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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의 정답은 물리적인 통제다


    근간에 정조어찰과 영조임금의 승정원일기가 보고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이 음모론매니아 이덕일의 주장과 달리 노론의 음모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조의 잘못된 자식교육 때문에 일어난 ‘무리한 조기교육의 비극’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대개 자수성가한 부모가 자신의 유년시절 개고생과 달리 자식은 호강하며 자라서 나약해졌다고 믿고 잔인한 방법으로 자녀를 닦달하다가, 자녀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내용의 정형화된 스토리다. 문제자녀 뒤에는 문제부모가 있다. 부모가 제 정신이 아닌 거다. 아빠가 미쳤어요.


    지나친 억압과 통제도 나쁘지만 자유방임교육을 빙자한 방치도 나쁘다. 교육은 교육이어야 한다. 농사와 비슷하다. 곡식을 방치하면 죽는다. 자연농법을 한다면서 비료도 주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죽는다. 우선 곡식은 자연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다. 모든 곡식은 인간이 자연의 멀쩡한 풀을 괴롭혀서 열량을 약탈해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들판의 풀은 씨앗에 많은 영양분을 비축해두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인간 좋으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인간에게 유익한 곡식들은 인간이 종자개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만큼 약해졌다. 과도하게 영양분을 비축하는 곡식은 당연히 잡초보다 약하다. 잘 보살펴줘야 겨우 열매를 맺는게 곡식이다. 인류문명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의 인류는 많은 것을 잃었다. 약해졌다. 인류의 유전자는 자동차와 도로와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대비가 없다. 낯선 환경이다.


    인간은 본래의 크로마뇽인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났다. 인류는 적극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방치하면 일베충 된다. 인간의 손을 탄 야생동물은 다시 야생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인류는 스스로 환경을 개조했다. 유전자에 없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말로 갈구는 것은 당연히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녀에게 대항하려는 마음을 심어서 비뚤어지게 만든다. 폭력을 쓰고 매질을 하면 트라우마를 겪어 당연히 비뚤어진다. 국군은 고참이 주먹질을 하고, 미군은 교관이 면전에서 고함을 치는데 둘 다 안좋다.


    물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앞으로 달려가는 소년이 있다고 치자. 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다면? 당연히 우회할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제압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예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학교는 건물이 있고, 교사도 있고, 급우도 있다. 만만치 않다. 일단 건물이 콘크리트다.


    주먹으로 콘크리트를 이길 수 없다. 제압된다. 옛날에는 한 반에 60명씩 있어서 숫자에 제압되었다. 물론 그 숫자 속에 숨는 부작용도 있다. 지금은 한 반에 30여명이 있으니 사고치기에 적당한 환경이다. 교사의 숫자를 늘리든가 시설에 더 투자하든가 물리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이 스물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반말하는 청년이 있었다. 백범의 학교로 보냈더니 하룻만에 해결되었다. 20년간 안 되던 교육이 왜 하룻만에 되었을까? 학생은 고립된 개인인데 비해 학교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제압된 것이다. 개인은 팀에 제압된다.


    시스템은 팀이다. 팀이 학생을 가르친다. 팀플레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교육이다. 주입식 교육은 대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다. 지식은 도서관에 있고 컴퓨터에 있고 인터넷에 있다. 그것을 죄다 긁어서 머리 속에 집어넣어 다닌다면 미련한 짓이다. 하드디스크 낭비다.


    지식은 공공에 있다. 필요한 때 꺼내 쓰는 능력이 진짜배기 지식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이걸 친구에게 물어야 할지, 뉴턴에게 물어야 할지, 아인슈타인에게 물어야 할지 아는게 지식이다. 모른다는 것은 개념을 잡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교육의 첫째는 개념을 잡아서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문제인지 알아채는 것이며, 둘째는 실제로 그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뉴턴 친구와 아인슈타인 친구와 연결되어야 한다. 지식인은 어떻게든 연결된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어 있다. 지식인은 구분이 다르다.


    교육의 목적은 머리 속에 지식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그리고 인류라는 팀 안에서 팀플레이를 하는 자원이 되는 것이다. 시스템으로 해결봐야 한다. 팀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해야만 한다. 팀 안으로 들어섰다면 이미 교육은 완성된 것이다.


