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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657 vote 0 2015.10.08 (19:05:01)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문제에 분명한 답이 있다.’ 구조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 말 앞에서 당황한다.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답이 있다. 진리가 있다. 상식이 틀렸다. 글자 배운 사람이라면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사실이지 학문의 역사는 상식이 뒤집혀 온 역사라 하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조설과 자연발생설이 상식이었다. 밀가루를 헝겊으로 덮어 놓으면 쥐가 발생한다. 실험으로 증명한다. 다들 납득하고 수긍한다. 파스퇴르가 나서기 전 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식은 정밀한 시스템이라서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운 약점이 있다.


    그래서 구조론이 있는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은 망원경으로 보고, 작은 것은 현미경으로 보는데 등 뒤는 못 보는게 인간이다. 기본적인 것을 잘 못한다. 기본은 진리다.


    진리를 부정하는 태도가 불가지론이다. 기독교의 창조설 영향을 받은 서구가 수학의 엄격함을 앞세워서 진리를 긍정하는 편인데 비해 도교의 상대주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는 불가지론에 오염되었다. 불교도 원래 진리를 긍정하는데 도교영향을 받은 선종불교는 그 반대다.


    손자병법의 꼼수주의가 한중일을 버려 놓았다. 불가지론의 극복이 구조론의 첫 문턱이다. 그 문턱을 과감하게 넘어야 한다. 진리는 있고, 인간이 그 진리를 알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이 입장에 서야 한다. 먼저 자세교정이 필요하다. 똑바로 서야 똑바로 보인다.


    불가지론 3원칙이 있다. 이 세 가지를 반대한다. 진리는 없고, 설사 있다해도 알 수 없고, 설사 안다 해도 이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불가지론의 딜레마다. ‘설사 있다 해도.’ 하고 말끝을 흐린다. ‘진리는 절대로 없다.’고 말하면 바로 그것이 명확한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진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애매하게 말해야 불가지론에 맞는 어법이 된다. 불가지론은 ‘알 수 없다’는 입장인데 알 수 없다면 모르는 거고, 모르면 닥쳐야지 왜 말이 많은가? 부정어법의 한계다. 마이너스를 마이너스 하면 플러스가 되므로, 마이너스를 세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이는 언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이다. 글자 배운 사람의 태도가 이러면 못 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그렇다면 왜 불가지론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을까? 지식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누어 차별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지식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간다. 다만 외부로부터의 위기에 인간을 구하는게 지식이다.


    진리는 있다. 진리가 있다는 것은 세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진리가 없다는 입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이는 원자론의 폐해다. 두 원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알아도 겉을 알 뿐 그 속까지 알 수는 없다.


    문제는 무엇이고 답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문제와 답은 대칭되어 있다.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말은 문제가 답과 대칭될 때 문제로 성립한다는 말이다. 답과 대칭되지 않은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대개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 문제를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했다면 답은 이미 찾은 것이다. 문제를 뒤집으면 그게 답이다. 진리가 있다는 말은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그 관계가 대칭관계이며 문제와 답이 대칭구조라는 것이다.


    빅뱅에 의해 우주는 한 점이었으므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인류가 진화했으므로 아담과 이브로부터 모두 연결되어 있다. 존재는 알갱이가 아니라 사건이므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사건은 불씨처럼 번져간다. 최초의 작은 불씨로부터 들판의 큰 불까지 사건으로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진리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수학적 사유가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이 그 연결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애매한 부분도 있다. 그 부분은 확률로 해결하면 된다. 만약 정확한 답이 없다면 정확한 답이 없다는 정확한 답이 나와버린 것이다.


    불가지론도 세상이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관계는 애매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관계야말로 불가지론과 입장이 같다고 여긴다. 이는 구조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야말로 명확한 것이다. 애매한 관계는 확실히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학이다.


    부모와 자식이 둘 다 잘못했다면 부모가 잘못한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둘 다 잘못했다면 여당이 잘못한 것이다. 관계에는 권리가 작동한다. 사건의 에너지 메커니즘으로부터 연역되는 권리로 보면 정확한 판정이 가능하다. 권리는 에너지 공급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물론 애매하게 무승부로 판정해야 할 때도 있다. 이 때도 명확하게 무승부라는 정답을 내려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관계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명확하게 판단이 된다. 왜냐하면 관계의 자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상한 것이 있다. 그것이 관계의 자궁이다. 사거리의 신호등과 같다. 진행도 아니고 멈춤도 아닌 거기서 진행과 멈춤을 정한다.


