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고프면 밥을 먹듯이, 이념도 꼬박꼬박 먹어줘야 한다. 왜인가? 인간은 집단속에서 벗어날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집단의 수준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배가고픈 인간은 불량식품을 먹기 마련이고, 사회가 고픈 인간은 집단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기어이 배탈이 나고, 기어이 엮여버린다. 역사의 모든 변화는 리더와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적 호응에 의해 탄생한다. 나아가 집단을 운전하려면 이념의 공급자가 되야한다. 역사란, 문명이란, 사회란 그렇게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에 의해 연출된 사건이다. 독립이 그렇고, 민주주의 또한 그렇다. 드높은 이상을 가진 수준높은 집단에 속해야 한다.
인생은 결국 자기 관성을 쓰거나,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거나, 집단의 관성을 쓰거나이다. 자기 관성을 쓰는 즉 약해진다. 만만한것을 찾게된다.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려면 상대방을 잘 만나야 한다. 좋은 라이벌을 두어야 한다. 집단의 관성만이 환경을 이길 수 있다. 역사가 있고, 계통이 있고, 후배가 있다. 문명이야 말로 집단의 관성에 의해 연출된 사건이다. 방향성이 있고 가속도가 걸려있다. 인간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역할뿐이고 그 역할은 문명이라는 사건의 에너지가 흐르는 통로일 뿐이다. 그게 인생이라는 놈의 전모. 부모는 자식을 연출하고 사회는 인간의 삶을 연출한다. 인간은 문명을 배달받고 문명을 배달한다. 대승의 의미는 사회의 진보라는 사건의 에너지 흐름속에 있다면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역사를 공부한 사람만이 삶의 의미를 알수있다. 치명적이다. 왜 바이블은 역사서일까? 집단의 관성속에 가두어질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역사도 사건이고 문명도 사건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관점이 문제가 된다. 문명이 타자인가? 그렇다면 손님노릇이 자연스럽다. 타자가 아니라면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 역사에게 부여받은 내 미션이 있고 또한 후배에게 전달해야 한다. 얻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초대한사람을 찾아헤메는 것이 어색하다. 주인눈치 보며사는 것이 어색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