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동물은 언어가 없으므로 여럿이 힘을 합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그 점에서 인간과 동물이 구분된다. 언어 중에도 좋은 언어가 있다.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칠 수 있도록 돕는 언어가 좋은 언어다. 정확하게는 관점이다. 언어의 이면에 숨어 기능하는 관점이 언어의 수준을 차별한다. 언어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면 관점은 그 창이 열린 정도다. 대개 닫혀 있다. 그 창을 열어야 한다. 봉건인의 관점과 근대인의 관점은 다르다. 이는 단지 지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다. 봉건인의 창은 가족이나 부족을 수용할 정도로만 좁게 열려있다. 가족이나 부족의 힘을 합칠 수 있을 뿐이다. 근대인의 창은 국가와 인류 단위로 넓게 열려 있다. 더 많은 사람의 힘을 합칠 수 있다. 사유의 형태가 다르다. 종교는 애초에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자신과 타자의 운명을 결정할 의도가 종교에 있다. 그러나 의도가 앞섰으므로 실패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종교에 의해 인류의 시야가 제약되고 있다. 다만 과거에는 가족과 부족에 매몰된 봉건인의 좁은 시야를 틔워주는 종교의 순기능이 있었다. 과학은 넓은 창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과연 누가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과학의 눈은 어떤 것인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과학은 애초에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칠 의도가 없다.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의도가 없다.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의도가 없다. 의도가 없다는 것이 과학의 한계다. 종교는 명확한 자신의 시야가 있으나 과학은 그 시선이 없다. 평일에는 멀쩡히 강단에서 제자를 가르치다가 주말에는 교회에 가서 굴복하는 과학자도 있다. 의도가 있어야 한다. 그 의도를 조직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마르크스 이후 철저히 붕괴되었다. 기어이 이념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종교는 애초에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칠 의도가 있으므로 교황 프란치스코와 같은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서 한번씩 인류의 시야를 열어주기도 한다. 이는 작심하고 하는 행동이다. 그렇게 작심하고 행동하는 과학자는 없다.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의도가 없다. 과학자는 그 점을 훈련받지 않는다. 훈련해야 한다. 그저 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된 종교인은 훌륭하게 그것을 해내는데 그렇게 훈련하는 과학자는 없다.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훈련한 자만이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 과학자는 훈련받지 않으며 그 훈련을 담당하는 철학은 파산상태다. 이 시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의 시선은 이런 것이다 하고 정립해야 한다. 언어가 문제다. 언어에 관점의 형태로 그 시선이 담겨 있다. 과학의 시선에 맞게 제대로 된 언어를 이룩하여 보급하고자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자연과 사회와 인간 내면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연역적 언어체계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구조론은 깨달음의 언어다. 깨달음은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권을 획득하여 자신과 타자의 운명을 결정할 분명한 의도를 가진다. 한 발을 뒤로 뺀 채로 팔장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과학자의 태도와 다르다. 냉소적인 지식인의 태도와 다르다. 깨달음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이야기다. 세상을 향한 창이 열려 있는 정도가 다르다.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다. 구조론이 연역적 언어체계인데 반해 우리의 일상언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위주로 해서 성립된 귀납적 언어체계다. 대화를 통해서만 의미가 성립되므로 불완전하다. 이 언어로는 소극적 반격이 가능할 뿐이다. 목격한 사실을 보고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사결정하지 못한다. 뒤에서 관찰할 뿐 주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 과학의 언어로도 부족하고 깨달음의 언어라야 한다. 차별의 핵심은 대칭의 층위다.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원리를 따른다. 대칭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어느 지점에 대칭을 세우느냐에 따라 언어의 격이 결정된다. 그 대칭이 가족과 부족의 레벨인지 혹은 국가와 인류의 레벨인지다.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의 대칭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서 대칭이 조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대화에 갇혀 있다. 대화를 극복해야 진리에 근접한다. 그 점에서 과학은 종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종교는 연역적 구조로 되어 있다. 종교의 논리 안에서 대칭이 조달된다. 과학은 수학을 제외하고 관찰대상으로 삼는 자연과 사물에서 그 대칭을 조달한다. 언어 안에서 자체적으로 의미가 조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에서 말하는 담론이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사건은 둘이어야 하며, 둘 사이에 에너지 전달경로가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의미를 획득한다. 일상의 대화는 상대방이 말을 받아주므로 불완전하다. 그래서는 언어가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단 상대방이 굴복하면 의미가 있는 걸로 친다.