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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047 vote 1 2017.08.22 (16:52:40)


    만유의 근본은 느끼는 거리다.

    
    모든 사유의 출발점은 속성屬性의 파악에 있다. 속屬은 소속된 그룹이고 성性은 본성이니 본바탕을 말한다. 그게 뭐냐다. 바탕이 뭐냐고? 성性은 마음 심心 변이 뜻이고 생生은 소리값이다. 성性은 마음이니 사람 마음은 그냥 마음이고, 사물의 마음은 무엇인가? 코어core다. 핵核이다. 심은 연필심이나 양초 심지처럼 속에 끼워진 알맹이다.


    우리말 마음과 다르다. 우리말 마음은 머금은 것이니 사람의 의도나 생각이다. 한자어 심心은 중심中心이자 핵심核心이니 사람뿐 아니라 사물에도 심이 있다. 볼펜을 까면 심이 나오고 과일을 까면 핵이 나온다. 그게 뭐냐다. 나무위키로 속성을 검색하면 이데아니 보편자니 하는 게 나온다. 분석철학의 프레게 나오고 데이빗 루이스 나온다.


    4원소설도 나오고 음양오행론도 있다. 인과율도 나와야 하는데 그건 안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 언어의 의미는 단어에 없고 문법에 있다. 우리말은 조사가 발달해서 단어에 뜻이 있지만, 영어는 어순에 뜻이 있다. 콩나물 보고 콩나물이라 하면 콩나물인 게 아니고 사실은 ‘그것은 콩나물이다’ 하는 문장인데 번잡하니 줄여서 콩나물이라 한다.


    원래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문장이지만 술어를 생략한다. 5분 검색해보고 하는 말이지만 분석철학이 이딴 걸 논하고 있더라. 대개 쓸데없는 소리다. 어휘에는 뜻이 없다. 그래서? 우주의 속성은 무엇인가?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뭐가 나오는가? 만유의 바탕은 무엇인가? 사과는 빨갛다. 그 빨강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뇌 안의 전기신호다.


    만유의 근본은 전기신호인가?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 하지만 천만에. 사과에는 빨강이 없다. 하늘에는 파랑이 없다. 황토에는 황이 없다. 사과는 붉은 빛을 배척하니 우리는 사과가 버린 것을 보고 사과에 빨강이 있다고 믿는다. 하늘이 파란 것은 하늘이 파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파랑이 없다. 황토는 철분의 녹이 빨갛다.


    그것을 황黃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눈이 삔 거다. 사물에 속성이 없고 단어에 뜻이 없다. 원자론적인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사물을 극한까지 쪼개면 어떤 알갱이가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은 모두 뇌 안에서 만들어낸 환영이다. 우리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의 촉각으로 사물을 느끼지만, 모두 뇌가 지어낸 그림자이니 거짓이다.


    자연의 사물에 실재하는 것은? 정보는 어떤 것에 없고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사이에 있다. 관계에 있다. 우리가 빨강이나 파랑으로 보는 것은 그것과 인간 사이의 관계다. 인간이 개입했다. 관측이 개입하여 왜곡시켰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 것은 모두 거짓된다. 진실은? 사물과 사물이 서로 상대방을 느끼는 그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사실은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고 이건 왜곡된 거다. 진실한 것은? 사물과 사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이다. 양성자와 중성자와 음전자의 관계는 분명하다. 사물의 내적 속성은 없지만 외적 관계는 있으며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나오는 건 없지만 껍질들의 방향과 순서로 이루어진 질서는 분명 존재한다.


    그 질서야말로 만유의 근본이라 할 것이다. 우주는 질서로 이루어졌으니 질서는 에너지의 질서다. 단어는 뜻이 없지만 문법은 뜻이 있다. 속성은 의미가 없지만 관계는 의미가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은 모두 가짜지만, 사물이 서로 느끼는 것은 진짜다. 인간이 맛보고 경험해 아는 건 가짜지만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느끼는 건 진짜다.


    양성자와 음전자가 근접할 수 있는 거리가 있다. 거기에 정보가 있다. 핵은 없으나 껍질에 답이 있다. 우리는 호두나 밤이나 잣이나 과일의 씨앗을 까먹은 경험으로 사물의 껍질을 까보면 안에서 뭔가 나온다고 믿지만, 이는 착각이고 까봤자 나오는 것은 없으며 대신 껍질들이 서로를 느끼는 거리와 각도와 속도는 진실하다. 느낌정보가 있다.


    만유의 본성은 사물이 서로를 느끼는 방식이다. 그것이 곧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니 에너지와 밸런스와 대칭과 호응과 데이터다. 에너지는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한다.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계를 지정한다. 즉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홍길동을 지시했다면 홍길동이 대답해야 한다. 홍길동이 일란성 쌍둥이라 두 명이라면?


    두 사람이 이름 하나를 공유하며 2인 1역을 한다면? 반칙이다. 그러나 안개나 이슬처럼 하나인듯 둘이요 둘인듯 하나이니 헷갈리는 것은 자연에 흔하다. 규칙 위반이다. 그게 에너지다. 질이다. 헷갈리기 없기다. 하나를 가리키면 하나가 반응해야 한다. 확산이 수렴으로 바뀔 때 하나다. 한국아 하고 불렀는데 남북한이 동시에 대답하면 안 된다.


