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민은 사람들이 쉬운 구조론을 턱없이 어려워 하는데 있다. 사실이지 너무나 쉬운 것이다. 그런데도 어려우 하는 이유는 워낙 기초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초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고, 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초보적인 상식이라는데 있다. 중 1의 난이도가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이다.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간과했다 치고, 까먹었다 치고, 모르고 빠뜨렸다 치고 문제는 필자가 그것을 그동안 누누이 강조하고 지적했다는데 있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이거 심각하다. 왜냐하면 필자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수긍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돌아서면 까먹고 도로 원위치 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글을 도저히 납득을 못하겠다고 하면 필자가 친절히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글은 납득한다는 거다. 그런데 돌아서면 원상태로 되돌아가 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몰라서 모르는게 아니고 사고의 습관 때문이다. 그 습관을 깨야 한다.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안 바꾼다. 필자의 글을 수긍하지만 사고습관은 고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대가리가 깨지도록 깨져야 한다. 그런데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깨려고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깨는 거다.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거다. 크게 한번 깨져야 한다. 아주 박살이 나야 한다. 피를 철철 흘려야 한다. 그냥 시큰둥하게 그런가 보다 하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새벽 2시에 마을 한 바퀴 돌고와야 한다. 잠이 안 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깨져야 깨닫는다. 깨져야 바뀐다. 상처가 나고 피가 나야 변한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질이다. 입자는 쉽다. 무슨 이야기든 대화를 시작하는 지점이 입자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어순은 주어→술어이기 때문이다. 주어가 입자다. ‘철수야 밥먹자.’ 하면 철수가 입자다. 힘은 더욱 쉽다. 입자가 떠 주면 반드시 방해자가 나타난다. 장애물이 나타난다. 주인공이 뜨면 악역이 뜨고, 남자가 뜨면 여자가 뜨고, 여당이 뜨면 야당이 뜨고 둘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운동은 더욱 쉽다. 그 방해자와 씨름하다가 보면 자동으로 운동이 된다. 입자에서 힘과 운동으로 가는 순서는 사건이 전개하는 순서이므로 자연히 연결이 되는 것이다. 량은 결과다. 그러므로 양은 몰라도 된다. 무조건 마지막이 양이기 때문이다. ‘철수가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고 하면 철수가 입자, 차가 힘, 타고가는 것이 운동, 학교에 도착하면 양이다. 이건 시간적인 진행순서이므로 저절로 되는 것이다. 철수가 차를 타려면 버스비를 내야 한다. 어떻든 힘을 써야 하는 것이다. 힘과 운동은 세트로 가기 때문에 너무나 쉽다. 량은 무조건 최종결과이므로 뒤에 갖다 붙이면 된다. 입자는 주어, 힘은 목적어, 운동은 동사이므로 우리말 어순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트라서 자동확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이 질이다. 즉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어순대로 가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활을 쏜다면 활이 입자, 시위가 힘, 화살이 운동 과녁이 양이다. 여기서 활과 시위와 화살은 세트로 붙어 있다. 이들은 뗄레야 뗄수 없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궁수는 먼저 활을 쥐고 다음 시위를 당기고 다음 화살을 날린다. 과녁에 맞는다. 정확하게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대로 진행하므로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질은? 궁수다. 