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의 면도날과 구조론 말 나온 김에 보태자. 오컴의 면도날은 특히 구조론과 가깝다. 구조론은 한마디로 에너지다. 에너지는 일원론이다. 그 에너지의 대척점에 무엇이 있는가? 관측자인 인간이 있다. 뭐든 인간의 입장이 끼어들면 이원론이 되어서 복잡해진다. 일원론은 연역이고 이원론은 귀납이다. 일원론은 마이너스고 이원론은 플러스다. 뭐든 더하려면 그 더해지는 내용물이 들어갈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2원적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성적을 50점에서 0점으로 내리기는 쉽다. 시험을 치지 않으면 된다. 반대로 50점에서 백 점으로 올리기는 어렵다. 공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현상은 뭐든 마이너스로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플러스로 설명하면 안 되는가? 마이너스도 되고 플러스도 되고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방향만 바꾸면 플러스=마이너스이므로 플러스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용돈을 받는 날이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오늘은 아빠가 내게 용돈을 주는 날이면서 동시에 오늘은 내가 아빠에게 용돈을 받는 날이다. 이렇게 쓰랴? 그냥 떡볶이를 사 먹었다고 말하면 되는데 떡볶이 가게 주인이 내게 떡볶이를 팔 때 동시에 나는 그 떡볶이를 샀다. 그리고 나는 그 떡볶이를 먹었다. 또한, 동시에 그 떡볶이는 내게 먹힘을 당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쓰랴? 이건 미친 짓이다. 중복과 혼잡은 배제되어야 한다. 구조론의 제일원리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중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야 하며 그러므로 마이너스를 취한다. 마이너스를 버리고 플러스를 취하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오컴의 면도날로 밀어버리자. 하나의 사건은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대칭을 이룬다. 주는 쪽이 에너지를 가지므로 주는 쪽이 상황을 컨트롤한다. 그러므로 사건의 기술은 무조건 주는 쪽을 위주로 해야 한다. 이것이 구조론의 기본입장인 일원론적 연역논리 관점인 것이다. 마이너스로 가면 간단하다. 연역으로 가면 간단하다. 관측자인 인간의 입장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물物 그 자체의 내적 대칭논리와 호응논리를 따르면 쉽다. 예컨대 진보는 뭐고 보수가 뭐냐?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매우 복잡하게 설명한다. 구조론은 쉽게 일원적으로 설명한다. 진보는 뭐를 추구하고 보수는 뭐를 추구하고 이렇게 각자 다르게 설명되면 곤란하다. 무엇인가? 진보를 설명할 때 보수도 이미 설명되어 있어야 한다. 빛을 설명했다면 어둠은 이미 설명되어 있다. 빛은 충분히 이해했는데 어둠은 아직 이해를 못 했다면 로미오만 읽고 줄리엣은 바빠서 읽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개소리다. 동전의 일면을 설명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설명된 것이 바로 진리의 보편성으로 때려잡는 원리이다. 구조론의 한 줄 설명 - 진보든 보수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권력행동이다. 진보는 권력을 만들고 보수는 그 권력을 사용한다. 진보는 차를 만들고 보수는 그 차를 탄다. 진보는 차의 성능에 관심이 있고 보수는 승차감에 관심이 있다. 진보는 200키로 밟아줘야 직성이 풀리고 보수는 뒷좌석 승차감이 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가 한 줄에 꿰어진다. 구조론으로 보면 보수는 운명적으로 진보에 종속된다. 진보가 권력을 만들어야 보수가 그 권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자력으로 권력을 만들지 않고 대신 진보에서 빼먹는다. 이재오, 김문수 등이 그런 방법으로 보수가 빼간 사람이다. 진보는 권력을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AS를 잘 안 한다. 대안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본다. 이는 극좌다. 극우는 권력의 쾌감에 중독된 쓰레기들이다. 조선족을 괴롭힐 핑계만 찾으면 보수가 좋아하는 원칙을 모두 패대기치고 물어뜯는다.
