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v.media.daum.net/v/20170811044244234?d=y 어처구니없는 모함이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학교에서 잘못 배웠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한다는 보통사람의 보통생각은 당연히 틀렸다. 악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개미귀신의 덫에 걸린 개미처럼 거짓이라는 이름의 수렁에 빠져 탈출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되어 있다. 무엇인가? 구조론은 선과 악을 대칭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에너지 진행이 관점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된다. 에너지가 작동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에너지는 통제되어야 한다. 통제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통제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선악이원론이 아닌 통제가능성 일원론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다. 보통은 선행을 하면 상을 주고 악행을 하면 벌을 준다. 큰애는 선행을 했고 둘째는 악행을 했다. 큰애는 상을 주고 둘째는 벌을 준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 가정은 붕괴한다. 엄마는 형만 편애해. 이렇게 된다. 인간은 본능적인 정의감이 있다. 정의감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과정은 빼고 결과만 본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구조의 문제라는 점이다. 다친 사람은 말로 설득할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수술을 해야 한다. 마음을 다쳐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어떤 계기로 마음을 다치는 게 아니라 다쳐서 태어난다. 원시 부족민은 원래 문제가 있다. 교육에 의해 사회화되어 부족민의 야만에서 이탈한 것이다. 나쁜 사람이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사회화 속도를 못 따라잡은 사람이 사고를 친다. 그렇다면? 에너지로 해결해야 한다. 국가는 범죄자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하며 부모는 자식에 대해 절대적인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한다. 신상필벌이 공정하면 망한다. 왜? 도덕적 우위를 잃고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권력서열이 사라진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을 받으면 공정하다. 공정하므로 망한다. 에너지의 진행방향이 사라져서 통제불능이 된다. 엄마가 손해 보고 일방적으로 자식이 이득봐야 자식은 그 이득을 갚기 위해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에너지의 잉여다. 엄마가 물질적으로 손해 보는 대신 권력을 얻고 자식은 이득을 챙겨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이 구조로 계속 간다. 구조는 물리적 구조이며 이 물리적 구조가 파괴되면 답이 없다. 마음을 다치는 게 아니라 구조를 다친다. 부모자식 간에 공정하면 계산 끝났으니 각자 제 갈 길 간다. 구조를 다친 것이다. 한 번 구조가 깨지면 돌이킬 수 없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손해 보고 국민이 이득 봐야 국민은 그 이득을 갚기 위해 국가를 따르게 된다. 이 구조가 수직계열화되어 국가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동물은 결코 선과 악 두 방향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에너지의 결을 따라가는 한 방향으로 통제해야 한다. 에너지는 원래 계 안에서 진행방향이 하나뿐이다. 일방적으로 선을 베풀되 따라오는 사람은 서열이 오르고 배반하는 사람은 서열이 밀리는 구조라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선한 사람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구조를 세팅해야 한다. 서열이 맨 끝으로 밀리면? 아기가 되어서 돌봄을 받는다. 악을 저질러 권력서열이 꼴찌가 된 사람은 일방적으로 국가의 돌봄과 혜택을 누리는데 그들은 교도소에서 아기처럼 돌봄을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공짜인 문재인 케어를 베풀어 버린다. 이것이 일방향 통제 기술이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언제나 집단을 의식하고 무의식적으로 집단에 유리한 행동을 한다. 이재용처럼 잠재적인 리스크를 높여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한다. 집단의 어그로를 끄는 변희재 행동이 그러하다. 어떻게든 사고 친다. 안철수도 역시 어그로를 끌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합리적이어야 한다. 유태인 행동을 예로 들 수 있다. 유태인은 어느 나라를 가도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유태인으로 살아간다. 