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정답은 게임체인지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입에 착착 감기는 달콤한 거짓말이다. 그들에게 있어 작가의 직업은 학자가 아니라 서비스업이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에 충실하자는 거다. 내가 너를 작가로 지지해주는 대신 너는 나를 케어해 줘. 힐링해 줘. 희망고문 해줘. 현실도피 시켜줘. 정신승리 시켜줘.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시장바닥이 아니다. 거래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일방적으로 퍼준다. 일방적으로 얻은 게 없다는 분은 나가줘야 한다. 법륜이나 혜민이 이 바닥에서 장사 좀 한다고 들었다. 인생론 타이틀 걸면 팔린다. 왕년의 류시화를 이길 자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 류시화도 하루키를 당해내지는 못하지만. 간단하다. 인생의 답은 노오력에 있다.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예찬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청년이여! 꿈을 가져라. 열정페이나 받으며 참고 견뎌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내려놓으면 행복해진다. 느리게 살아라. 이런 뻔뻔한 거짓말들 말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타성에 젖은, 곰팡내 나는 썩은 것들 말이다. 사실이지 인생의 근본은 변치 않는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영인본에도 나온다고. 요즘 젊은것들은 문제가 있어. 남자라는 놈들은 노상 모여서 여자한테 들이댈 궁리나 하고 여자라는 것들은 맨날 모여서 사치품이나 사들일 궁리하고 도무지 생각이 없다니까. 우리 때는 안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철이 없어. 일만 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도 나온다고. 좋았던 옛 시절 편향Good-old-days bias이라고 아주 용어도 있구만. 일만 년 동안 인간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하긴 요즘 군대가 군대냐. 구조론은 까놓고 진실을 말한다. 인간은 언제라도 권력을 탐한다. 타인에게 존중받기 원한다. 에너지가 만땅 충전되기 원한다. 권력이라는 표현은 오해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통제가능성이다. 산속에 사는 자연인들도 자연이 뜻대로 통제되니까 그러고 사는 것이다. 자연이 말 안 듣고 개기면 피곤하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타인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게 달콤한 거짓말을 해봐 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독자의 권력행사다. 독자는 작가를 복종시키려 한다. 노력타령 역시 독자를 얌전한 상태에 두려는 것이다. 내려놓아라거나 행복타령이나 인생예찬도 마찬가지다. 독자를 통제가능한 상태에 가둬놓는다. 법륜이든 혜민이든 니들이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내가 편하잖아. 이 한마디 말을 길게 늘여서 한다. 통제권의 행사다. 강신주는 나름 고급기술을 쓰지만, 독자에게 아부한다는 점은 개가 꼬리를 흔들어 주인을 꼬시는 것과 같다. 개도 주인을 통제하려고 한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은 자신의 냄새를 전하려는 것이다. 개는 냄새맡기를 좋아하니까 사람도 그럴 줄 알고. 고양이는 눈빛공격을 쓰고 아기는 귀여움 공격을 한다. 당해낼 자가 없다. 대상을 통제하려면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비유로 말하면 남자에게 여자가 없는 게 아니라 있어봤자 불능이다. 서지 않는다. 매력이 없다. 능력이 없다. 에너지가 없다. 인간 개인의 우열은 없다. 각자의 게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단의 우열은 있다. 집단은 게임이 정해져 있다. 집단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종이나 성별이나 이런 건 여기서 말하는 집단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선택한 게임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집단의 우열은 분명히 있다. 새누리는 열등한 집단이다. 좋은 집단을 선택해야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우열이 있다. 낙차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얻으려면 만날 사람을 만나서 드림팀을 조직해야 한다. 얽혀서 서로 연동되어야 에너지 낙차가 조직된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처럼. 집단 구성원 모두가 한 점을 바라보는 구조를 세팅해야 한다. 통제권은 팀의 구성원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데서 얻어진다. 단절되고 고립되면 통제권이 없다. 존엄이 없다. 그러므로 묻노니 그대는 이 세상과 긴밀하게 엮여져 있는가 아니면 판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존재인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게임체인지는 다른 팀에 소속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학교와 결혼과 직장을 통해 혹은 정당활동을 통해 자신의 소속팀을 정한다. 자신의 게임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타자를 가르는 구분선을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행복이 아니라 존엄에서,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서, 개인이 아니라 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사건을 격발할 수 있다. 기승전결의 기에 서서 다음 카드를 읽어야 한다. 게임 체인지로 그것은 가능하다. 과학이 무기가 된다. 무기를 먼저 손에 쥐는 사람이 유리하다. 과학은 새로운 게임을 조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바보들이 따라하면 망한다. 한편으로는 바보들이 받쳐줘야 흥한다. 당신은 새로운 게임을 조직해서 바보들이 따라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럴 때 권력이 생긴다. 이윽고 바보들이 당신을 따라잡으면 이 바닥도 끝물이니 그럴 때 당신은 떠나야 한다. 새로운 게임을 준비해야 한다. 게임을 갈아타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진보는 행복이나 평등이나 자유나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은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어휘에 불과하다. 진보는 게임을 조직해 에너지를 태우고 계속 간다.