질은 어떤 사건의 성립하기 전에 결정되는 전제다. 즉 그 사건의 전제조건이 질인 것이다. 질 역시 세트로 붙어 다니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사건이 시작되려면 인원소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신다고 치자. 사건은 커피에서 시작된다. 커피는 입자다. 힘으로 커피를 입에 가져가고, 운동으로 들이마시고 양으로 배가 부르다. 순서대로 가는 거다. 그렇다면 질은? 커피잔이다. 잔이 없으면 커피를 마실 수 없다. 잔이 입자이면 잔받침이 질이다. 잔받침이 입자이면 그 잔받침을 놓을 테이블이 질이다. 테이블이 입자면 그 테이블을 받칠 건물바닥이 질이다. 건물이 입자면 그 건물을 세울 대지가 질이다. 대지가 입자면 그 대지를 받칠 지구가 질이다. 지구가 입자면 그 지구를 받칠 중력이 질이다. 중력이 입자면 그 중력을 받칠 통일장이론이 질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 어디를 가나 질은 반드시 있다. 무조건 있다. 질이 없는 경우는 없다. ◎ 커피가 입자면 잔은 질≫잔이면 잔받침≫잔받침이면 테이블≫테이블이면 건물바닥≫건물이면 대지≫대지면 지구≫지구면 중력≫중력이면 통일장이론.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가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질을 이해 못하는 것은 우리말 어순이 입자≫힘≫운동 순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맨 앞에 오는 주어의 이전단계를 까먹기 때문이라는 거다. 주어 앞에 오는 말이 있다. 모르겠는가?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구성된다. 어떤 진술이든 앞에 반드시 전제가 있고 대개 전제는 생략되지만 숨은 전제는 반드시 있다. 전제는 어떤 말을 꺼낼 때 하는 말이다. 어떤 말을 하든 일본 식으로 ‘에~ 또’ 하거나 혹은 ‘자~!’ 하거나 영어 식으로 'so~' 하거나 거시기 하며 앞에 붙이는게 있다. 예컨대 친구에게 말을 건다고 치자 생뚱맞게 갑자기 말을 꺼내면 이상하다. 애들이 주어 앞에 붙이는 말은 ‘있잖아요.’다. 경상도 머스마들은 ‘안있나’를 쓴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모든 말걸기 앞에는 사나운 ‘무슨 상관이야?’ 혹은 ‘누가 물어봤냐구?’가 붙기 때문이다. 이거 아주 무섭다. 쪽팔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친구라서 충고하는데 말야.’ 하고 자신에게 말붙일 자격을 먼저 부여한다. 엄마들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을 꼭 붙인다. 혹은 ‘보자보자 하니까 하도 웃겨서 말인데’ 하고 주어 보다 앞에 깔고 들어가는 말 있다. 이것이 질이다. 우리는 문장이 주어에서 시작된다고 믿지만 반드시 전제가 있다. 일기를 써도 먼저 날자를 써야 하고 날씨도 기록해야 한다. 편지를 써도 먼저 아무개 전 상서를 붙여야 한다. 책을 써도 머리말이 나와야 한다. 노래를 불러도 반주가 깔려야 한다. 영화를 돌려도 포스터를 붙여야 한다. 시를 써도 제목을 제출해야 한다. 수업을 해도 출석을 불러야 한다. 뭐든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들어가줘야 하는게 있다. 그게 없는 경우는 없다. 축구를 하려해도 애들을 소집해야 한다. 말을 붙여도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깡패가 시비를 걸어도 먼저 어깨를 부딪혀야 한다. 외출을 해도 먼저 화장을 해야 한다. 화장을 해도 먼저 목욕을 해야 한다. 목욕을 해도 먼저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한다. 볼일을 보려 해도 먼저 휴지를 챙겨야 한다. 항상 전제가 붙으며 전제가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근데 이거 상식 아닌가? 예컨대 어떤 사기꾼이 수작을 붙인다고 치자. 말이 앞뒤가 맞고 논리정연하면 사기다. 왜냐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가 없기 때문이다. 전제가 들어가면 상당히 어색해진다. 전제는 토대의 형태로 있기 때문이다.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톱니바퀴가 꽉 맞물려 있는데 전제는 상당히 어색하게 떨어져 있다. 톱니가 꽉 물려 있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예컨대 남자가 전화로 여자에게 갑자기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치자. 하필 생리라서, 하필 입고나갈 옷이 마땅치 않아서, 하필 얼굴에 뽀드락지가 나서, 하필 화장이 안 먹어서, 하필 미장원에서 한 머리가 마음에 안들어서 하는 식으로 반드시 걸리는게 있다. 없으면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없는 거다. 뭔가 어색하고 미묘한 트러블이 있어야 정상이고 없으면 도리어 비정상인 거다. 