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을 의심하라
인간에게 확률은 헷갈리는 것이다. 근데 인간은 상당히 확률적인 사고를 한다. 그래서 더 헷갈린다. 이 모든 혼란은 주사위 때문이다. 본래 확률은 15세기 유럽에서 도박과 주사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학문이다. 결론부터 말한다. 윷이었다면 확률의 개념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윷은 상대적으로 룰의 문제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면이 나왔을 때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윷은 다르다. 앞이냐 뒤냐를 두고 멱살잡이가 성행한다.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담요를 깔았기 때문이다. 윷의 모양이 애매할 때 담요를 치는 놈이 꼭 있다. 이는 분쟁으로 이어지므로 규칙으로 막아야 한다. 모든 게임에는 룰이 있으며 변한다. 매년 피파는 반칙을 재규정한다. 축구공의 탄성도 바꾼다. 관객을 낚는 방향이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룰을 건드릴 수 없다. 룰을 건드리는 것은 오로지 주최측이다. 직접 게임을 하지 않는 자가 룰을 정한다. 게임의 이중 구조다.
주사위는 윷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쟁이 적다. 물론 주사위도 담요 위에서 굴리면 다르다. 하지만 면을 6개나 깎아놓은 바람에 시비가 적다. 면이 좀 더 확실하게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실성은 오히려 게임의 본질을 깨닫는데 방해가 된다. 윷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존재를 잘 느낀다. 하지만 주사위는 심판이 필요 없다. 사람들은 주사위의 결과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과 아우는 장남감을 서로 자기것이라고 싸운다. 둘의 싸움은 결론이 나질 않는다. 나의 부모님은 빤쓰만 입혀 내쫓았다. 그리고 장남감은 버려졌다. 좋지 않은 훈육법이다. 센스있는 부모라면 둘이 협력하도록 외부에 적을 두는 식으로 게임을 재구성했을 것이다. 빈도주의자와 베이즈주의자가 싸우는 이유도, 몬티홀 문제에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 진영이 치고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떤 둘이 싸우고 있다면 보나마나 둘 다 옳은 것이다. 그러니깐 더욱 격렬하게 싸운다. 서로 납득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술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베이즈주의 형은 연장자우선 규칙을 따르고, 빈도주의 아우는 연하자우선 규칙을 따르고 있다. 각자 부분적으로 맞고 전체로는 틀린다.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부모의 관점은 다르다.
몬티홀 딜레마가 이렇다. 몬티홀 문제는 사회자가 문을 연 행위가 내 기회의 플러스인지, 판의 마이너스인지를 사람마다 다르게 규정(전제)하여 생긴 딜레마이다. 문짝은 죄가 없다. 진술은 문을 연 행위이며, 전제는 플러스냐 마이너스냐이다. 베이즈 공식에 대해서도 빈도주의자는 판을 바꾸지 않고 이해(최우추정법, 역확률)하므로 절대성을, 베이즈주의자는 판을 갱신(사후확률)하므로 상대성을 우긴다.
(이는 베이즈 공식 해석에 대한 상대적 포지션이 그렇다는 거다. 보통 빈도주의자는 유의성 검정을 하지만, 베이즈공식을 사용하는 최우추정은 빈도주의자인 피셔(배신자)가 만들었다. 참고로 게임이론(계의 상대성)과 관련있는 튜링(폰노이만의 제자)은 베이즈주의자였다. 그리고 보통 머신러닝에서는 두 개념이 학습과 판정에서 모두 쓰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계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나의 승률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부분적으로 둘의 합은 1이다. 확률이니깐. 구조론에서 질입힘운량의 연쇄를 확률용어를 사용하자면 조건부 확률의 연쇄이다. 그리고 조건부확률은 각 단계의 합이 1이다. 다시 말해, 트리를 그리되 5단계로 진행되고, 각 단계의 가지가 가지는 합은 각각 1이라는 말이다. 부분적인 1이 다섯 번 반복된다. 작은 계가 다섯 번이다. 물론 모든 트리의 총합은 1이다.
도박으로 비유해보자. 도박에서 모수의 크기는 관점의 단계마다 다르다. 빈도주의자는 이게 변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거고, 베이즈주의자는 딜러(상대)에 따라서 다르다고 우긴다. 스포츠에서는 하위팀이라도 궁합이 있다. 꼴데도 누구한테는 강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롯데의 실력은 정해져있어 시즌이 끝나면 롯데는 결국 꼴찌가 된다. 구조론은 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는 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것이다.
도박이라면 주최측이 이 역할을 한다. 우리는 도박룰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하지만 블랙잭만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도박룰이 주최측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카운팅 때문에 그렇다고. 주최측의 입장에서 고민해보자. 도박판은 호구와 딜러가 있어야 굴러간다. 주최측이 호구를 꼬시려면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야 한다. 가끔 잭팟이 터져야 한다.
"승리"라는 개념도 이렇다. 우리는 정의justice가 규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의는 원래 고무줄이다. 90년대에는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심지어 더 아재들 얘기를 들어보면 버스에서도 피웠다더라.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술집에서도, 피씨방에서도, 심지어 담배의 성지인 당구장에서도 피울 수 없다. 그래서 당구장이 망하고 있다. 이제 흡연자는 사회의 악이다.
주사위로 돌아가보자. 주최측은 주사위의 눈을 무엇이라고 하는 정의definition를 바꾼다. 윷을 던지는 방법을 정해놓는다. 주최측은 곧 관객이며, 플레이어간 승률이 공평하도록 규칙을 만든다. 그래야 명절에 친척이 모이기 때문이다. 반면도박장이라면 승률이 딜러에게 대개 유리하도록 규칙을 만든다. 물론 이 규칙은 교묘하다. 겉으로는 공평해 보인다.
1) 빈도주의 호구는 운이 나빠서 돈을 잃었다고 믿고, 2) 베이즈주의 딜러는 호구에 따라 다른 전술을 사용하고, 3) 구조주의 운영자는 딜러(승자)와 호구(패자)의 밸런스를 조정한다. 딜러가 주로 따지만, 가끔은 호구도 딸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한다. 그래야 호구짓을 계속 하니깐. 롯데도 가끔은 이겨야지. 하지만 운영진이 돈을 벌어야 도박판이 유지될거 아닌가.
천재수학자들이 몬티홀 문제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 세기의 천재 폰 노이만도 게임이론에서 그쳤고 인공지능의 딥러닝도 이 지점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다. 라벨(인식할 사물의 이름, 정답)과 피쳐(사물의 특징)를 규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일반성만 취하고 특수성을 적용하지 못한다. 이제 확률을 구조론이 재정의 한다. 그것은 승리의 확률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승리의 의미를 조정하는 것이다.
1) 재벌가에 태어나서 계열사 사장 한자리 할 확률...
2) 회사에 입사해서 인간관계 유지하면서 열심히 일해서 승진하여 사장이 될 확률...
3) 스타트업 하는 친구들 그룹에 속해서 창업해서 사장이 될 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