유태인이 다 그런 게 아니고 그런 말이 있는 거다. 영화 보랏에 묘사되듯이 유태인은 외부인에 대해 한없이 친절하다.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는 짓은 자신의 리스크를 높이는 비합리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대신 변호사를 불러 몰래 뒤로 조진다. 주로 멋모르는 한국계가 당하게 된다. 유태계 자본이 배후에서 전 세계를 주므르지만 밤길에 칼 맞는 일이 없다. 그들은 항상 웃는 얼굴로 하인들과 공관병에게 친절해서 원한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갑질하지 않는다. 대신 은밀히 공권력을 움직여서 뒤로 조용하게 처리한다. 우리가 유태인을 본받자는 게 아니라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명박근혜 행동은 리스크를 높이는 소인배 행동이며 이는 물리적 구조의 문제이며 그들은 마음을 다쳐 구조가 깨졌으므로 절대 교화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생각은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어떤 대상과 대칭시켜서 값을 도출하는 것이다. 수학문제 풀기와 같다. 공식에 대입해 풀어낸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한가지 패턴을 정해놓고 계속 가는 거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뇌가 에너지의 손실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어느 공식에 대입할지는 정해져 있다. 공식을 교체하지 못한다. 만인에게는 적절한 몫의 에너지가 주어져 있고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시켜 사건을 최대한 끌고 가는 방향으로 각자 자신의 패턴을 정해 놓고 있다. 구조는 마이너스다. 언제나 손실할 뿐 그 에너지를 상승시킬 수 없다. 상승하는 방법은 대칭을 바꾸는 것이다. 대칭을 바꾼다는 것은 자기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 번 소속을 정할 수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 소속이 정해져 있다. 둘은 소년기에 패거리를 이루어 소속을 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어른이 되어 자기를 따르는 가족이나 부하직원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소년기의 소속을 평생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거다.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 거기 머물러 있다. 아기 때는 천사였는데 악당으로 타락한 게 아니라, 아기 때의 소속을 바꾸지 않고 가만있으면 이미 악당이 되어 있다. 그래서 악당은 자신이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조폭은 가족이라는 소속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니 범죄자 가족이 된다. 조폭이 동료를 형이나 동생이라 부르는 게 그 때문이다. 원시 부족민은 씨족사회라서 죄다 형 아니면 동생이다. 그들은 특별히 타락하여 악당이 된게 아니라 원시 부족민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다. 그러므로 자신이 나쁘다는 걸 모른다. 의식적으로 소속을 바꾸어야 하며 그것이 깨달음이다. 초딩의 서열본능이냐 중딩의 패거리본능이냐 깨달음의 대표성 행동이냐는 자신의 소속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초딩의 경우 대칭의 대상은 가족이다. 많아 봤자 5명 정도다. 친구도 기껏해야 다섯이다. 그렇게 좁게 울타리 쳐놓고 피아구분을 한다. 소집단 안에서 서열올리기 행동을 한다. 중딩은 그룹이 커서 수십 명이다. 경쟁자가 많아서 서열을 올릴 수 없으므로 대신 다른 사람의 서열을 끌어내려 평준화한다. 깨달음은 자기 집단을 거느리는 것이다. 혹은 인류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소속이 문제다. 재일교포가 일본 사회에 잘 동화되지 않듯이, 재미교포가 돈을 벌면 다시 한국으로 회귀하듯이 원래 소속집단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위 링크한 사건이 그러하듯 특별히 악의가 없는 보통사람도 거짓말을 꽤 잘한다. 오히려 보통사람이 거짓말을 더 잘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혹은 거짓말하다가 피해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고립된 생활을 하거나 혹은 소수의 주변 사람만 접촉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사회를 타자로 규정하는 무의식의 작용 때문이다. 초딩들이 거짓말을 잘하는데 그게 거짓말이라는 의식이 없다. 언어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상황에서 이탈해야 살아남는다는 본능이 작동한다. 내 말이 맞고 틀렸고 간에 사실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탈출하느냐 하는 의식이 작동한다. 그러므로 부모나 선생님이 아무리 야단을 쳐도 전혀 교정 안 된다. 부모든 선생님이든 자신에게 야단친다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고, 이는 적대행동이며, 적대행동을 당했다면 심리적으로는 이미 사건에서 탈출해 있다. 소속이 틀어져서 이미 마음이 딴 데로 가버렸으므로 야단을 쳐도 심리적인 타격이 없다. 