그건 차마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는 시작되는 거다. 지금 밖에 있는데 입냄새가 걱정되고 양치질을 해야 하는데 마땅치 않아서 당장 데이트를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커피가 있으면 잔이 없고, 잔이 있으면 잔받침이 없고, 잔받침이 있으면 테이블이 없고, 테이블이 있으면 운치있는 정자가 없고, 정자가 있으면 걸맞는 계곡이 없고, 계곡이 있으면 날씨가 개떡이고.. 이 중에 하나는 반드시 걸린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꾸미든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긁적지근한 무언가에 하나는 반드시 걸리는게 정상이며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진행되면 지금 사기꾼에게 넘어가고 있는 거다. 근데 이런건 경험적으로 다 아는 것 아닌가? 말해야 아나?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조치해야 할 이전단계가 있다. 작업하기 전에 단도리(왜어)부터 해야 한다. 집 짓기 전에 비계부터 설치해야 한다. 글 쓰기 전에 먹을 갈아야 한다. 노래 부르기 전에 목청 틔워야 한다. 차 타기 전에 교통카드 꺼내야 한다. 차가 오른쪽으로 가려면 운전자는 먼저 왼쪽을 확보해야 한다. 왼쪽에 차가 오는지 보고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다. 이때 입자와 질은 마주보고 있으므로 방향이 반대다. 항상 진행방향의 반대쪽을 먼저 조치해야 한다. 중요한건 이것이 사실은 우리말의 어순에 들어와 있다는 거다. 꼬마는 사과를 먹기 전에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만 꺼내 먹으면 안돼?’ 그런데 이 말은 사실 불필요하다. ‘엄마 나 사과 먹을께’ 하고 먹으면 된다. 그런데 이 말도 불필요하다. 그냥 먹으면 된다. 누가 먹지 말랬냐고? 누가 허락 맡으랬냐고? 그러나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색하기 때문이다. 마치 몰래 사과를 꺼내먹는 것처럼 보이니까. 먹으려면 알리고 먹는게 자연스럽다. 근데 ‘엄마 나 사과 먹을께.’ 하면 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응’ 하고 대답한다. 잘 들리지도 않는다. 먹으라는 말인지 먹지말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부정적 표현을 쓰는게 낫다. ‘엄마 나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만 꺼내 먹으면 안돼?’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그래 먹으라고. 누가 먹지 말랬니?’하고 똑부러지게 대답해준다. 이런 식의 언어습관은 반드시 있다. 김어준이 ‘졸라, 씨바’ 하는 것도 감정을 끌어올리는 습관이다. 그냥 하면 연기가 잘 안 된다. 유능한 배우들은 대사를 하기 전에 인상을 써서 호흡을 고르고 감정을 끌어올린다. 괜히 화를 내서 씩씩거려야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준다. 그래서 화를 내지 않는 주인공보다 화를 내는 조연이 더 연기를 잘한다. 송강호, 최민식을 비롯해서 연기파 배우들은 대개 조연인게 조연은 화를 낸 다음 말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짜증을 내고 ‘아 씨바 담탱이가 말야.’ 하고 흥분해야 대사가 술술 나와주는 거다. 그대가 어떤 대사를 치든 먼저 말을 거는 절차, 인사를 땡기는 절차, 감정을 끌어올리는 절차, 사건개요를 설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야 그거 거시기 있잖아.’를 쳐놓고 다음에 본론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이러한 질의 자리깔기, 준비동장, 사전정지작업, 사건의 유도과정을 잊어먹고 빠뜨리고 생략하는 이유는 입자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입자 힘 운동은 톱니처럼 물려 있는데 질은 맞은편에 조금 떨어져 있다. 입자, 힘, 운동은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질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무대치고, 준비하고, 리허설 하고, 분위기 잡고, BGM 깔고, 포옴 잡고, 조명 깔고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곧잘 잊어먹는다. 실은 사건이 질에서 촉발된다는 것을 모른다. 질을 바로잡아야 문제가 술술 풀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깨달음은 질을 깨닫는 것이다. 질은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과 반대쪽에 있다. 실제로는 하나의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인간은 입자부터 사건을 파악하므로 입자가 서 있는 지점의 반대쪽이 질인 것이다.