    O도 아니고 X도 아닌 반도체가 O와 X를 정한다. 세상은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애매한 것이 아니다. 결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바로 거기서 정한다. 예술작품에 비유할 수 있다. 하수의 문학은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간다. 선의 승리와 악의 패배로 정해져 있다.


    명확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는다. 세상은 영화와 달리 선의 승리가 아니다. 이명박의 승승장구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보자. 이명박이 악인이 된 사실 그 자체로 그의 실패다. 악당은 악당이 되었을 때 심판 받은 것이며 선인은 선인이 되었을 때 이미 보상받았다.


    이명박이 안 된게 얼마나 다행인가? 이명박을 질투한다면 이상하다. 금이 똥을 질투하는 셈이다. 중수의 문학은 고수와 하수의 대결구도로 간다. 무엇이 다른가? 판단기준을 드러낸다. 하수의 선악구도는 판단기준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춘향은 착하고 변학도는 나쁘다고 못을 박아놨다.


    의외로 착한 변학도일 가능성은 허용하지 않는다.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가면 전복이 일어난다. 주인공이 악당일 경우가 많다. 주인공이 은행털이로 나오기도 한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주인공이 무법자다. 판단기준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이 이겨야만 하는 구조다.


    계략을 계략으로 꺾는다. 그런데 일단 계략을 제시해야 하므로 주인공보다 악역이 더 부각된다. 고수의 문학은 합리주의와 부조리의 대결이다. 김기덕과 홍상수에게 그것이 있다. 의외성, 돌발상황, 감각이입이다. 그래비티가 성공했다. 거기에는 악역이 없고 계략이 없고 승부가 없다.


    매드 맥스도 선과 악이 없는 공간인데 매끄럽게 가지 못하고 결국 선과 악의 대결로 퇴행하고 말았다. 인터스텔라도 비슷한데 결국 선악구도로 가버렸다. 이번에 개봉하는 마션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악역이 없어야 명작이다. 지옥의 묵시록도 누가 악역인지 불분명하다. 악역같은데 악역이 아니다.


    베트콩이 악당이라는 통념과 맞선다. 우리는 합리성의 편에 서서 일체의 부조리와 비합리와 돌발상황과 난폭한 환경에 맞선다. 선악구도가 아니며 지략대결이 아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어 간다. 그래비티의 우주나 마션의 화성에는 법이 없고 규칙이 없고 정의가 없고 선이 없다.


    바로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제멋대로 만드는게 아니고 진리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지론에 서는 이유는 개척시대의 서부와 같이 법이 안 통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정의도 없고 법도 없는 곳이 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진리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그 진리로 선과 정의와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내게 그것을 정할 권한이 있느냐? 있다.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없고 질서가 없고 선이 없다면 진리가 호흡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말라. 좌절하지 말라. 부정어법으로 퇴행하지 말라. 아무 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신천지야말로 우리에게 기회다.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 우주는 그러한 원리로 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양자단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리가 있으므로 가능하다.



   DSC01488.JPG


    문제가 있다면 당첨된 복권을 주운 셈입니다. 답은 분명히 있는데 문제의 맞은 편에 있으므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셈이며, 내게 그 임무가 주어졌다면 월드컵 대표로 선발된 셈인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가 없다는 말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부조리하지만 오히려 그러므로 유쾌합니다. 내게도 남은 임무가 있다는 의미니까요. 규칙은 당신이 정해야 하며 진리가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무득

2015.10.09 (06:41:58)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정의도 없고 법도 없는 곳이 있다. ]

 

참 자유란 인간 사회 관계속에서 내 마음데로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주지 않는 것이고,

정의란 시비를 떠나 판단하고 행동해도 늘 마땅함이 있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참 좋은글 감사합니다.

[레벨:11]큰바위

2015.10.09 (07:57:48)

진리를 알면 자유롭습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원래부터 존재하는데 자기가 못보니까 없다하는 거죠.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자기가 못보니까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레벨:11]큰바위

2015.10.09 (08:00:01)

처음에는 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진리 탐구에 대한 관심을 조금 보였습니다. 


지금은? 무슨 얼어죽을 진리~ 

진리는 개뿔.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기껏 공부를 초코파이 하나로 바꾸어 버리고, 

공부를 취업도구정도로 여기는 판에, 

진리는 개뿔....... 


정작 학문하는 곳에서는 진리에 관심이 없으니, 

에먼 곳에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게다가 가짜들이 면허걸고 설치는게 현실입니다. 


진리는 매일 삶 속에서 터특하는 것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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