소속을 이탈했으므로 소속찾기를 열망하여 오히려 더욱 어그로를 끌고 일을 벌인다. 교육은 자신의 소속집단을 대집단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교육효과는 뭐 영어단어 몇 개나 수학공식 몇 개 이런 게 아니고 무의식을 바꾸는 거다. 소집단 본능에서 대집단 본능으로 무의식을 갈아타야 한다. 천하가 아프면 나도 아파야 교육이 된 거다. 천하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거짓말이 천하의 에너지 회로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왜 천하의 고통을 느끼는가? 천하와 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하와 나 사이에 에너지 회로가 작동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에너지 회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초딩의 서열본능이나 중딩의 패거리본능이 작동하면 그러한 회로보호가 안 된다. 천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천하와 나 사이에 에너지 회로가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타자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와 에너지 회로를 연결할 의도로 계속 집적거린다. 소년이 이성과 회로를 연결해 볼 의도로 얼쩡거리는 짓과 같다. 안철수는 초딩 서열본능에 지배되므로 교정이 안 된다. 계속 대한민국을 집적대며 지분거린다. 대한민국과 자신 사이에 회로를 연결하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타자이고 적이고 남이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말이 있다. 안철수의 무리는 인류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의 교류가 안 되니 일종의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게 초딩본능이다. 천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말로는 절대 설득이 안 된다. 잼있는 게 산속에 사는 자연인들 중의 상당수가 혼자 사는 자기 집에 태극기를 걸어놨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데 웬 태극기? 이들은 자기 삶에 타인을 개입시키려고 한다. 어그로를 끌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게 유도한다. 초딩의 서열본능이다. 변희재 행동이다. 타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나가는 등산객이 타자다. 정상인은 태극기를 걸지 않는다. 왜? 지나가는 행인을 가족으로 보기 때문이다. 형이나 동생 앞에 태극기를 흔들어 제압하려 하는 바보는 없다. 태극기 행동은 이웃을 남으로 여기는 것이며 이웃에게 생존경쟁 싸움을 거는 퇴행행동이다. 중딩본능도 있다. 이들은 정치를 못 한다. 중이병에 걸려 뭐든 부정적으로 생각하므로 정치가 안 된다.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로 정치할 수 없다. 정치는 집단의 권력서열을 조직하는데 아예 그 집단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떻게든 집단을 조직해야 하므로 긍정해야 한다. 권위주의로 가서 맹목적 긍정을 하거나 아니면 깨달음으로 가서 장기전을 꾸리고 미래를 긍정해야 한다. 중딩들은 현실부정에 얽매여 있으므로 비판하고 헐뜯기만 하다가 지지를 얻지 못한다. 비판에 능한 유시민이 세력을 이루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진보꼴통들은 중딩정치를 하므로 집권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세 그룹이 있다. 초딩은 이웃을 타자로 여기므로 태극기를 휘둘러 제압하려고 한다. 이웃이 퇴치해야 할 타자이므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혹은 이웃이 나를 타자로 볼까 봐 타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만들기 위해 과잉충성한다. 동물의 복종행동을 한다. 중딩은 이웃과 평등한 그룹을 형성할 뿐 의사결정구조를 못 만든다. 이들은 무언가를 반대할 때만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난세를 해쳐갈 때 동지가 되나 치세가 되면 삐쳐서 등 돌린다. 진정한 사람은 천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다. 이들은 긍정하지만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긍정한다. 이들은 선을 권장하지 않고 악을 징벌하지 않으며 오로지 에너지의 방향성을 통제할 뿐이다. 이들은 선의 권력서열을 높이고 악의 권력서열을 낮춰 악당을 교도소에 보내 아기처럼 돌본다. 이들은 살인마를 사형시키지 않는다. 살인마가 백 살까지 살아서 악의 패배를 끝까지 지켜보게 한다. 살인마를 천국에 보내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은 어떤 것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웃을 대상화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신을 대상화해야 한다. 불만이 있으면 신을 쳐 죽여야 한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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