    작은 팀 말고 큰 팀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견학을 가야 한다. 연주회나 축제에도 참가해야 한다. 자연에도 뒹굴뒹굴 해야 한다. 인류팀에도 들어야 한다. 스포츠로 팀플레이를 익혀야 한다. 가족을 넘어 초가족을 획득해야 한다. 국가와 인류와 가족먹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까지 포함하여 친구먹어야 한다. 인류문명팀의 일원으로 패스플레이에 능해지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직업교육? 뻘소리는 말자. 교육의 목적은 성실한 일꾼 만드는거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교육이라면 몰라도.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는 취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동창생을 얻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사회 앞에서 자신이 갑이냐 을이냐다. 동창생이 있어야 갑의 지위가 된다. 세상앞에서 당당해진다. 동창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뉴턴 친구와 아인슈타인 친구와 연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인이 외국여행을 갔다고 치자.


    “아 이 쪽바리넘들 요런 식으로 해먹고 있었구만. 야! 요놈들 재주 봐라. 그렇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속여먹어야지.” 이런 마음이 되면 교육실패다. 일체의 대항심리는 못배운 자의 행동이다. 세상을 정글로 여기고, 어떻게든 남을 속이고 빼앗고 등쳐먹어야 한다고 여기는 자들 있다.


    대학을 나와도, 동창생이 많아도 쓰레기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까. 택시기사들이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우는게 몇 푼 벌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외국인은 적, 적은 골탕을 먹이는게 마땅. 오호 통쾌하다.’ 이런 심리다.


    외국인을 타자로 여긴다. 타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이 있다. 그걸 주변에 자랑하고 우쭐대고 큰 공적을 세운듯이 의기양양해 하는 그런거 있다. 시골 사람들 텃세 같은 거 있다. 시골사람은 고향을 떠나는 순간 적국에 온 느낌이 든다. 캐나다 이민간 사람은 캐나다를 적으로 여긴다.


    캐나다의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해서 짭짤하게 챙기자는 얌체생각을 한다. ‘어차피 캐나다는 남의 나라니까. 속이는게 이익이다.’ 이런 심리 있다.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행동이다. 지식인이라도 예외없다. 자신과 타자 사이에 국경이 있다. 그 국경이 어디에 그어졌느냐다.


    배우지 못한 소인배는 그 국경이 좁다. 김우중만 해도 그렇다. 더운 나라에 가서 난로를 팔아먹고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아먹는다며 그걸 자랑한다. 정주영도 별 수 없다. 미군에게 잔디를 심는다고 사기치고 보리를 심어놨다. 겨울에 잔디를 못구했다고. 그걸 자서전에다가 써놨다.


    그런 졸렬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게 교육이다. 김우중과 정주영은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이다. 왜? 배우지 못했으니까. 에스키모에게는 난로를 팔고 아프리카에는 냉장고를 파는게 교육이다. 잔디를 심으라면 잔디를 심는게 교육이다. 인류를 배반하지 말자. 팀이니까.


    명절에 남편은 고향집에 도착하자 마자 훈련장에 온 예비군 마음이 된다. 긴장이 딱 풀려 버린다. 방바닥에 등이 찰싹 붙어버린다. 7살 어린이로 퇴행한다. 반면 며느리는 신병훈련소 끌려온 장정신세다. 기합이 팍 들어가 있다. 근데 남편이 뺀질대는 모습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자기집이냐 남의집이냐는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교육은 지구를 자기집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김우중과 정주영은 배우지 못해서 여전히 지구를 남의 집으로 여긴다. 며느리들은 뻔뻔스러워져야 한다. 내집이라고 여겨야 시어머니의 부당한 명령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다.


    배워도 며느리가 더 많이 배웠다. 배운 사람의 존엄을 과시해야 한다. 쫄리면 지는 거다. 시부모 앞에서 쫄렸다는 사실 자체로 교육받지 못한 증거다. 학교를 왜 다니는가? 쫄지 말라고 비싼 등록금 들이는 거 아닌가? 시부모 앞에서 쫄았다고? 그렇다면 대학교육받은 증거가 없잖아.


    스트레스 안 받아야 교육효과다. 도대체 학교에서 뭐 배웠냐고? 시부모가 예술을 알아? 문화를 알아? 세계를 알아? 역사를 알아? 진보를 알아? 학교에서 영어 수학 배우고 있으니 예술과 문화와 세계와 역사와 진보로 시어머니를 제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교육실패다.


    배웠으면 배운 값을 해야 한다. 시부모도 장인장모도 속으로는 의지할 대상을 찾고 있다. 말이 그렇게 나왔을 뿐 본심은 쫄아 있다. 상대방을 쫄게 만드는 행동이 실은 자신이 쫄았기 때문에 나오는 대항행동이다. 겁먹은 자가 겁을 준다. 사위와 며느리가 의지할 대상이라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며느리가 만만하게 여겨진다면? 속은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당연히 갈구는 거다. 세상을 적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편안한 자기집으로 여기는가? 세상에 온 것이 고향집에 온 것마냥 편하지 않은가? 이건 이념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지식인은 결코 그저 되는게 아니다.


