되는 수작이다.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말이다. 초등학생이라고 놀려먹는 짓이 아닌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국어시간에 동시를 배우는데 이런 장면도 있었다. 버들강아지 꿈을 꾸는 봄이 오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지목하여 묻는다. 꿈이 뭐지? 내 앞까지 차례가 왔다. 꿈은 사람이 밤에 잠을 잘때 나타나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선생님은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무도 맞는 대답을 못해서 선생님이 화가 났는데 뒤늦게 누군가 정답을 말했다. 꿈은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다. 납득할 수 없다.


    꿈은 꿈이지 왜 생각이야? 버들강아지가 무슨 생각을 해? 버들강아지가 동물이냐? 과학자가 되기로 한 것은 이런 것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곧 포기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아스퍼거인은 비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여간 짜증이 났다.


    비유를 이해못한다기 보다는 이런 것들이 가시처럼 걸린다는 점이 문제다. 어린이들을 이렇게 어르고 뺨치며 갖고놀아도 된다는 말인가? 비유는 어리숙한 꼬맹이를 놀려먹기 위한 어른들의 못된 장난이다. 만화가들이 그림체를 이상하게 왜곡해 그리는 것도 짜증났다. 코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그리고 입은 옆에 붙인다.


    비유를 이해못하는게 아니라 비유는 소실점이 어긋난 어색한 그림처럼 불편한 것이었다. 이현세 만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정성들여 그리기는 했는데 그림체가 묘하게 틀려먹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소실점이 죄다 틀어져 있다. 그래서 라고한다의 법칙을 만들어냈다. 납득이 안 되면 무슨 말에든 라고한다를 붙인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왜? 선생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깐. 그것이 선생님의 교육방법이라는 거지. 비로소 납득이 되었다. 왜 만화가는 이상하게 왜곡한 그림체를 구사하는 것일까? 만화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깐. 특히 동물을 사람으로 의인화 한 만화가 납득되지 않았는데 아량을 베풀어 이해하기로 했다.


    동물이지만 사람인걸로 한다. 뒤에 ~라고한다를 붙이면 사실에서 사건으로 도약한다.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 사실이라면 관측자가 사건 안에 있지만 사건이라면 관측자가 배제되어 있다. 보다 객관화 되는 것이다. 링 위에 오른 선수가 아니라 링 바깥의 관전자 포지션이 된다. 주최측이 된다.


    어느 말이 일등으로 들어와도 돈을 따는 경마장의 주최측과 같다. 상대가 내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래!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네가 옳은 걸로 해줄께. 이렇게 빈정대는 거다. 냉소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원효의 화쟁을 떠올려도 좋다. 사실에서는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하게 된다.


    사건에서는 에너지의 통제권을 틀어쥐고 입맛대로 조율할 수 있는 작품이 되어준다. 모순되고 대립하고 충돌할수록 에너지는 흐드러지고 풍성해진다. 아름다워진다. 그래! 판돈 올리자고. 갈때까지 가보는 거야. 대결해. 충돌해. 모순되어버려. 싸워봐. 주최측의 포지션에 서면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다.


    어느 말이 이기든 이기는 말이 내 말이다. 그걸로도 한 번 가보는 것이고 이걸로도 한 번 가보는 것이고 나는 통계를 얻어 확률을 정하면 그만이다. 사실에는 정답이 있지만 사건에는 방향이 있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게 되지만 사건의 세계에서는 서로 충돌시켜 놓고 에너지를 취한다.


    사실의 세계라면 자본주의가 옳으냐 공산주의가 옳으냐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 하지만 사건의 세계에서는 둘을 경쟁시켜 놓고 인류문명의 풍성함을 얻으면 그만이다. 사건에는 관점이 있고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사건은 항상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사건을 발전시킬 수 있다. 애들싸움을 어른싸움으로 만들 수 있다.