에너지를 얻으면 다음 카드가 보인다. 이기는 팀에 들면 에너지를 얻는다. 그렇다. 당신의 게임은 무엇인가? 나와 타자를 가르는 구분선을 어디에 두었는가? 자기만족 게임을 버려라. 대부분 열등감을 보상하는 자기소개 게임에 빠져 있다. 내려놓으라거나 느리게 살아라거나 하는 건 콤플렉스 대응이다. 자기만족 게임에 빠진 자는 내려놓건 올라타건 간에 얻는 게 없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 일만 년 동안 달라지지지 않은 게 인간이다. 게임에 이기건 지건 수렁에 빠져 있다. 게임에 중독되어 있다. 행복하고자 하는 열망에 중독되어 있다. 행복해봤자 알콜중독자의 술 한 모금과 같은 일회적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기려는 게임도 좋지 않다. 보수를 이기는 진보는 좋지 않다. 악을 이기는 선은 좋지 않다. 법륜이나 혜민이나 류시화가 파는 자기만족게임은 초딩게임이라 하겠다. 강신주 게임은 남을 이기는 중딩게임이니 역시 좋지 않다. 반항하라. 탈출하라 하는 거나 말 좀 들어라. 복종하라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게임 속에 빠져서 허우적댈 뿐 결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게임에 이기려고 하는 한 당신은 이기지 못한다. 경마장에서 돈을 따려고 하는 한 당신은 돈을 따지 못한다. 돈을 따는 자도 있다. 만족자도 있고 승리자도 있다. 그러나 남을 패배시켜서 얻은 승리는 진짜가 아니다. 이미 낚여서 파닥이고 있다. 돈을 벌어서 우쭐대는 졸부의 승리와 같다. 경마장을 짓는 자가 진짜다. 게임을 조직하는 자가 진짜다. 기에 선 자가 진실하다. 승과 전과 결로 가는 다음 카드를 읽은 자가 진실하다. 자기만족형 인간이 되지 말고, 승부사형 인간도 되지 말라. 에너지가 없고 통제권이 없다. 사건을 일으키는 자가 진짜다. 정리하자.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나와 타자를 가르는 기준선을 잘못 그어서 일어난다. 아기의 선이 있고 중딩의 선이 있고 어른의 선이 있다. 아기는 만족이 목적이고 중딩은 승리가 목적이고 어른은 사건의 격발이 목적이다. 여전히 만족하려고 하거나 이기려고만 한다면 그 소굴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케어해주든 힐링해주든 무언가를 받으려는 자는 영원히 노예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은 독자든 작가든 상대를 통제하려는 것이다.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자는 상대방과 나 사이에 금을 그었으니 그 금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한다. 복종을 파는 법륜이든 탈출을 파는 강신주든 게임의 구조는 똑같다. 남에게 받지도 말고, 남을 이기지도 말고, 남을 통제하지도 말고, 남으로부터 탈출하지도 말아야 한다. 남과 나 사이의 경계를 갈아타는 자가 진짜다. 진보는 그 경계를 계속 밀고 가는 것이다. 생장점을 옮겨 경계를 지우고 새로운 경계를 긋는다. 최후에 하나의 경계가 남으니 그것은 신과의 일대일이다.
유비, 관우, 장비는 그들 사이에 금을 지웠다. 다른 팀이 되었다. 그들은 게임을 갈아탄 것이다. 여포는 챙겼고, 조조는 이겼고, 유비는 에너지를 일으켰다. 그 에너지는 만인의 가슴 속으로 복제된다는 점이 다르다. 사건의 기에 선다. 공자는 금을 지우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인, 지, 의, 신, 예로 그것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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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