이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질은, 전제는, 준비는, 차리기는, 절차는 항상 있는 것이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특히 어떤 일을 처음 할 때는 더 중요한 것이며 두 번째 부터는 질이 곧잘 생략된다. 그래서 잊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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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입자인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므로 질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건은 반드시 질에서 시작됩니다. 두 번의 반전으로 질을 포착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말하기 전에 감정 끌어올리는 훈련, 외출하기 전에 옷 입는 훈련, 글 쓰기 전에 먹 가는 훈련, 밥먹기 전에 상차리는 훈련 말입니다. 밥상은 엄마가 차려주고, 먹은 하인이 갈아주고, 옷은 시녀가 입혀주고 그런 식으로 질을 생략해 버린다면 실전에서 왕창 깨집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권하는 바입니다. 잊어먹었던 질을 포착할 때 당신의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전제가 되는, 멍석깔아놓고 기다리는 그 질은 항상 한가지인가. 철수가 차를 타고 학교에 간다. 여기서 질은...?
질은 개인마다 다른가 정답이 있는 보편적인 어떤 것인가? 맥락을 알면 정답이 있다는 뜻인가. 결국 맥락을 알아가는게 구조론인가...
오 쉽다.
이거보고도 뒤돌아서 까먹으면 진짜.. ㅜㅜ
그래도 이해 안되면
더 쉽게 설명해주실거죠 ㅎㅎ
감사합니다.
드라마의 제왕보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꿈 꾸다가 문득
이 말들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느끼다가 새벽에 깼는데...
이 글이 올라와 있네요.
머리속에 맴도는 말들을 제대로 정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이 펼쳐져도 맨 처음 시작된 단 하나의 것에 담을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수많은 것이 펼쳐져도 단 하나의 그것으로만이 다 담아 낼 수 있을 뿐이다.
빅뱅이후 펼쳐진 우주, 연기법으로 펼쳐진 인연, 나로 시작된 내인생, 어떤 일을 시작했을때 맨 처음 그마음.
질이 입자로 펼쳐져 수많은 것이 펼쳐져도 결국 그 질만큼이다.
그리고 수없이 펼쳐지는 것들은 질로만 다시 담을 수 있다.
영사기의 작은 빛이 스크린에 큰 화면을 만들지만 다시 그 화면은 영사기 안의 필름에 갇히게 된다. 되돌아 가는 것.
질에서 입자로 독립하면 이미 영사기가 켜진 것이다. 그 이후 펼쳐진 모든 이야이기는 오직 질만이 다시 가져갈 수 있다. 질에만 그 모든 얘기를 담아낼 수 있다.
최초의 상자가 있다. 거기에서 수많은 것들이 다 나왔다.
빅뱅이후 우주의 시작...
그러나 현재의 우주를 모두 다시 담아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빅뱅의 한 점일 뿐이다.
그러므로 질은 아주 작은 한점이 폭발해서 펼쳐진 것이다. 그 빅뱅현상을 그동안 지구는 무수히 복제했고, 인간도 무수히 복제했다.
인간의 깨달음도 이를 복제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인간이 깨달음으로 빅뱅한 결과이다.
무엇인가를 해도,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해도, 무엇인가 완성하려 해도 깨달아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비로서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본다는 것은 질을 본다는 것이다.
빅뱅은 만남이다.
사람의 깨달음도 무엇인가와 만나서 빅뱅한 것이다.
서로가 만나서 접점을 이루어 터지는 그 지점이 빅뱅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퍼져나간다.
그러나 그 퍼져나가고 펼쳐진 것도 질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 질만큼이다.
질로 다시 수렴된다.