    판돈을 올려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 거기에 비전이 있다. 탈출구가 있다. 배후지가 있다. 교착을 타개할 수 있다.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다. 자유로움이 있다. 허허로움이 있다. 다만 방향성의 판단이 중요하다. 방향성이 없는 막연한 사건의 관점은 냉소적으로 된다. 허무주의가 된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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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21: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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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하여에서 의하여로


    어떤 말이든 뒤에 '~라고한다'를 붙여본다. 사실에서 사건으로 도약한다. 사건에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가 가는 루트가 있다. 결이 있다. 결대로 간다. 사건의 주최측과 링 위에서 뛰는 선수는 포지션이 다르다. 갑을관계가 있다. 서열이 있다. 에너지를 틀어쥐는 쪽에 권리가 있고 권력이 있다. 이는 언어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방향이 어긋나면 뭔가 어색해지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속이 거북해진다. 스치로폴로 유리창을 문지려면 괴로운 소리가 난다. 그렇지 않은가? 소실점이 맞지 않는 조선시대 민화나 이현세 그림을 보면 속이 거북해지고 불편해진다. 장에 개스가 차고 소화가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등이 따끔따끔하고 체온이 확 올라오는 느낌이다. 


    견딜 수 없게 된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다가 대장장이 망치소리에 화음과 불협화음을 구분한 것과 같다. 5살 짜리 꼬마도 화음을 느낀다고 한다. 필자는 전혀 못 느끼지만. 아기가 실로폰을 두드리고 놀며 엄마 엄마! 이 소리와 이 소리가 서로 친한가 봐. 하고 엄마에게 말을 걸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몸으로 느껴야 한다.


    못 느낀다면 사실이지 할 말이 없다. 필자와 같은 지독한 음치에게 음악을 가르쳐 봤자다. 구조치가 있는 거다. 언어든 그림이든 필자는 서로 엮여 있는 둘의 관계가 어색하면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짜증을 낸다. 몸으로 느끼는 물리적 반응이다. 통증과도 같다. 설명해 달라고 하면 솔직히 피곤하다. 설명을 들어봤어야지 참.


    아마 4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방학공부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물 속에 서 있는 학이 한쪽다리를 들고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란다. 위해서 나왔다. 위하여 나오면 불편하다. 속에 메스꺼워진다. 기분이 나쁘다. 위한다는게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의하여라 하면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상쾌한 느낌이다.


    위하여라면 뭔가 연결이 끊어진 어정쩡한 느낌이다. 부모들은 말한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야. 너희 형제들이 한 달에 200만원씩 모아서 내게 주는 용돈을 내가 한 푼이라도 쓰는줄 아느냐? 다 교회에 갖다 바친다. 그게 다 너희를 위해서지. 다 너희 잘되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속이 뒤집어진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장면이잖아.


    교회에 돈을 가져다 바치는데 왜 자식이 잘된다는 거야. 또 왜 자식이 잘되길 위하는데? 위한다는게 뭔데? 영어로 for는 위하여라고 번역되지만 앞세운다는 뜻이다. 우리말 위하여는 지금도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필자는 이런 부분에 유독 민감하다. 묵과할 수 없다. 이런 막연한 레토릭을 들으면 화가 난다. 우리 이러지들 말자.


    말을 똑바로 하자고. 에너지 전달경로 위주로 말해야 한다. 의하여가 맞는 것이다. 학의 외다리 사건은 필자가 똑똑히 기억하는 한가지 내용이고 교과서 안에서 무수히 이러한 충돌이 일어났다. 문장마다 잘못되어 있다. 위하여라고 씌어진 부분은 전부 잘못된 기술이다. 위하여는 논리적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물의 진화와 관련하여 위하여라는 표현이 많다. 쓰지 말아야 할 비과학적인 언어구사라 하겠다. 생물의 진화는 유전자에 의하여지 무슨 위하여라는 말인가? 주어가 없잖아. 새는 날개가 있으니까 나는 거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보겠다는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의 꿈을 위해서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장난하자는 거?