    지식이 책 속에 있는게 아니다. 네트워크에 있다. 자신이 세상의 갑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세상의 룰을 정하는 사람으로 여겨야지만 타자에 맞서 대항하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타자를 부정해야 한다. "네가 이랬으니까 나는 이런다."는 대항의 논리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당신이 언제든 뉴턴 친구와 아인슈타인 친구과 연결이 된다면 그런 마음이 든다. 곤란할 때 즉시 잡스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 천하인의 마음이 된다. 신과 연결되는 직통전화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며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물론 책을 한권이라도 더 읽어야 그런 당당함을 얻게 된다. 알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그대를 당당하게 한다. 그것이 존엄이다. 교육은 존엄의 획득이다. 대학에 가는 목적은 동창생을 얻으려는 것이다. 동창생은 팀이다. 네트워크다. 팀에 속하는 순간 마음은 든든해 진다.


    쫄지 않고 자신이 갑이라는 마음을 먹을 확률이 높다. 동창생 네트워크로는 부족하고 지구와 인류와 역사와 문명과 진보와 친구 먹어야 한다. 예술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즉시 예술과 전화할 수 있고 문화와 카톡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의 중심에 곧바로 쳐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과 관련하여 언급했듯이 자전거는 계속 달려야만 중심을 잡는다. ‘일단 중심만 잡으면 달리는건 쉽지.’ <- 이거 대착각이다. 그 자전거 자빠진다. 랭글리 박사는 비행기가 일단 뜨는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뜨기만 하면 나는건 쉽지.’ 틀렸다. 날아야 뜬다.


    나는 것이 전체이고 뜨는 것이 부분이다. 구조론의 답은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진행이다. 전체는 어렵다. 어려워도 전체를 해야 한다. 자전거가 달리는게 전체이고 핸들로 균형잡는건 부분이다. 계속 달려야 한다. 비행기는 일단 날아야 한다. 멈추면 자빠진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계속 교육되어야 한다. 인류와의 팀플레이를 계속 해야 한다. 그러려면 팀에 들어야 한다. 팀에 들게 하는게 필자가 말하는 물리적 제압이다. 학교에 가면 벌써 학교팀에 든 것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재택근무 확산이 기대에 못미치는게 이유가 있다.


    건물이 없으면 물리적으로 제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건물, 책상, PC들이 물리적으로 갖추어져야 교육은 성공한다. 주입식 교육은 가르치는게 아니다. 지식을 주입할수록 물리적 환경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책에서 발췌된 지식을 주입하려는즉 책과 멀어지고 도서관과 멀어진다.


    책이 100페이지라면 시험에 나오는 알짜배기 지식은 그 중의 10퍼센트다. 벌써 90퍼센트를 잃었다. 책에서 시험답안을 발췌하려는 태도는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수영장에 가지 않으려는 심보와 같다. 자전거 없이 자전거타기를 배우겠다는 수작이다. 그 비행기는 곧장 추락한다.


    보상과 징벌을 매우 위험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국경을 만든다. 시험으로 조지는 것이 최악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국경을 만든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용돈 줄이는건 교육이 아니라 아주 반교육이다. 팀플레이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와 교사를 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팀플레이는 자기에게 공이 자신에게 패스되지 않아도 계속 게임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공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골키퍼가 자고 있으면 안 된다. 호흡이 맞아야 한다. 지식 바깥에 진짜 교육이 있다. 감시나 갈굼질도 나쁘다. 충고도 안 좋다. 진짜 친구에게는 충고하지 않는게 좋다.


    교육은 물리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해야 한다. 그 방법은 낯선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며, 가장 좋은 것은 위대한 인물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존경할만한 사람과 만날 때 인간은 변한다. 인격적으로 제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교육은 인격이 높은 사람을 붙여주는 것이다.


    교사가 친부모보다 인격이 높다고 여겨질 때 학생은 제압된다. 미녀를 만나면 남자는 긴장한다. 여친을 만나면 이미 남자는 물리적으로 제압되어 있다. 공간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 공존의 공간 안에서는 팀플레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친이 화장실에 가면 올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 먼저 갈게.’ <- 진미령 놔두고 먼저 가버리는 전유성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팀플레이를 하도록 하는게 물리적 제압이다. 이것이 교육이다. 환경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낯선 환경 속으로 계속 들어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전에서 얼쩡대지 말라.


