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목요일 모임은 우체국, 팩토텀 등을 쓴 찰스 부코스키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이 양반 보나마나 김기덕과인데, 그냥 김기덕 감독이 소설가로 직업을 바꿨구나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소설을 읽어보셔도 좋고 리뷰를 읽어보셔도 좋고, 하여간 약간의 사전지식을 챙겨오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지금 미리 정답을 다 이야기를 다 해버리는게 저의 방식. 부코스키 리뷰 – 이보다 더 역겨울 수 없다. 리뷰를 퍼오려고 했는데, 대개 마우스 오른쪽이 잠가져 있어서 펌이 불가능하군요. 다른 리뷰들은 직접 검색해서 읽어보시고, 두엇만 살펴봅시다. 아래는 최악의 리뷰라 할만한데.. 하느님 맙소사.. 자살충동을 유발하는 순수한 구토.. 악몽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너무 최악이라서.. 그 중에서 한 문단만 따왔습니다. ### 현대의 조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조직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공공의 목적을 가진 우체국이야말로 정확한 규율 속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고 치나스키는 철저히 그에 반하는 인물이다. 그는 항상 조직에 불만을 제기하고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을 거부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어차피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치나스키 역시 12년이라는 젊은 시절을 우체국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시스템 속에서 그렇게 발버둥친 것은 그나마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무미건조한 관료주의 시스템만큼이나 특별한 사건이 없이 속되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저면 인생 또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니 도대체 이따위 것을 뇌라고 달고 다니는가요? 글쓴이가 누군지는 절대 알고싶지 않지만 하여간 단군이래 최악입니다. 완벽하게 반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구요. 공공의 목적을 가진 우체국에서 그에 반하는 인물이면 하룻만에 짤렸지 어떻게 12년을 근무합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부해? 시스템 속에서 발버둥을 쳐?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 무미건조한 관료주의? 지루한 일상? 심심하고 무미건조? 처음부터 끝까지 정반대입니다. 소설 속의 치나스키는 우체국 시스템을 철저하게 즐긴 인물입니다. 딱 맞는 직업을 찾은 거죠. 그리고 그 공간의 허술한 틈을 재빨리 발견합니다. 그 허술한 톱니바퀴를 마음껏 유린합니다. 한 마디로 즐기는 거죠. 그것은 마치 톰과 제리에서 생쥐 제리가 고양이 톰을 갖고 노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직장은 놀이터와 마찬가지입니다. 경고장을 날리는 상사는 딱 고양이 톰입니다. 말 그대로 톰과 제리에요. 치나스키는 딱딱하게 죽어있는 우체국에 생기를 불어넣고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우체국은 점점 시트콤이 되어갑니다. 이 소설은 기승전결의 줄거리가 없다고 하는데 시트콤은 원래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그는 관료주의 시스템의 어색하고 불완전하고 낯선 틈새들을 재빨리 포착하고 그 어색한 것을 최대한 어색하게, 낯선 것을 최대한 낯설게 하며 그 틈새를 벌리고 다닙니다. 말하자면 약한고리를 들추고 다니는 것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처럼. 김기덕 감독처럼. 치나스키의 일은 임시집배원입니다. 정식 집배원도 아닌 임시집배원이 집배원의 종아리를 노리는 덩치 큰 개들을 피해서, 문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집배원에게 쓸데없는 말을 붙이는 무료한 할머니들을 피해서, 집배원을 강도취급하는 정신병자들을 피해서, 궂은 날씨와 더위와 씨름하면서,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낯선 거리를 헤매는 것은 한 마디로 구조론에서 말하는 약한고리의 경연장이라 할 것입니다. 치나스키는 사회의 어색하고 불완전하고 덜 손질된 그런 고리들을 찾아내 톰과 제리의 숨바꼭질을 벌이면서 신나게 소동을 피우며 시트콤을 찍어댑니다. 그것은 매우 유쾌한 놀이입니다. 물론 그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감당못할 정도로 확대될 때는 숙취 때문이다. 경마하러 갔다, 섹스를 했다 어쩌구 하며 귀엽게 얼버무리는 초식을 구사하지만 그건 본질이 아닙니다. 아래는 출판사 리뷰인데 역시 최악의 최악의 최악입니다. 이건 정말 뇌라고 달고 다닌다면 골프채로 300야드를 날려버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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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우체국』은 여태껏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끊임없이 독자를 당황시키는 작품이다. 금기시되는 욕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하지만 선의는 물론 악의조차 부재하기에 세상 모든 질서에서 자유로운 인간 헨리 치나스키. 여자, 술, 경마 세 가지가 삶의 전부인 하층민 치나스키는 매일 새벽 숙취에 찌든 몸을 일으켜 우체국으로 출근한다. 비에 흠뻑 젖은 우편 자루를 짊어지고, 살벌한 경비견을 따돌리고, 가학적인 상사와 정신 병원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동료들을 견디는 일상 속에서 그는 영원히 노동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그는 우체국 하급 직원으로 12년간 반복적 노동과 비합리적인 관료주의에 시달리면서도,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만은 결단코 사양한다. 지극히 저속하지만 한 점의 여과도 없이 표출되는 그의 자유분방함은 사회가 정한 기준을 당연시하고, 그런 사회의 병폐를 애써 외면하는 이들을 향한 일갈이다. 반노동에 대한 찬가 「우체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반복적 노동에 대한 혐오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치나스키는 1952년부터 3년간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우체국을 떠난다. 그러나 3년 후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와 그 후 10년간 우편물 분류 직원으로 일하며 우체국에 젊은 시절을 바친다. 이 노동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으며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요식과 절차만이 맹목적으로 강요된다. 