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연역이다. 연역은 복제다. 복제할 원본이 있어야 한다. 그 원본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엄격해진다. 연역의 의미는 정답이 한 개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저항감을 느낀다. 세상이 단 하나의 원리에 지배된다고. 정답이 하나뿐이라고? 다양하기보다 획일적이라고?
자유가 아니라 독재라고? 그렇다. 진리의 성질은 보편성이다. 정답은 하나뿐이다. 당신이 이에 불만을 갖는 것은 정치적 동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당신은 그 사회 안에서 권력을 원하며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이 하나뿐이라면 당신은 좌절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엉뚱한 접근이다. 우리는 과학적 진실을 논하고 있지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에 대해 정치적인 맞대응을 시도한다면 넌센스다. 정치하지 마라. 태양은 하나뿐이고 우주도 하나뿐이고 인류의 조상도 하나뿐이다. 뭐든 좋은 건 하나뿐이다. 에너지의 공급원은 하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적 논의에 개인의 욕망을 투사하면 안 된다. 사사로운 권력욕을 들이밀지 말라. 도량형을 정하는 원기는 하나뿐이다. 여기에 정치논리를 끌어들이지 말라. 우주의 근본법칙은 하나뿐이며 그 원리는 복제원리고 복제는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정한다.
확산에서 수렴으로 방향을 튼다. 그 외에 없다. ←→가 둘이 만나 충돌하면 가운데 →←가 생겨난다. 이게 전부다. 방향전환에 의해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원래부터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디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다. 미리 주어진 자원 한도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테두리를 정해야 한다. 우리가 오판하는 이유는 사건의 진행 중에 외부에서 불쑥 들어오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컨닝을 한다거나 혹은 성적표를 위조한다고 치자. 이건 외부에서 개입하여 들어온 것이다.
그런 식의 외부원인에 의한 교란을 차단해야 한다. 닫힌계를 정해야 한다. 이게 습관이 되어야 한다. 어떤 논의를 하든 울타리를 치고 금을 긋고 이 바깥에서 들어오기 없기 하고 규칙을 정해야 한다. 시합 중에 관중이 그라운드에 난입하기 없기다. 날아가던 독수리가 공을 가로채서 홈런 되면 곤란하다.
닫힌계를 정하고 보면 사건이 진행될수록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 플러스는 곧 외부개입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조금이라도 부스러기가 생겨서 손실이 일어난다. 핵융합을 해도 열이 새나가고 핵분열을 해도 에너지가 손실된다. 진흙을 주물러 무얼 만들든 약간의 손실이 일어난다.
의사결정비용이 청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손실분을 감안해서 범위를 줄여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사건범위가 축소된다. 질이 가장 크고 입자 힘 운동 량 순서대로 사건의 범위가 작다. 질은 전체에 파급되고 입자는 부분에 파급되며 갈수록 국지전이 된다. 질은 전면전이 된다.
질이 입자를 낳고 입자가 힘을 낳고 힘이 운동을 낳고 운동이 량을 낳는다. 그 과정에 사건의 범위가 점차 좁혀진다. 투수가 공을 던져도 와인드업은 온몸을 다 쓰지만, 마지막에는 공을 놓으며 손가락 끝만 힘을 쓴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그러나 5회에 걸쳐 대칭을 만든다.
그 대칭은 복제된다. 범위가 좁혀졌을 뿐 본질은 같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사이즈가 작아져 있지만 유전자는 같다. 아기가 엄마보다 클 수는 없다. 이는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에 위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같으니 아기가 엄마보다 더 적은 숫자의 유전자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