    그 속으로 깊숙이 투하되어야 한다. 수영을 배우려면 코 쥐고 물 속으로 텀벙 다이빙해야 한다. 물가에서 얼쩡거리며 동작을 익히는 식으로는 끝내 수영을 배우지 못한다. 수영은 잠수부터 시작해야 한다. 잠수하면 본능적으로 호흡을 익히게 되고 호흡을 익히면 헤엄은 자동이다.


    수영은 머리로 배우는게 아니라 온 몸의 세포가 물과 친해지는 것이다. 물과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물을 즐기는 것이다. 음악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야 음악이 배워지고 도서관으로 풍덩 뛰어들어야 진짜 지식이 들어온다. 자신에게 필요한 엑기스만 빼먹겠다는 얌체교육은 사기다.


    어떤 1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그 1을 버려야 한다. 나머지 99를 제압할 때 1은 자연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게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필요한게 내게 들어온다. 결을 따라가는 것이 교육이다. 내가 선택하게 하면 이미 실패다. 공이 내게로 오면 그 패스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면 교육실패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패스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교육은 환경과 친구와 자연과 인류와 모두와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환경과 친구와 자연과 인류와 모두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모두를 도와야 한다. 인류는 멀리 와 있다. 이 길을 가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짐승으로 태어나지만 교육에 의해 비로소 인간으로 거듭난다. 교육은 시스템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며 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교육의 실패는 작은 팀에 들어 큰 팀을 부정하는 것이다. 가족팀에 들어 국가팀을 부정하고, 국가팀에 들어 인류팀을 부정하는 식이다.


    풍덩 뛰어들지 않고 물가에서 깔작거리기 때문이다. 풍덩 뛰어드는 것이 물리적인 통제다. 진리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비행하려면 깨지더라도 일단 공중에 날아야 한다. 먼저 뜬 다음에 날겠다는 마음을 먹으므로 날지 못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반드시 실패한다.


    수신한 다음에 가족 챙기고, 치국한 후에 평천하 노리는 자는 영원히 천하에 이르지 못한다. 결코 천하인이 되지 못한다. 중간단계는 없다. 진리의 중심, 인류의 중심, 진보의 중심으로 곧장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과의 직통전화를 연결하고 난 다음에 가족과 국가를 챙겨라.


   DSC01488.JPG


    야구선수는 사전에 정해둔 대로 약속플레이를 합니다. 희생타를 칠까말까 망설이면 안 됩니다. 내가 머리를 굴려 판단하면 안 됩니다. 정해져 있는 길로 가는게 교육입니다. 모든 결정은 상부구조에서 일어납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게 아니고 학교에 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상부구조에 들어야 합니다. 팀에 들어야 합니다. 진리에 들어야 합니다. 풍덩 빠져보십시오. 


[레벨:10]다원이

2015.10.04 (01:28:10)

제목 보고 놀라고, 내용을 읽고는 한번 더 놀랐습니다~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15.10.04 (02:50:20)

한국교육의 돌파구 혹 해결책은, 한국호가 세계에서 어느 위치에 처해있는냐에 달렸죠. 


유럽배낭여행처럼, 일본, 중국, 러시아 배낭여행이 시급합니다. 러시아는, 유럽통이라, 기차로 연결되는데, 중국은 아직 머네요. 서해의 항만들이, 유럽 지중해의 항만들처럼,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오가는 항구로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요. 그러려면, 당연히, 표값도 올라가야할겁니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좀 미지수.


러시아쪽은, 동러시아는 서러시아 혹은 중러시아와는 좀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일종의 기지화된 도시들이 흩어져있는 형태. 신의주쪽 고속도로 뿐아니라, 나선쪽 철로도 구상해야할 때입니다. 밖으로 부단히 안내보내면, 안에서 퇴화되어서 일베충화를 어쩌지 못합니다.


미국도, 히스패닉계들과 아시아 인구유입이 주는 문제보다, 얻는 이득이 크다는걸 지식인층들이 깨달아서, 유화조절적인 이민정책을 쓰는거 같더군요. 현재는, 전산화된, 이민자료로, 불체자들 마구마구 잡아들이는중. 선거전까지는 그럴거 같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형비

2015.10.04 (10:27:01)

정말 좋네요~~~
[레벨:1]zoonme

2015.10.06 (15:06:02)

항상 동렬님의 모든 글에서 큰 배움을 얻고 있지만, 오늘은 배움에 더해 큰 희망, 큰 위로까지 얻습니다. 더불어 못난 부모란 반성과 자각도 새삼 얻어갑니다. 동렬님의 글을 보고 제가 부모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걸 생각하니 너무 뿌듯합니다. 좋은 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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