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간이 흐를까? 서울로 간다고 치자. 버스 타고 서울 가면 된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상대방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한다. 시간의 문제는 결국 어떤 둘의 만남에 관한 문제다. 의사결정이 두 곳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제법 심오해진다.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은 비행기를 아는가? 아마 백이면 백 다 나는 비행기를 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종사 면허증을 보여줘 봐! 선뜻 조종사 면허증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조종사가 되려면 따야 하는 자격증이 한두 개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적어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자동차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다. 단지 공간과 시간을 구분할 줄 안다고 시간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존재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과연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는가? 인터넷은 어디쯤 존재하는가? 신은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가? 양자얽힘은 시공간을 무시하고 존재하는가?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대표성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를 떠올려 보라. 활주로가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 비행기가 활주로에 진입했는가 싶은데 어느 순간 비행기는 이미 떠 있다. 비행기는 한순간에 떠버린다. 동전이 뒤집어지듯이 갑자기 확 떠버리는 것이다. 일단 앞바퀴가 먼저 뜨고 뒷바퀴는 덜 떴다든가 하는 건 없다. 의사결정은 한 점에서 일어난다. 그 점이 뜨면 뜬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자이로스코프의 세차운동을 생각할 수 있다. 움직이는 물체는 외력과 한 점에 의해 대응한다. 물체를 당겨보자. 마찰력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 상태에서 약간의 힘만 더해도 매우 강력해진다. 노가다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일머리를 안다는 게 그런 거다. 한 점을 도출하여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수통을 들어보자. 생수통을 기울여 자빠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균형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 균형점을 낚아채기다. 어떤 것의 위치는 외력의 작용에 대응하여 그것을 대표하는 한 점의 위치다. 문제는 그 한 점이 물체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지구의 위치는 어디인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중심점에 있으며 그 점의 위치는 태양 가운데일 수 있다. 명왕성과 카론처럼 서로의 주위를 도는 쌍성은 그 중심이 허공의 어딘가다. 의사결정이 둘 사이의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면 그 관계의 중심은 둘 중의 어디에도 없다. 나를 결정하는 것이 나의 밖에 있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감이 올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그냥 거기에 있다고 믿지만 사실 거기는 없다.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있기는 있는데 가상이다. 자 당신은 서울역에서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시간을 맞춰야 한다. 놀래켜주려면 친구가 서울역을 지나갈 때 덮쳐야 한다. 친구가 언제 서울역을 지나갈지 알 수 없다. 친구가 역시 나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을 덮치려고 하고 있다. 공간을 노리고 있고 시간을 재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이유는 회전하기 때문이다. 왜 회전하는가? 정확히는 상호작용이다. 대칭의 날개가 축에 잡혀있기 때문에 서로 회전한다. 에너지는 축의 우위다. 회전하면 원심력에 의해 날개가 에너지의 우위가 된다. 축과 날개는 쌍성처럼 서로를 돌고 있다. 가속도를 성립시킨다. 둘 다 등속운동이 아니라 가속운동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이 두 곳에서 일어나는 게 시간이다. 자이로스코프를 쓰는 우주팽이는 기울어 있지만, 세차운동에 따라 반대쪽에 가상의 우주팽이가 있다. 그것이 시간의 호응이다. 우리가 앞으로 간다면 오른발을 내밀지만 동시에 왼발이 뒷땅을 밀고 있다. 동시에 두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은 방향의 전환을 위해 대칭을 조직하는 것이고 시간은 의사결정이 두 곳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곧 호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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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 뭔지는
상식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모르면 검색해보면 되는 것이고
이건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논의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하나의 매개변수로 봅니다.
몇 회의 의사결정으로 어떤 둘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여기서는 원자론적 관점을 극복하는 문제입니다.
의사결정은 한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그 점은 쪼갤 수 없는 원자인데
의사결정이 일어난다는건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면 이미 쪼개진 것이니 원자론은 틀렸습니다.
구조론의 의사결정은 어떤 둘 사이 간격을 움직여 결정합니다.
이때 관성의 법칙에 의해 간격이 좁혀지면 계속 좁혀져서 멸망
간격이 넓어지면 계속 멀어져서 멸망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면
간격이 좁혀져도 계속 좁혀질 수 있는 그림이 필요한 거지요.
양자역학적 상호작용으로 타개할 수 있는데
의사결정이 두 지점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결이 됩니다.
비유로 말하면 의사결정이 한 사람이 아닌
둘이 결합한 한 커플에서 일어난다는 말인데
세상은 사람이 모여 사회가 된게 아니라
커플이 모여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커플을 이룬 두 사람이 당연히 마찰하여 헤어지는게 정상이죠.
부부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이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죠.
돈이나 섹스나 이런 걸로 묶여있다고 말하면 곤란하죠.
돈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게 낫고 섹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프로토콜에 의해 묶여 있는 것입니다.
時間?
강물이 흐르는 것은 지구밖으로부터의 척력이 강한곳에서 약한 곳으로 밀어내기 때문이고,
시간이 흐르는 것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에너지 격차로 밀어내진 것인지?
난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