개인의 개별성은 말살되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는 무시된다. 표준 양식에 따른 반복적인 노동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하도록 강요받는 직원들은 잠깐 급수대에 물을 먹으러 다녀오는 것조차 금지당한다. 헨리 치나스키는 이러한 조직의 위계와 규칙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는 개인차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표준화한 작업 양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규칙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유일한 노동자이기도 하다. 그가 좇는 것은 노동을 대치할 노동이 아닌 노동하지 않는 삶, 산업 사회의 기준에서는 악이지만 개인에게는 축복일 수 있는 반노동이다. [YES24 제공] [부코스키 우체국 리뷰] 책 표지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한없이 노골적이고 저속함을 드러낸 책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속함과 노골적인 표현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쓸 때(1971)와 21세기 지금의 한국- 충분히 저속하고 노골적인- 과의 시간적인 간격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저속하기는 하나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을 등장 인물의 수준에서 그대로 여과없이 표현했다는 점이 장점이자 논란 거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쓸 때 약간 윤색을 해야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은 속내를 드러내는 거친 표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책은 픽션이지만 저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책의 주인공 처럼 저자도 우체국에서 일했고, 경마와 술, 여자를 밝혔다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합니다. 물론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재창조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책 내용은 주인공 차나스키의 일정 기간의 삶 즉 임시집배원, 정식 우체국 집배원, 우편사무원(우편 분류 직원) ....되는대로 내키는대로 사는 생활을 쓴 것 입니다. 소설 전체가 그냥 시간 흐르듯이 써서 한 개인의 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과도한 일을 하지 않고, 뚜렷한 목표지향도, 미래 설계도 없는 삶입니다. 보는이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입니다. 쉽게 읽힙니다. [작성자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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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퍼온건 책소개를 하려는게 아니고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의도입니다. 방향성이 안 맞잖아요. 어떻게 정반대로 해설할 수가 있다는 겁니까? 반노동 운운하는건 작가의 의도와 전혀 안맞는 엉뚱한 주장입니다.
부코스키는 우리 삶의 어색하고 불완전한 부분,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약간 낯이 붉어지거나, 시선을 돌려 외면하거나, 그냥 딴청을 피우며 얼버무리는 걸로 대충 넘어가는 삶의 약한고리들을 낱낱이 들추어 그곳에 진정한 삶의 에너지가 있음을 포착해내는 사람입니다. 그 방법으로 삶에 에너지를 태우고, 활력을 불어넣고 삶을 긴밀하게 조이는 사람입니다. 삶이라는 나사가 빠져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나사를 박고 기름을 칠하는 사람입니다. 삶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거죠. 출판사 리뷰나 독자의 리뷰는 완전 정반대로 잘못 읽은 겁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가 얻어야 할 것은 삶의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데서 참된 스타일이 나와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쪽팔리게도 임시집배원으로 취직하여 모르는 동네의, 모르는 길을 찾아, 모르는 사람에게, 모르는 우편물을 전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 저의 질문입니다.
1) 친절한 미소와 예의바른 태도로 이등병처럼 씩씩하고 절도있게 행동한다.(속으로는 덜덜 떨면서, 개쪽팔려 하면서.) 2) 이건 게임 속의 스테이지야 하고 마구마구 격파해 내간다. 그리고 만렙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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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의 우체국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단조롭고 심심하고 엄숙한 곳에 활력이 넘치는 젊은 악동이 침투하여 온갖 귀여운 작은 게임을 만들어내는 거죠. 맨인블랙을 연상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우리가 개척해야 할, 깨달음이 정복해야 할 인류의 미개척지가 많이 남아있다는 거죠. 그래서 즐거울 수 있습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저자들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받은 서평 외에는 자신의 저서에 대한 평을 읽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조건적 정보라는 확률 기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서평자의 자질이 지극히 높지 않다면 서평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서평자의 수준을 드러낸다. 물론 이런 원리는 판단을 내릴 때에도 적용된다. 보통의 서평은 좋은 평이든 나쁜 평이든 책에 담긴 내용보다도 서평자 자신을 묘사한다. 나는 이런 메커니즘을 비트겐슈타인의 자라고 부른다. 자가 정확하다고 확신하지 못할 경우, 자를 써서 테이블을 측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테이블을 기준으로 자가 정확한지 측정하게 된다. 자를 신뢰하지 못할수록, 테이블보다 자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게 된다.』
몇 차례 읽고 또 읽는 "행운에 속지 마라(나심 탈렙 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읽고보니 서평에 관한 내용이 떠올라 책에서 보고 타이핑 해서 올려봅니다.
동렬님이 말씀하셨던 "친연"으로 보면
니콜라스 나심 탈렙과 동렬님은 베스트 프렌드 그 이상인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