* 급진 – 권력생성에만 골몰해 이석기 패거리의 소권력 생성
중요한 것은 구조론의 일원론으로 보면 급진>진보>보수>극우가 한 줄에 꿰어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기승전결로 작동한다. 주로 정의당이 새로운 건수를 물어오고, 민주당이 권력을 생성하면, 보수가 경제로 문제를 해결한다. 극우는 재미 들려서 그걸 반복하려고 한다. 전쟁에 이기면 한 번 더 하자는 식으로 나온다. 이차대전에 삽질만 하던 프랑스의 드골이 애먼 알제리와 베트남을 때려잡은 것이 그러하다. 진보든 보수든 하나의 사건 안에서 순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마이너스가 자연법칙이라는 말은 오해될 수 있다. 진보는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말하면 좋지 않다. 진보만 떼놓고 보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보에 보수가 따르므로 전체 흐름으로 보면 역시 엔트로피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어쨌든 인류문명의 진보가 엔트로피의 법칙과 방향이 어긋나는 것은 확실하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고 다들 하는 말이니 검색해보면 나온다. 나무위키에서 엔트로피를 검색하면 나올 거다. 진보와 보수를 하나의 연속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 인류문명의 진보하는 방향은 엔트로피와 충돌한다. 인간이 보수짓 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엔트로피의 원리에 해당하고 문명의 진보는 사실 극소수의 천재들이 그러한 자연법칙에 맞선 거다. 나머지 99퍼센트는 묻어가는 거다. 묻어가는 주제에 잘난 척한다. 인류문명의 99퍼센트는 0.0001퍼센트의 천재가 만들었다. 70억 인류 중에서 99.999퍼센트는 동물 수준으로 그냥 묻어가면서 감히 인간행세를 하는 것이다. 겁대가리 없이 말이다. 이것이 적나라한 진실이다. 어쨌든 에너지를 조직하는 것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있다. 권력을 조직하는 진보와 권력을 소비하는 보수가 있듯이. 자연의 에너지를 조직하는 것은 말하자면 신의 영역이고 우주 안의 모든 자연의 진행은 그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버섯은 소비자다. 남이 이룩해놓은 식물을 먹고 사니까. 동물도 소비자다. 남이 이룩해놓은 식물을 먹고 사니까. 그렇다면 최종 생산자는? 식물인가? 식물도 태양을 먹고 사는 점에서 결국 소비자다. 모두가 소비자라면 생산자는 누구인가? 빅뱅 이후에 출현한 자는 모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는 없다. 엔트로피에 따라 우주와 자연에 생산자는 하나도 없고 오직 소비자만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지속가능성 제로의 불안정한 시스템이니 지금도 날로 팽창하여 망하고 있다. 언젠가는 모두 파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허블 아저씨가 변광성을 관측하여 이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의 원초적인 절망을 말이다. 그렇다면 근원의 생산자는 누구인가? 신인가? 빅뱅인가? 무엇인가? 어쨌든 구조론은 말한다. 그날 이후 모두 한 줄에 꿰어져 있다고. 그러므로 우연은 없고 모두 필연이라고. 우연이라 해도 확률적 필연이라고. 당신의 로또는 우연이지만 누군가의 당첨은 필연이다. 이런 걸로 고민할 이유는 없다. 이건 시간논리인데 시간은 원래 없다. 이건 에너지의 문제이고 인간들의 의사결정으로 보면 문명의 생산자는 진보이고 소비자는 보수다. 자연에 물리적 에너지가 있듯이 인간은 의사결정에너지가 있다. 이건 플러스다. 그러므로 진보는 플러스다. 그러므로 엔트로피와 충돌한다. 자연에는 소비자만 있는데 인간은 문명의 생산자다. 문명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신이다. 도시가 하나의 생물이라면 누가 신인가? 그 도시를 만든 인간이다. 한글이 생물이라면 누가 신인가? 세종대왕이 신이다. 잡스는 스마트폰의 신이다. 잡스신이 스마트폰을 창조한 것이다. 헷갈리지 말자. 이건 비유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이다. 어쨌든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인간은 에너지의 생산자이며 이는 자연법칙인 엔트로피의 방향성과 어긋난다. 인간만 유독 특별하다. 사실이다. 정리하면 우주에 마이너스만 있다면 최초 플러스는? 이건 시간논리인바 시간은 원래 없으므로 해당없다. 시간논리는 시간 속의 존재에만 적용된다. 진보는 플러스라 자연법칙인 엔트로피와 충돌하지만, 사건은 진보 다음 보수라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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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이게 유행한다고 하네요.
새삼스러운 건 아니고,
좀 아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쓰던 방식인데,
화자가 사건을 묘사할 때,
능동태로 말하는 게 핵심입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능동태 표현에 자주 쓰이는 동사를 조사해보면
언어연구도 가능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덧붙여,
능동태를 말하면 진보요,
수동태를 말하게 되면 보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US0JyotI-gs
이건 홍보 영상이고,
영꽝여자가 관광가이드를 영어로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1분지점에서부터 35초간만 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