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렸느냐로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려 하는 것처럼 유치하다. ‘내가 고흐보다 그림을 더 잘 그렸는데?’ 이런 식이다. ‘내가 쟤보다 더 잘생겼는데?’ ‘내가 쟤보다 더 부자인데?’ ‘내가 쟤보다 더 센데?’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자체적으로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외부에서 누가 평가해 주어야 한다면 실패다. 언어가 가장 낙후해 있다. 눈치보며 타인의 얼굴을 쳐다보고 타인의 평가를 기대한다면 어린이의 시선이다. 자신과 남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진리와 언어를 일치시켜야 한다. 진리는 복제의 진리다. 자연이 의미를 생성하는 원리가 진리다. 인간은 언어로 진리를 한정시키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 언어를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미는 화살과 같다. 명중하면 의미있고 헛방이면 허무하다. 결과가 의도와 일치하지 않으면 허무하다. 대화어는 상대가 말을 받아주므로 애초에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도는 본능이다. 그 본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실패한다. 두 사람이 탁구를 치되 상대편으로 공을 넘기는데 의미를 두는 것과 같다. 자신이 실수해도 상대방이 더 못하면 이긴다. 의기양양해 한다. 그러나 본질적 허무를 피해갈 수 없다. 그 게임은 남의 게임이다. 자신이 의도를 조직해야 진짜다. 성경으로 비유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이 의도를 조직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이 가능해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사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허나 이는 수천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생각해낸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70억 인류의 의도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과학은 그 의도가 없다. 의도가 없으면 의미도 없는 거다. 인간이 추구한다는 쾌락이나 행복 따위는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는 생존본능에 불과하다. 동물이 비웃는다. 성공이나 명성은 사회적인 열등감의 소산이다.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어디 가서 그것을 의도라고 내세우다가는 아는 사람의 비웃음을 살 뿐이다. 옛사람은 이웃의 평판에 신경을 썼다. 평판공격으로 이웃을 통제하기도 했다. 요즘은 오로지 돈에 신경을 쓸 뿐이다. 몇 푼에 울고 웃으니 어색해졌다. 자신과 타자의 운명을 결정할 의도를 가져야 한다. 의사결정권을 획득해야 한다. 의도대로 그 운명을 결정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죽음을 극복해야 대사회적인 발언권이 주어진다. 진리와 언어를 일치시킨 자만이 발언할 자격이 있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을 가져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에 조종되는 자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겁 주면 굴복한다. 돈에 조종되는 인간도 해결할 수 있다. 몇 푼 쥐어주면 된다. 명성과 평판에 집착하는 진보지식인은 쉽다. 방송에 출연시켜준다고 하면 입이 헤벌어져서 쫄래쫄래 따라온다. 수단에 의해 통제되는 인간이면 실패다. 소인배와는 천하의 대사를 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천하인이 되어야 한다. 동물적 쾌락이나 혹은 행복이나 욕망 따위에 지배된다면 대화할 수 없다. 사회적 평판과 명성과 돈과 지위에 지배된다면 역시 함께할 수 없다.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혹은 외부와 비교되는 그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기 내부에 두 개의 사건을 가져야 한다. 의도를 조직하고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자기 안에서 쏜 화살이 천하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화살을 명중시키는 것이다. 누가 화살을 쏘는가? 진리가 그 화살을 쏜다. 오직 그 화살의 명중이 인간에게 유의미하다. 누가 그 화살을 얻었는가? 그 화살을 가진 사람에게 발언권이 있다. 여러 사람의 힘을 합쳐 인류의 의도를 조직한 자에게 타인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 언어는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치는 수단이다. 그 언어를 획득한 자만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미처 그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얼른 그 언어를 획득하시라. 사회 앞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획득하시라. 진리의 화살을 자기 안에 챙겨놓으시라. 자신과 타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나서시라. 죽음도 극복하고, 본능도 극복하고, 이웃의 시선도 극복하고, 오직 진리의 결을 따라 끝까지 나아가시라. 화살이 명중하면 의미가 있고 오발이면 허무하다. 진리는 연장입니다. 누군가는 그 연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연장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연장은 하나로 족합니다. 진리는 복제되므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연장을 만드는 수고는 불필요합니다. 단 그 연장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팀플레이를 훈련해야 합니다. 혼자 산중에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식이라면 허무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두 번째 사건은 인류와의 팀플레이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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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읽고 나면 좀 확 깨우쳐야는데 참나. 감사합니다.