    어떤 거창한 목적과 의도가 들어가면 일단 가짜라고 보면 된다. 누구의 목적인데? 주어가 없다. 목적은 플랜에서 나오고 플랜은 여러가지 사건의 연결이다. 그 연결의 사슬을 낱낱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의 플랜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 전제없이 진술은 억지다. 위하여는 모두 문장이 옳지 않은 전제생략 억지 진술이다.


    위하여라고 쓴 사람은 모두 국어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거지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먹는 것은 아니다. 만족감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먹기로 작정한 상태에서 먹어본 사람이 메뉴를 고르는 절차에 불과하다. 개연성은 있어도 논리적 필연성이 없다. 필연적이지 않으면 가짜라 하겠다.


    과연 새가 한쪽다리로 서는 이유가 체온절약 목적 때문일까? 아니다. 뭐든 한쪽다리로 서는게 더 편하다. 사람도 짝다리 짚고 한쪽 다리로 벽에 기대 설 때가 많다. 두 다리에 체중을 배분하려면 뇌가 깨어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기 어렵다면 운동장에 가서 한 시간만 서 있어봐라. 뇌가 피곤하다.


    이런건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느낌이 딱 오잖아. 의하여는 필연적이지만 위하여는 필연적이지 않으므로 간격이 띄어져 있는 듯한 허술한 느낌이다. 조리에 맞지 않고 아귀가 맞지 않고 톱니가 맞물려 있지 않다. 사람이든 학이든 한쪽 다리로 서는게 편한 것은 뇌가 체중을 분배하는 문제가 힘들기 때문인데 물리적으로 직결된다. 


    톱니바퀴가 물려 있다. 그러나 체온절약 문제라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관찰해 보았더니 오리도 닭도 비둘기도 거위도 수시로 한쪽다리로 서 있더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씨가 더워도 새는 보통 한쪽다리로 선다. 이와 비슷한 위하여의 오류는 교과서에 무수히 많다. 일대사건이다.


    이건 과학계 전체의 수준에 문제가 있는 거다. 한국 교과서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문명의 수준문제다. 인류는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위하여는 방향이 없지만 의하여는 방향이 있다. 서열이 있다. 위아래가 있다. 질서가 있다. 생물의 진화가 위하여라면 방향은 오리무중이지만 의하여라면 일정한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에너지의 효율성이 생물이 진화하는 하나의 방향성이 될 수 있다. 모든 생물은 에너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간다고 보면 대략 맞는 거다. 에너지가 칼로리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결정에도 에너지가 든다. 의사결정을 빠르고 편리하게 하는 쪽으로 생물은 진화해 왔다. 예컨대 지네는 발이 너무 많다. 


   발들이 서로 엉키면 곤란하다. 인도신화의 아수라 신족은 팔이 여섯개다. 여섯개의 팔이 서로 엉켜서 방해가 되지 않을까? 창읊 던지려다가 자기 팔에 걸려 곤란해진다. 지네는 키가 작지만 만약 지네가 키를 키운다면 그 문제가 부각된다. 관절이 많은 삼엽충이나 나선이 많은 암모나이트는 비효율적인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포식자의 공격에 맞서 동서남북에 상하로 자유자재로 운동하려면 구조는 최적화 되어야 한다.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 문제에 의하여 진화가 촉발된 것이다. 포유류의 털은 에너지를 보존하기에 적합하다. 두다리로 걷는 인간의 신체구조는 방향전환에 적합하다. 체온을 절약하기 위하여 혹은 방향전환을 위하여라고 말하면 안 된다. 


    유전자에 목적과 의도가 있을 리 없다. 주어가 없다. 의하여의 주어는 유전자인데 위하여는 주어가 없다. 위하여는 목적과 의도인데 이는 인격체만 가지는 것이다. 진화 원인은 자원의 효율성 문제에 의하여다. 보다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과 효율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이겨온 것이 진화의 역사다.


    의하여는 원인과 결과를 직결로 연결한다. 위하여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애매한 것이다. 라고한다의 법칙은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의하여의 방향성으로 보면 그 냉소와 허무를 극복하게 된다. 먼저 사실로 본다. 사실에는 분명한 선악이 있고 정의가 있다. 사건으로 보면 주최측과 선수가 있다.