    외력에 대해 1로 대응하는게 질이다. 1로 대응하려면 내부가 균일해야 한다. 그래서 질은 결합한다. 입자는 밸런스를 이루어 그 반응의 시작점을 도출한다. 대칭은 입자의 축을 이동시키며 이 과정에 좌우대칭을 연출하고 공간을 이룬다. 호응은 시간적인 반복과 진행이다. 데이터는 그런 에너지 처리과정을 거쳐 다시 외부로 전달해 보낸다.


    사물은 이 다섯 방법으로 서로 관계한다. 서로를 호출하고 서로를 느낀다. 그것이 만유의 근본 속성이다. 여기서 인간을 배제하는게 중요하다. 내가 느꼈다는 건 안 쳐준다. 그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어떻게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양자개념은 여기서 출발한다. 관측을 배제하고 서로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본다.


    서로 느끼려면 최소 2가 되어야 하므로 양자다. 1은 느낄 수 없다. 1은 인간이 느낀 것이니 논외다. 1은 반응하지 않는다. 존재로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산수를 해도 1부터 시작하고 단어를 써도 한 개의 단어를 뱉는다. 콩나물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을 개입시켰기에 가능하다. 우리가 콩나물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콩나물을 봤다는 문장이다.


    문장으로 말하면 길어서 피곤하니까 줄여서 콩나물이다. 단어는 없고 문장이 있다. 숫자도 마찬가지라 우리는 1부터 셈하지만 구구단도 1단은 외지 않는다. 자연은 2부터 시작된다. 1은 둘 사이를 매개하는 라인이 1이라는 말이다. 1에는 이미 2가 들어있다. 사과 한 개라면 사과와 나로 둘이 1개 라인으로 연결되었다는 뜻이니 이미 둘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았다면 무엇을 보든 그것은 2로 존재한다. 당신이 빛을 보았다면 이미 어둠을 본 것이다. 당신이 집을 보았다면 이미 길을 본 것이다. 당신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았다면 이미 어딘가의 활을 본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있다. 독립군이 한 명만 살아남았다 해도 장군과 병사 둘이 있다. 1인 2역이니 2다. 속성의 속屬은 그룹이다.


    당신이 하나를 보았다면 집합과 원소 둘의 그룹을 본 것이다. 만유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이며 관계의 상대성은 관측자인 인간을 사건에 개입시켰기 때문이며 관측자를 배제하고 보면 절대적이다. 모든 상대성은 인간이 개입된 바 왜곡된 가짜이며 자연에 상대성은 원리적으로 없다. 어쨌든 인간이 보면 그것은 상대적이다.


    인간이 보면 밝은 것도 어둡고 어두운 것도 밝으며, 선한 것도 악하고 악한 것도 선하며, 높은 것도 낮고 낮은 것도 높으니 이는 상대적이지만 자연에는 그런거 없다. 자연은 일방통행이다. 밝음은 있고 어둠은 없으며, 선은 있고 악은 없으며, 높이는 있고 낮이는 없으며,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밝음은 빛이 있어 광자다. 어둠은 암자가 없다.


    선은 사회화가 있고 악은 사회화에 대칭되는 그 무엇이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 반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높음은 지구중심과의 거리가 정하고 낮음은 없다. 높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낮이라는 단어가 없다. 무게라는 단어는 있어도 가벼움게라는 단어는 없다.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지구의 인력 하나뿐이다. 중력에 반대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자연과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려고 하고 1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상대성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댄다. 관계를 찾고 2에서 찾으면 에너지 복제의 결을 따라 질에서 입자와 힘과 운동을 거쳐 량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가니 우리는 에너지와 밸런스와 대칭과 호응과 데이터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의 근본이다.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이다.


    닫힌계와 중심축과 공간과 시간과 정보라는 다섯 가지 관계로 우리는 사물을 파악할 수 있으니 이는 사물이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방식이다. 인간이 눈코입귀몸으로 느끼는 것은 안 쳐준다. 상대성은 배척한다. 부부는 무촌이고 부자는 1촌이다. 부부가 부자보다 가깝다. 서로 느끼는 거리가 다르다. 부부는 살이 맞닿으니 금방 서로를 느낀다.


    부자는 살이 닿지 않으니 느끼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그 느끼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니 고유한 속성은 없다. 4원소설에 4원소가 없고 오행설에 오행이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없다. 그런거 없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듯이 착한 사람의 영혼은 선에 절여졌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악에 절여져 있기는 개뿔 그런 거 없다.


    이데아도 없고 영혼도 없고 이성도 없고 절대정신도 없고 귀신도 없다. 오직 서로가 느끼는 거리만이 존재하며 그것만이 진실하다. 느끼는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한다고 하고 느끼는 거리가 멀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이것이 진실이니 좌절하지 말고 가능성을 보라. 느낌거리로 무엇이든 체포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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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오세

2017.08.22 (18:44:58)

반야심경 2.0 나왔네.
다들 출가하지 마슈.
이거읽으면 성불함
[레벨:10]다원이

2017.08.22 (23:38:34)

오세님 댓글에 일단 !!!! 하고 본문 읽겠슴다.
[레벨:11]큰바위

2017.08.23 (05:36:00)

구조론 = 헛갈리가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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