사람이 처음을 생각하고,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하고, 근원을 더듬는 것도 질을 탐구하고 알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제는 문득 사람이 뭔가에 대해서 깨달을려면 그만한 사건이 있어야 하고 만남이 있어야 하고, 거기서 충격과 깨짐이 있어야 하는데...사람은 이런것과 부딪히는 것을 싫어한다.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했다. 몰라도 되니까 마음에 충격이나 내가 깨지는 것이 싫으니, 그 이전 상태가 좋으니 나에게 그런 일들 안생기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들도 많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그냥 깨지지 않고 평탄하게만 사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를 깬다는 것은 어쨌든 큰 것과 부딪혀서 자신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고통을 모두가 과연 바라고 있을까? 그것을 모두 감당할 자신이 있을까?
한번 조우하고 나면 다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기 때문에 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막을 건너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좋네요 공감 만땅 - -
mrchang//철수가 차 타고 학교에 가려면
먼저 그 학교에 입학을 해야겠지요.
남의 학교에 가면 소사 아저씨가 혼낼테니까.
그렇네요^^*
"몰라서 모르는게 아니고 사고의 습관 때문이다. 그 습관을 깨야 한다.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안 바꾼다. 필자의 글을 수긍하지만 사고습관은 고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
글 감사합니다. 이번글이 질을 정말 쉽게 깨닫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쉬운 글이네요... 제가 10년 넘게 이곳의 단골이 된 것은 아마도 제 안에 질에 대한 느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질이 이거다... 충분히 이해했다 하면서도... 어리석게도 그래도 질은 어렵다.. 돌아서면 느끼게 되는 것은..
마치 질이 단 하나의 전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중첩돼 있는게 아닌가 하는 고민 때문입니다.
매매의 전제가 시장이지만, 그것이 포함된 쇼핑몰일수도 있다는 전제, 엠피3을 먹어버린 스마폰시장일 수도 있다는 전제... 이런 전제들이 자꾸 중첩돼 있는게 아닌가... 이런 느낌 때문에 가다가 막히든 듯 해요.
그래서 기승전결의 결이 오기 위해 도대체 기에 어떤 전제가 딱 그 질일까?
나라는 입자의 전제로 가정, 회사, 건강, 인격 등 왠지 다양한 전제들이 중첩돼 있는 것 같고
그중 이런 결과를 몰고 온 진짜 전제를 중첩돼 있는 다양한 전제 중 찾아내는 것이 힘든 것같다. 이런 고민이요...
슈퍼스타케이의 우숭자라는 입자와 결과의 전제는 타고난 목소리일까, 거기에 뛰어든 도전정신일까? 심사위원의 의도요구를 파악하는 눈치일까? 그런 전제들이 중첩돼 있는 것은 아닐까?
콩이라는 입자가 싹을 튀울 때 전제가 햇빛이 될 수도 있고 물이 될 수도 있고, 산소가 될 수도 있고, 흙이 될 수도 있고..여러가지 중첩돼 있고... 그래서 막상 전제를 찾으려 하면 헷깔리는 것이 아닐까?
전 요 지점에 고민하고 있는데.. 조언 좀 구할게요...
"콩이라는 입자가 싹을 튀울 때 전제가 햇빛이 될 수도 있고 물이 될 수도 있고, 산소가 될 수도 있고, 흙이 될 수도 있고..여러가지 중첩돼 있고... 그래서 막상 전제를 찾으려 하면 헷깔리는 것이 아닐까? "
이 모든 전제가 ..조건이 다 맞아야 싹을 틔우지 않을까요? 이것은 콩이 싹을 틔우기 위한 환경이라서.
콩이 싹을 틔우기 위한 전제조건은 환경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조건이 충족이 되니 우승한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잘된 것이라는 생각...
기똥찬 // 전제는 신입니다.
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면 진리거나 자연이거나 완전성입니다.
중간 전제는 폐기하고 최종단계가 진짜입니다.
콩이라는 입자의 전제는 자연입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게시물이 떴다면
그게 네이버 덕분이냐 다음 덕분이냐 이러면 곤란하죠.
인터넷 덕분이죠.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만나면서 점차 관심을 가지고 서로 노력을 하고 만들어 간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구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노력을 해서 사귀도록 만들어 낸다고.
그런데 노력을 해서 되는 경우가 있고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게 바로 질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 친구에게 말했던 것은
어차피 만나는 순간 결정되기 때문에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고 했거든요.