    역설이 작동한다. 라고한다의 법칙을 적용해서 사실에서 사건으로 도약하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의하여를 적용하면 다시 일원론으로 돌아온다. 선과 악이 구분되고 정의와 불의가 판명된다. 에너지의 결에 진정한 답이 있다. 무엇인가?


    사실은 선이 악을 이긴다. 라고한다를 투입하면 사건은 역설이 작용하여 악이 선을 이긴다. 그런데 사실의 선은 개인의 선이다. 의하여를 투입하면 개인이 아닌 집단의 선이 된다. 사건으로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말지만 의하여로 보면 집단의 방향성이 선이 된다. 명백해진다. 사실로 보면 흥부의 선이 놀부의 악을 이긴다. 


    사건으로 보면 흥부와 놀부는 다른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다. 각자 선역과 악역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 히어로와 빌런은 각각 선과 악을 맡아 연기하는데 항상 악역이 더 매력적이다. 찌질이 설까치보다 쾌남아 마동탁이 낫다. 사건에서 선악과 정의가 뒤집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의하여로 보면 다시 원래 선악으로 돌아온다.


    집단으로 보면 흥부는 팀플레이를 할줄 아는 참된 진보주의자이고 놀부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보수꼴통이다. 왜? 에너지는 언제나 집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는 에너지가 없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은 존엄도 자유도 사랑도 성취도 행복도 없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집단 안에서의 무의식 형태로 작동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고 중학교 2학년때는 마르크스를 버리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삿된 길로 빠졌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다시 그 허무와 냉소를 극복하고 공자의 제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유의 근원에는 하나의 에너지원이 있다. 상대주의는 질과 량 사이의 중간과정일 뿐이다.


    입자 힘 운동에는 상대가 있다. 맞대응이 있다. 역설이 있다. 의도와 반대로 된다. 선은 굴러서 악이 되고 악은 굴러서 선이 된다. 해적국가 영국이 갑자기 기사도를 외치며 에헴 하는 식이다. 미개한 일본이 감히 한국에 예의를 가르치려 든다. 그러나 질과 량은 상대가 없다. 맞대응할 수 없다. 절대성의 세계다.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질과 량도 상대가 있고 대칭이 있지만 닫힌계 안에는 없고 바깥에 있다. 에너지는 엔트로피에 의거하여 한 방향으로 일제히 나아간다. 그 방향은 언제라도 수렴방향이다. 의하여는 수렴방향이고 위하여는 확산방향이니 위하여는 무조건 틀리고 의하여는 무조건 맞는 것이다. 방향이 옳으면 단기적으로 불리해도 계속 가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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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14: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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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향성의 이해


    ‘더 셰프’라는 영화가 있다. 미슐랭가이드 별점에 관한 영화인데 흥행이 망해서 아마 본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 대략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싸구려 햄버거와 고급요리의 차이가 뭐냐? 햄버거는 질 나쁜 고기에 질 나쁜 빵에 질 나쁜 서비스라고 여주인공이 대답한다. 남주인공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파리사람들은 다 그런 고기에 그런 빵을 먹고 있어. 그럼 우리가 만드는 고급요리는 질 좋은 고기에 질 좋은 빵에 질 좋은 서비스일까? 그게 전부가 아냐. 미슐랭가이드 별 셋을 받는 고급요리는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한 창의적인 요리여야 하는 거라구. 햄버그가 싸구려인 것은 죄다 똑같기 때문이지. 


    공장에서 찍어낸 거잖아. 반면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해. 까먹었지만 영화가 주장하는 것은 대략 이런 음식철학인데 여기서 방향성이 드러난다. 유명 셰프를 고용하는 고급식당들은 언제라도 새로운 시도를 추가할 수 있다. 반면 햄버거집이나 피자가게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다. 


