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적으로 보자면 질이 입자를 결정하는 것이지, 입자가 또 다른 입자를 지명해서 '니 나랑 한판 하자(대칭 세우자)' 식으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비유하자면 사실 질이 둘을 부추긴 거다. 질이 주체이고 입자가 대상인 것이지, 입자가 주체이고 또 다른 입자가 대상인 게 아니다.
입자가 쳐들어왔을 때 입자로 맞대응 해봤자 힘대칭으로 진행되는 방향성까지 꺽진 못한다. 입자대칭을 결정하는 질에 대한 통제권을 미리 쥐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가둬두어서 계를 지정할 수 있는 만큼 그 다음단계를 써먹을 수 있다. 지구와 태양이 공간에 가둬지자 태양의 광자와 지구 간 입자대칭이 섰다.
광자의 충돌은 힘대칭을 낳는 식으로 엄청 오랫동안 이러저러한 하부구조의 맞섬으로 진행되면서, 태양계는 생태계로 진행했다. 자원이 우리를 쓰는걸까 우리가 자원을 쓰는걸까? 둘 다 틀리고 우리와 자원은 단지 대칭 세워질 뿐이며 이러함은 그 전 단계가 촉발시킨 것이다. 혹한의 날씨가 장작과 원시인을 맞서게 한다.
오지의 굶주림이 멧돼지와 원시인을 맞서게 한다. 우리와 환경은 서로 살아남고 싶어서 맞서는 게 아니다. 그냥 할 줄 아는 게 맞서는 거 밖에 없으니 맞서는 거다. 일단 맞서고 보는 것이며 맞선 순간 무조건 죽은 것이며 다만 대칭은 다음 단계의 대칭을 낳는다. 멧돼지와 원시인이 맞선 시점에서 두 개의 입자는 다 죽은 것이며 대신 힘이 낳아진다.
멧돼지와 힘으로 싸워 사람이 살아남은들 이 사람이 그 전이랑 같은 존재일까? 그저 산이라는 생태계가 다음단계로 진행된 것 아닐까? 생물 종이 환경에 아무리 열심히 맞서봤자 다음 단계는 생태계의 진화이다. 어차피 뭘 안 해도 비존재이고 뭘 해서 이기든 지든 다음 존재로 변화한다면, 차라리 그 진행경로를 알아내고서 전체의 진행속도를 높이는 게 낫지 않을까?
상호작용의 루트는 질대칭 단계에서 이미 결정되어버리는 것이므로 계설정을 통제해야 한다. 우선 입자는 입자가 아니다. 우리가 입자를 생각하는 건, 맞대응 한 힘으로부터 각을 세울 타자의 정체를 추론하는 것이다. 힘과 마찬가지로 입자는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며, 입자를 나은 질 역시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구조는 사건의 구조인데 해당 사건의 원인이 계속 촉발된다면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그게 우리 눈에 딱딱한 구조로 보이는 것이다. 즉 구조는 사실 혼자 띡 있을 수 없으며 사건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한싸이클의 원인인 불균일이 지속적으로 촉발되는 것이다. 이는 뭔가가 대신 소모됨으로서 유지가 된다.
구조론연구소의 대표적인 예시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한 싸이클만 보면, 처음에 들어올린 다리의 위치에너지가 쥐어짜내지는 것이다. 그런데 투수가 공을 계속 던지고 있으면 '저거 투구머신이네' 싶게 구조로 보이는 것이며, 그건 그 사람의 생체에너지가 대신 고갈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나빠지는 걸까?
투수가 공을 안 던지더라도 귀차니즘이 빈둥빈둥 하면서 그 사람의 에너지를 뽑아다 쓸텐데, 차라리 야심이 그 사람의 몸을 장악해 훈련함으로서 프로가 되는게 낫지 않을까? 태양이 깨져가며 생태계를 낳고 또 먹여살리고 있는데, 생태계가 태양을 아껴먹고 있자면 태양이 좋아라 할까? 우주에선 먼저 깨먹는게 임자다.
지구가 운석을 맞아 깨지나 생물에 의해 깨지나 어차피 깨진다. 운석 핑계대고 막 살자는 말이 아니다. 거꾸로, 다가올 운석하고 맞짱을 뜰 야심을 세워보고 추진하는게 낫다는 말이다. 어차피 밥을 얻어먹어야 하며 또 조달한 에너지를 통제해서 써먹어야 하는게 우리의 숙명이라면, 까짓거 밥을 더 달라고 졸라야 한다.