이미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 결정되기 때문에
뒤에 무슨 짓을 해도 안 될 사람은 어차피 노력으로 안 되는 거다 라고...
그게 바로 "질"이라는 요소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질"이라는 요소를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떤 만남이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20대 초반에 결혼하면 거의 실패입니다.
조선시대 방식으로 중매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실패확률 60퍼센트.
30대 이후에 결혼하면 거의 성공입니다.
그 나이가 되면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확률 60퍼센트.
그런데 왜 결혼을 한다, 결혼이 옳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거죠?
만나는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은 미학개념이고 결혼과 그다지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 결혼은 중매결혼이 최고입니다.
결혼과 사랑은 별로 상관성이 없습니다.
사랑은 어느 일방 혹은 양쪽의 희생을 요구하는 겁니다.
서로 손해를 안 보겠다고 하면 사랑이 희생을 해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서로가 손해를 안 보겠따고 발을 빼면
사랑이 희생을 하고 결국 사랑이 깨진다는?
암튼 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게 아니었는데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그냥 어떤 매력있는 사람을 만나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게 되는 경우가 있고
안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게 질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 결혼해서 아들낳고 딸낳고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렬히 사랑하다가 사랑중독으로 깨진 커플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취하지만 대신 인생이 깨집니다.
사귄다는 것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만나는가입니다.
사귀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이 성공인 거죠.
부부라든가 결혼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이렇게 한정시키면 그럴수록 실패입니다.
매력있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든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을 성공으로 삼아야 하는 거지
외부인에게 입증할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라는 거죠.
40대 결혼은 성공률이 몇 퍼센트가 될걸로 보십니까? 참고로 곧 불혹고개 넘어가는 솔로입니다.
40대는 뭐 어떻든 결혼했다면 그 자체가 성공이지요.
백퍼센트로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기죠? 전 우울
해요 하하하하
가능성 만땅이셔요. 우울해하지 마셔요.
감사,감사, ^^
좋은 글로 뭔가를 깨닳은 느낌입니다. 덕분에 ^^
철수와 학교와의 관계, 여자와 남자의 관계,영화와관객의관계, 엄마와아들의관계..
입자,힘,운동,량의 관계가 바로 질을 나타내는것인가요?
질을 아는것, 즉 깨닫는것은 그 관계를 아는것이고
관계를 앎으로써 그리고 그 관계를 바꿈으로써 높은 차원의 관계로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요?
구조론 이것만 알면되다 II가 곧 올라 올 듯...
노랑고구마/
단순히 관계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장이 실제로 존재하여 있는 하나의 분명한 실체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무대 안에서 주인공과 엑스트라들 사이의 역할이 있는게 아니고
무대가 있고 연극이 있고 작품이 있다는 거죠.
연출자도 있고 감독도 있고 조감독도 있고 미술담당도 있고
소품담당 뭐 있을건 다 있습니다.
서부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사이의 은원관계가 있는게 아니라
서부라는 무법지대가 있는 거에요.
어색하고 뻘쭘한
각자의 포지션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그런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 이곳은 상식도 법도 안 통하는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서부구나 하고 알아먹어야지
좋은놈이 좋고 나쁜놈이 나쁘다고 사람탓을 하면
이건 곤란한 겁니다.
문재인과 안철수도 지금
법도 상식도 안 통하는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서부에 와 있는 거에요.
그러나 법이 없으므로 관습법이 있고
상식이 없으므로 진보진영의 공론 시스템이 있고
있을건 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하는 겁니다.
안철수는 갑자기 지지도가 문재인으로 가는걸 보고 깜짝 놀라겠지만
관습법과 시스템이 개입한 것입니다.
이게 관례가 되고 관습헌법이 되어
앞으로의 천년을 흔들어 버릴 건데
그 천년 역사의 무게가 가만 있겠냐구요?
법이 없으니 내맘이다 하는 쇄끼는 총맞습니다.
장고가 짠 하고 나타나서 쏴버립니다.
글로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