    뭔가 시도할때마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직원들을 다시 교육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메뉴 하나 추가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영화의 주인공은 그날의 메뉴를 현장에서 곧바로 결정하기도 한다. 그날 새벽에 들여온 재료를 보고 메뉴를 정하는 식이다. 방향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위하여는 방향성이 없다. 


    목표에 도달하면 그걸로 끝이다. 의하여는 방향성이 있다. 여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걸로 사건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버전으로 갈아타고 계속 가주는 것이다. 반면 위하여는 닫혀 있고 획일적이며 꽉 막혀서 답답하다. 


    의하여는 열려 있고 다양하며 풍성하게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는 위하여라는 말에서 답답함을 느껴야 한다. 의하여라는 표현에서 뻥 뚫리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막힌 콧구멍에서 왕건이 코딱지를 발굴해낸듯한 상쾌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느끼려고 노력해야 느낀다. 


    어떤 주장이든 혹은 견해든 에너지원을 끼고 가고 방향성을 달고가야 한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되어야 하며 전제는 에너지원을 제시해야 하고 진술은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전제도 없고 진술도 없는 잘못된 언어사용에는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그냥 이게 좋다거나 저게 나쁘다거나 하는 식은 곤란하다.


    유아틱한 언어구사라면 슬픈 거다. 좋건 나쁘건 그건 지 사정이지 나더러 어쩌라고? 나와 상관없잖아. 에너지원이 있고 방향성이 있어야 내가 끼어들 건덕지가 있는 것이다. 내게 한마디 투척할 발언권이 돌아오는 것이다. 왜? 복제되니까. 복제되지 않는 언어는 필요없다. 어디 가서 써먹지 못하는 정보는 가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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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15: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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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의 이해


    외부인이 참관하는 학생과학관에서의 특별수업이다. 자석에 쇠붙이를 붙여보는 간단한 실험이었는데 30분간의 실험이 끝나고 결과를 발표하란다. 한명씩 지목하여 발표하게 했는데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자석과 쇠 사이에 어떤 힘의 방향성이 작용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대답하는데 선생님은 무시하고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40여명 학생 중에 누구도 선생님이 만족할만한 대답을 못했다. 지켜보는 참관인들 때문에 당황하여 얼굴이 벌개진 선생님이 스스로 발표한 정답은 자석이 쇠를 당긴다는 것이었다. 싱거운 답이다.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제법 근사한 답변을 제출했다고 여겼는데 선생님은 내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거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자기장 개념을 제안하려고 한 것이다. 자석이 쇠를 당기다니? 이런 엉터리 말이 어디 있어? 당기려면 잡아야 하는데 뭘로 붙잡지? 손으로 잡나 발로 잡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의 역할을 하는 무언가 있는 거야. 나는 실험실의 기구들에 흥미를 가지긴 했지만 실험실습으로 뭔가 성과를 얻은 적은 없다. 


    실험은 증명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실험실습으로 답을 알아낼 수는 없고 다만 문제를 포착할 수는 있다. 자석에 쇠붙이를 붙여보고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자석에 쇠붙이를 붙여보고 선생님의 견해가 개소리라는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다.


    자석에 쇠가 붙는다면 자석이 반응한 것인가 쇠붙이가 반응한 것인가 주변의 공간이 반응한 것인가? 이건 까다로운 문제다. 나는 이 문제를 수년 동안 생각했다. 가시처럼 목에 걸려서 신경이 쓰였다.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느냐는 말이다. 한가하게 공부나 하고 있어도 되느냐 말이다. 그냥 선생님의 해답이 틀린게 아닌 거다.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문교부도 잘못했고 과학계도 잘못되었고 인류문명 전체가 통째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정말이지 터무니 없다. 조선왕조 시대에 잘 모르면 이게 다 귀신 탓이다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메커니즘에 반응한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 중학생 큰 형의 교과서를 읽었는데 뭔가 감명깊었다. 왜냐하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는둥 하며 어린애 어르듯이 수준이하로 쓰지 않고 제법 점잖게 써놓았기 때문이다. 독자를 존중하는 격조높은 문체였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며 언어에 짜임새가 있었다. 과연 중학교라서 문장에 조리가 있었다. 


