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건 밖에서 바라봄으로서 자기자신과 사건을 대칭시킨다. 이때 기계론적 인과율이 적용된다. 내부의 의사결정이 보이지 않는다. 사건안에는 상호작용의 인과율이 있다. 조절장치를 얻을 수 있다. 외부세력의 침입에 하나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국가란 없다. 이때 외부세력의 입장에서는 대항하냐 안하냐의 문제가 특정 국가의 존재여부가 되며, 얼마나 대항하냐를 그 국가의 성질로 인식하게 된다. 남미인들은 게으르고, 유대인은 어쩌고 하는 입자적 사유가 그러하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면 집단의 결속력을 조절할 수 있다. 어떤 조직이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였느냐가 조직의 결속력을 결정한다. 가족은 오랜시간 호르몬을 공유하였으므로 결속력이 남다르다. 전우라도 마찬가지다.
생판남이라도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 이어진 정도는 어떤사건이냐에 따라 다르다. 길거리의 남이라도 한일전때는 어깨동무가 된다. 국가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단위의 사건이 반발하면 문득 인류가 공동운명체임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게 연결되 있었던 것이다. 아기곰은 엄마곰과 연결되 있고, 부자집 망나니는 든든한 빽이있어 사고를 친다. 보이지 않게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다. 대통령도 지지율이 높아야 신이나서 정책을 추진하고, 지지율이 낮으면 할 수 있는게 없다. 연예인은 팬을 의식하고, 작가는 독자를 의식한다. 집단이 상부구조가 개인은 하부구조가 된다. 파이프의 입구와 출구와 같다.
문명이라면 집단의 조직 자체가 에너지 입구가 되고 집단을 일시킨 결과물이 출구가 된다. 핵심은 의사결정구조다. 집단은 과연 긴밀하게 조직되 있는가? 집단적 의사결정이 가능한가? 유대인의 탈무드나 유교문화나 집단적 의사결정의 메뉴얼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다인종국가도 원래 타인종끼리 뭉치는게 잘 안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절장치를 획득한다면? 도구를 얻는다면? 집단을 긴밀하게 만들수 있다. 집단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의 문제는 곧 운영측이냐 대상측이냐의 문제, 주체와 타자의 문제가 된다. 핵심은 도구다. 도구가 있어야 일 시킬수 있다. 관점이 도구가 될 수 있다.
주제넘지만, 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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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한 일이관지란 말그대로 "하나로 모두 꿰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구조론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사건을 "구조"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세상에는 여러가지 힘이 있지만 F=ma라는 공식으로 모두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일이관지지요. 그저 비유일 뿐이니, 미시세계에서는 다르다는 태클은 사양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모든 프로그래밍 코드는 0과 1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전혀 다른 기능처럼 보여도 0과 1이의 중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래밍 코드도 그 토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첩되고 반복되어 그 토대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그러나 컴퓨터는 모든 프로그래밍 코드를 0과 1로 풀어냅니다. 역시 일이관지의 예시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건을 "구조"라는 하나의 모형으로 풀어내는 것이 일이관지 입니다.이렇게 일이관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세상의 가장 기본 unit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일이관지를 풀이하자면 "세상의 모든 사건은 기본 유닛인 "구조"의 중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구조 하나로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