쾌락이나 행복 따위는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는 생존본능에 불과하다.
외부에서 누가 평가해 주어야 한다면 실패다.
의도를 자신이 조직해야 진짜다.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혹은 외부와 비교되는 그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
가슴을 뜨겁게하는 명언들이 많이 있어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합니다.
*자기 내부에 두 개의 사건을 가져야 한다.
요 대목을 누가 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평소 여러번 읽은 글인데도 쉽게 와 닿지 않아서요.
두개의 사건 중
하나는 인류전체가 가야할 이상향
또 하나는 인류전체가 가야할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나아가야할 이상향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Be fruitful, multiply(창세기1장 28절 ,킹제임스 버전)
생육하다라는 말은 아기들을 많이 낳아서 키워라하는 의미인데 그런 의미가 아니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라, 꿈을 이루는 삶을 살아라가 맞습니다.
be fruitful은 열매맺는 삶이 맞고 multiply가 생육하는 삶, 자식 많이 낳고 키우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뒤도 오역에 연속인데 땅에 충만하라(replenish the earth)도 애들 많이 낳아 인구늘리라는게 아니라
땅(earth)에 부족한 선(하나님의 기운)의 기운을 보충시켜서 채워넣어서 완전케하라는 의미입니다.
땅을 정복하라(subdue it, subdue earth)도 자연을 개발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흙으로 이루어진 인간 내부의 악을 제어하여 정복하고 무릎꿇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코에 넣으신 하나님의 기운이 있고 허무한 땅의 형상으로 이뤄졌습니다.)
저는 히브리어를 하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자문도 못 뗀 사람이 노자 도덕경에 주해를 붙이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이곳에서 쓸데없는 친절은 베풀지 않아도 됩니다.
의도가 있다는게 중요할 뿐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기독교인은 어차피 이해를 못합니다.
결과는 전과 동.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 어떤 것을 배제한 바깥을 봐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을 본 사람은 끝내 그 어떤 것을 알지 못합니다.
원래 인간의 뇌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엽말단적인 댓글을 써서 죄송합니다.
동렬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예수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찬찬히 긴 시간(1-2년쯤)을 갖고 기다리겠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혹은 외부와 비교되는 그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나시면 아마 아실지도 모를 겁니다.
지금 예수와 하나님으로부터 지배 받고 있는 이상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왜 궁금해하지 않는지 모르겠소.
그 시대를 알면 답은 자연히 얻어집니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은 왕권, 자주권을 잃어버리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식민지 통치를 당하던 시대
(로마가 종주국)
문화, 학술적으로는 그리스가 제패하여 바울 같은 율법학자들도 그리스 이름(파울로스)을 가지던 시대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아람(다마스커스)어
인류문명사 단위로 봐야 뭐가 보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최초로 그리스 어로 대화가 되던 시절이 됩니까?
로마는 서반아(에스파냐) 유럽최서단부터 터키를 너머 유럽 전체 문명권을 아우르고
아랍문명일부에도 영토가 있었습니다.
로마 문명권 내에는 라틴어, 그리스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찬찬히 며칠간 생각해보겟습니다.
꼭 동렬 선생님 말씀이 아니어도 예수 믿는 자는 깊숙히 생각해봐야할 문제 같네요.
깨달음을 주는 명문입니다.~
2013년부더 구조론에 한번 빠지게 되니.. 다른글은 못읽겠네요.~ㅋㅋ
*서프 때부터 글이 참 깔끔하다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후 잊고 지내다가 .. 대부분 논객들이 쓰는 글들은 어수선 하고..
먼가 세상의 원리를 얘기하는 글은 없을까 찾다가 발견했지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