    하여간 사람을 갖고 노는듯한 동화체 문장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것이다. 엄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와 진술의 긴밀한 구조가 없다. 짜임새 없는 일방적 선언의 연속이다. 무슨 버들강아지가 꿈을 꾸냐고? 말이나 돼? 개똥 같은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중학생 큰형의 교과서에서 발견한 것은 시스템과 체계와 구조와 패턴이다. 


    느낌 와주잖아. 와꾸가 딱딱 들어맞잖아. 틀이 잡혔잖아. 가다가 맞잖아. 이건 뭔가 되어가는 그림이잖아. 그렇지. 책을 쓰려면 이렇게 써야지. 초딩이라고 사람 무시하고 말이야.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니 유치하잖아. 애도 아니고 참. 애 맞긴 하지만 애 취급은 서러운 거다. 어떤 것이든 주장하려면 마땅한 체계를 가져야만 한다.


    대칭되는 둘과 그 둘을 통일하는 제 3의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는 필수적인 체계의 갖춤이다. 수학공식처럼 당연히 들어가야만 하는 포지션들이 있는 것이다. 두 선수가 대결한다면 그 둘을 통일하는 배후의 주최측이 있고 반대편에 관중석이 있는 것이며 두 선수의 대결 이전에 주최측과 관중석의 대결이 있는 것이다. 


    괄호 안에 또다른 괄호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색하지가 않다. 매끄럽게 넘어가준다. 주최측이 잘해야 관중석이 들어찰 것이며 관중석이 추임새로 반응해줘야 주최측도 거기서 힌트를 얻어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실상 승부는 주최측과 관중석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랑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두 선수의 치고받음은?


    그것은 외부 에너지를 넘겨받아 연주하는 악기의 역할에 불과하다. 세상을 개별적 존재로 보면 안 되고 두루 연결시켜 시스템으로 보고 체계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시스템system은 쌍sy으로 선다stem는 뜻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석가의 연기법이다. 2500년 전에 이미 갈파되었다.


    항상 둘이 연결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이 연기법이다. 자석이 쇠를 일방적으로 당긴다면 연결된 것이 아니며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연기가 아니며 시스템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보나마나 거짓이다. 일단 언어가 아니다. 말을 하다가 말았으니 문장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말이 갖추어지지 않으니 언어가 아닌 개소리다.


    언어는 다수 생략되고 함축되므로 화자가 대충 말해도 청자가 찰떡같이 알아먹으면 되지만 과학을 그 따위로 하면 안 된다. 대충 씨부리기 없기다. 주변을 구석구석 잘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동시에 반응하는 둘의 쌍이 존재한다. 세상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두루 연결되며 쉽게 꺼지지 않고 여진을 계속하는 거다. 


    맥놀이가 길게 이어진다. 반드시 아우라가 있다. 일의 다음 단계가 있다. 에너지를 타고가며 관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대괄호의 열고닫음이 없이 그냥 툭 던져놓고 그걸로 끝내버리면 싱겁잖아. 생뚱맞잖아. 화장실에서 응가 때리고 밑을 안 닦은 기분이잖아. 노래를 불렀으면 앵콜이 떠줘야 하잖아. 박수라도 쳐줘야지.


    그냥 끝나는게 어딨어? 뜬금없기 없기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치고 나가는 일의 다음 단계가 있고 에너지의 전개되는 방향성이 있어야 맞춤하다. 언제나 손잡고 함께 일어서고 손잡고 함께 쓰러진다. 완벽하다. 좋다. 것이 메커니즘이다. 사실은 메커니즘의 형태로 기술되어야 하며 언어 또한 메커니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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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16: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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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은 분류할줄 아는 것이다