처음엔 똑같이 밥먹여서 키우기 시작한 새끼새들 중에서도 더 달라고 보채는 녀석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먼저번 얻어먹은 쌀밥으로 힘을 내서, 쌀농사를 짓는 즉 우리를 먹여살리는 계의 규모를 확장시킬 수 있다. 물론 이쪽 계의 성립규모가 커질수록 다른 쪽에선 닫힌계 성립의 가능성이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닫힌계-외력' 조건의 촉발이 한번 뿐이라면, 질은 제 몸을 깎는 수 밖에 없는 게 사실이긴 하다. 에너지가 내부적으로 소모되다가 끝나는 건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부구조인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대신 죽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신규 사건이 지속되면 구조가 살아남는 것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크게보면 전체 에너지는 소모되고 있는 거다.
다시 멧돼지와 사람이 산이라는 생태계에 가둬진 상황을 생각해보자. 멧돼지와 사람이 조우한 것은 산이 둘을 가두는 판으로 깔렸기 때문이다. 원래 멧돼지와 사람은 하필이면 서로에 대해서 만큼은 마주치기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배고픈 와중에 마주쳤다면 물은 엎질러 진 것이며 서로 힘을 겨룰 수 밖에.
둘 중 누가 이기든 산 속에서의 이러한 사건은 다른 명찰표를 단 입자들 간에 거듭 반복된다. 그래, 태양이 빛을 쪼아주고 구름이 비를 내려주어 산을 먹여살리는 한에 말이다. 여기서 어떠한 대항심을 키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만 사람이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멧돼지와 합의보고 함께 단식하며 태양에게 시위를 할까.
어차피 이런 식으로 우리 몸을 식량 삼아 갉아먹을 것이 아니라면, 얻어먹어야 할 밥을 더 달라고 해야한다. 태양이 주는 밥은 똑같은데 어떻게? 아니다, 잘 보면 태양이 퍼주는 주걱에서 우리는 밥 한톨 정도 밖에 못 얻어가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왜냐면 입이 작으니까! 입을 벌려서 다른 데로 새어나가는 태양빛을 우리 쪽으로 돌려야 한다.
어차피 사막에 태양에너지가 전달되어봤자 모래덩어리는 게으르고 무심하므로, 태양의 마음이 배달되지 않는다. 밥맛을 봤으면 잘 먹었다고 호응을 할 수가 있으며, 이는 다음 번에 먹을 때 곱배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더 달라고 하는게 상호작용이 유도되는 계를 넓히는 것이며 이것이 진보이다.
경제규모를 늘리자고 밭을 늘려 갈더라도 밥심으로 가능하니, 하루 세끼 식사와 그의 소화는 유지해야 한다. 쌀을 먹는 사람은 질입자힘운동량으로의 내부 진행을 멈추어선 안된다. 밭만 더 갈자는 게 보통 진보이고 먹은 것만 가지고 아껴서 찔끔찔끔 소화시키는 게 보통 보수이며, 둘다 놓치지 않고 구조의 세력을 넓혀 우주의 주도권을 점점 접수해나가는 게 진짜 진보라 하겠다.
일반적인 보수가 보수한다고 혹은 일반적인 진보가 진보한다고 지혼자 쉬히 죽지는 않겠지만, 진보-보수가 같이 움직이는 형제단에게 그 세력을 빼앗겨 죽는다. 닫힌계를 걸어 질을 조달해주는 우주의 입장은, 더달라고 하는 쪽에 몰빵해주며 뿌듯해하는 것이니 신과의 일대일은 그러한 부자관계의 인정이다. 관성력이 걸린 구조 중 이러한 친함을 인정한 세력이 널리 퍼져왔다.
우리가 뻐팅기지 않고 대신, 참가된 상호작용을 가속시킨다면 주최측의 게임을 한단계 진행시킬 수 있다. 다만 그러던 와중에 잠시 멈춘 다음, 연역을 심도있게 한다면 상호작용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수도 있다. 주최측의 판을 넓히자는 것은 주최의 주최측에서 서는 것이다. 마냥 판에서 가부좌 틀고 있는 것도 안 되고 판이 돌아가는 원리를 체감해서 그를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밥을 먹어서 얻은 기운을 이용해 밥을 더 달라고 꽥 소리 지르기다. 기존에 퍼주던 밥도 편식하는 구조는 스스로 소모해 삐쩍 말라지니, 스쳐지나가는 다른 구조에게 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