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와 살, 절대성과 상대성.
운전자에게는 절대성이 보이고 관전자에게는 상대성이 보인다.
상대성을 버리고 절대성의 관점을 취득할 때 운전할 수 있다.
옷이라면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색은 상대적이지만 사이즈는 절대적이다. 사이즈가 안맞으면 못입는다.
집단이라면 이런집단이든 저런집단이든 명칭은 상대적이지만 집단의지는 절대적이다. 공동의 의지가 있다.
기계라면 이런기계든 저런기계든 기능은 상대적이지만 동력은 절대적이다. 동력원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기둥이라면 형태와 재료는 상대적이지만 지붕하중의 분산은 절대적이다.
절대성은 관계에서 성립한다. 만남 혹은 결합에서 사건이 촉발되고, 에너지는 마이너스된다.
운전자에게는 최초의 에너지 획득과 그 에너지를 시간과 공간에서 풀어내는 조절장치를 획득하는것이 중요하다.
정치라면 이미 있는 집단의 의지를 온전히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없는 의지를 만들 수는 없다.
관전자에게는 세상은 확률이지만 운전자에게는 에너지 우위만 이루면 이기는 게임이다.
기를 촉발하고 승전결을 끌어 낼수 있을 때, 사건자체의 완결도만이 문제가 된다.
예술가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낼 때, 신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철학이라면 입으로 떠드는 것은 개소리고, 실제로 에너지우위를 이루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된다.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던 무엇을 생각하던, 에너지우위로 상황에 맞대응 한다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최종적인 해결책은 개인에 없고 집단에 있다. 집단에 없고 대집단에 있다. 에너지 우위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업을 해도 법률에 통제 받고 법을 지켜도 민심에 얻어맞는다. 기승전결의 전단계에 통제권이 있다.
전단계의 전단계의 전단계까지 해결하고 와야 뭐라도 된다. 예컨대 대학이라면, 대학의 설립에서
해체까지가 한싸이클이고, 그이전에 사회에 필요한 인적자원의 수요가 한싸이클이 있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의 생활이 한싸이클이 된다. 사업이라면 시장의 변화가 한싸이클이고, 내가 사업체를 만들어서 굴리는게
한싸이클이고, 고객의 소비문화가 한싸이클이 된다.
이런 상대성 저런 상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성의 렌즈를 통과한 상대성만이 존재한다. 상대성은 바운더리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런색 저런색이 있는게 아니라 가시광선의 바운더리 안에서만 색이 있다.
선풍기의 미풍을 누루면 미풍이 나오고 강풍을 누루면 강풍이 나온다. 미풍선풍기 강풍선풍기 따로있는것이 아니다.
동력을 약하게 풀어내냐 강하게 풀어내냐다. 집단의지를 대표하면 리더다.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집단의지를 이렇게 풀어내냐 저렇게 풀어내냐 조절할수 있다.
기계장치는 대부분 동력원의 방향과 순서를 조절하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착각은 당연히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나온다. 예컨데 주먹을 세게치려면 지구를 밀어서
체중의 반동을 끌어내야 한다. 정치라면 집단의 결성되는 지점을 탐구해야 한다. 이미 있는 것을 이용하려고 할때부터
약자가 된다. 후발주자에게는 권한이 없다. 인생을 이해하려면 사회를 만들어보면 된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자연을 만들어 보면 된다. 인간이든 사회든 생태계든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리학의 발전이
산업의 형태를 만들고 산업의 형태가 삶의 형태를 만든다. 벗어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