    꼬맹이 시절에 알아낸 것은 언어 안에 답이 있다는 거였다. 문제와 해답은 대칭을 이루므로 질문하는 사람이 말을 정확하게 하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질문하는 중에 본인 입으로 답을 말해버리는 것이다. 말을 정확하게 하는 방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즉 개별적인 사실들을 연결시켜 메커니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왜 푸르냐고 묻는다면 이상하다. 그 전에 푸르다는게 뭐지? 푸른 색은 자외선 옆의 파장이 짧아서 작은 알갱이에 반응하는 색인데 하늘이 푸른 것은 하늘의 보이지 않는 작은 알갱이들 때문이고 저녁 노을이 붉은 것은 반대로 태양이 기울어 지표 가까운 곳의 수증기나 먼지와 같은 큰 알갱이들에 반응하기 때문인가요?


    하고 물으면 이미 스로 답을 말해버린 것이라 따로 질문할 필요가 없다. 메커니즘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외선과 적외선을 대칭시켜 곧 작은 알갱이에 반응하는 푸른빛과 큰 알갱이에 반응하는 붉은 빛을 연결시켜 말하는 것이다. 가을하늘이 높고 푸른 것은 물으면서 저녁 노을이 낮고 붉은 것은 묻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남자는 왜 저럴까는 물으면서 여자는 왜 이럴까를 묻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항상 대칭되는 둘이 세트로 있는 것이며 함께 질문해야 한다. 이것을 본다면 동시에 저것을 보고 있어야 한다. 항상 반대쪽 입장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게 습관이 되어야만 한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각각 따로 보는 것이었다.


    앞면이 확정되면 뒷면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앞면을 이미 확인했는데 혹시 뒷면은 모르잖아 이딴 소리를 하는 쓰레기가 99퍼센트다. 억장이 무너진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줄 안다는 거다. 이것은 어릴 때 생각한 것이고 지금은 이를 발전시켰다. 안다는 것은 정확히 게에 에너지를 투입하여 에너지가 지나가는 경로를 아는 것이다.


    에너지 개념은 나중에 생각한 것이고 당시에는 분류만 생각했다. 린네의 생물분류와 공자의 육예분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분류가 있을 뿐 그 외에 분류가 없다. 분류야 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인데 분류학이 원시상태에 머물러 있다니 기절할 일이다. 도서관학과에 분류학을 한다고 하나 아무런 근거없이 마구잡이다.


    분류라면 당연히 종횡가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데 서양의 근거없는 4원소설과 동양의 뜬금없는 오행설이 있을 뿐 시간의 종과 공간의 횡을 가로세로 지르는 체계가 없더라. 상생상극 어쩌고 하는데 두서가 없기로 석가의 이것이 일어서면 저것이 일어선다는 연기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분류라는 것은 프리즘과 같다. 


    프리즘이 빛의 칼라를 분류한다. 분류는 비슷한 것을 딱딱 긁어서 한 가마에 집어넣고 끓여보거나 태워보거나 삶아보고 지지고 볶아서 프리즘이 빛의 칼라를 토해내듯 화학적 혹은 물리적으로 내부의 내용물들을 죄다 쏟아내게 하는 것이다. 생물체는 간단히 해부를 해보면 된다. 오장육부와 근골과 조직과 기관이 분류된다.


    구분지와 구분대상이 존재하며 하나의 구분지로 때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분류학이야 말로 모든 학문의 기본전제가 된다.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기 전에 분류학을 먼저 배워야 한다. 대부분의 오류는 구분지를 여러가지로 두고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것이다. 같은 것이 중복되고 이질적인 것이 혼잡된 것이니 합쳐서 복잡이 된다.


    실로폰을 두드리든 피아노를 치든 조선시대 편종과 편경을 두드리든 한가지 악기는 한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 예컨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섞어서 연주하면 안 되는 것이다. 장구는 채로 치다가 손가락으로 치다가 하지만 분류는 한가지 조건에서 한가지 구분지를 써야 한다.


    이런 것은 소년시절에 생각한 것이고 구조론은 그 분류의 구분지를 에너지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에너지로 분류하면 매개변수의 집적도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얻어진다. 수학은 단순화 시켜서 알기 쉽게 한 것이다. 구조론도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분류내용을 에너지라는 하나의 구분지로 단순화 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쉬운 것이며 어렵다고 말하면 안 된다. 구조론이 어려울 때도 있는데 그 경우는 구조론이 쉽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간 것이다. 예컨대 육안으로 보면 어렵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쉽다. 현미경으로 보면 쉬우니까 배율을 더 높인다. 현미경의 배율을 계속 높이면 조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보기는 쉬운 것이다.


    구조론은 쉬운 것이며 어렵게 된 경우는 현미경의 배율을 높인 것이다. 육안으로 볼 때는 표면만 보지만 구조론은 에너지를 투입하여 에너지라는 악기로 때려서 반응을 보는 것인데 에너지는 무한히 깊이 때릴 수 있으므로 무한정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애초에 번지수가 틀렸다.


    현미경 배율을 높여 어려운 것이 아니고 소리를 듣는 것인데 색깔을 찾는 격으로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략 이런 기초가 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구조론이 본래 분류를 위한 이론이라는 것도 모르고 에너지로 때린다는 것도 모른다.


    구조론은 에너지로 때려서 반응을 보는 것이다. 에너지는 둘의 연결부위에서 각이 꺾이므로 에너지로 때려보면 어디가 고장인지 알 수가 있다. 기차를 점검하는 기술자는 플랫폼에 서 있는 기차의 바퀴를 작은 망치로 때려본다. 되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기차의 어느 부분이 고장났는지 알아낸다. 바퀴만 때려보고 다른곳을 안다.


    기차는 쇠붙이가 두루 연결되어 있으므로 소리의 차이로 안다. 의사는 청진기를 들이대고 심장소리를 듣는다. 한의사는 맥을 짚는데 이건 꼼수다. 사실은 맥박을 보는게 아니라 체온을 재고 안색을 살피고 냄새를 맡고 기색을 보는 것이다. 맥박을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거의 전설이고 요즘 한의사는 진맥을 하지도 않는다.


    맥박으로 아는 것보다 체온으로 알고 안색으로 알고 냄새로 알고 기색으로 아는게 얻는 정보가 더 많다. 기색은 기운을 가늠하여 보는 것이다. 냄새, 맥박, 체온, 안색, 기색이라는 다섯가지 구분지가 동시에 들어가면 안 된다. 메커니즘은 하나의 구분지로 봐야 한다. 그래서 의사는 한의사와 달리 진료과목이 각각 다른 것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광원이 있고 광자가 있고 피사체가 있고 스크린이 있고 영상이 있다. 구분지는 피사체에 해당한다. 어떤 피사체를 투입하는가에 따라 스크린에 어떤 영상이 펼쳐질 것인지가 결정된다. 이것이 메커니즘이다. 이건 고딩때 생각한 것이고 사실은 광원이 가장 중요하다. 광원 하나로 해결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맛을 보고 냄새로 보고 소리로 보고 색깔로 보는 것은 피사체를 바꾸는 것이다. 이건 하부구조의 소식이다. 근본은 광원으로 때려봐야 한다. 에너지원을 잠갔다가 열었다가 해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그 전에 일단 인간의 지식은 곧 앎은 피사체를 맛, 소리, 냄새, 색깔, 촉감으로 다양하게 바꿔 반응을 본다.


    그것이 분류다. 안다는 것은 일단 대상을 분류할줄 안다는 것이다. 하나의 가마에몰아넣고 한가지 도구로 때려서 반응을 끌어내되 하나의 기준선 위에 줄줄이 늘어놓고 편차를 비교하는 것이다. 제대로 아는 것은 에너지로 때려 에너지의 경로를 알아내는 것이다. 곧 결을 아는 것이다. 분류개념이 없으니 구조론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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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 개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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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사람 [1]

구조론사람의 약속 세상을 구조로 바라보는 구조론연구소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 와 있다. 공자의 문하에 들면 공문의 사람이 되고 구조론 문하에 들면 구조론 사람이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눈팅도 있고...

구조론 한마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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