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익숙한 사고의 습관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상당히 훈련을 해야 한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며, 이는 인간이 원래 '있는 그대로 못 본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이 100명에게 '있는 그대로 그리라'고 하면 과연 그 중에 몇 명이 있는 그대로 그릴까? 0명이다. 단 한 명도 있는 그대로를 그리지 않는다. 원근법을 체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백퍼센트 왜곡한다. 뇌가 이미지를 텍스트화 하므로 그림은 점점 기호로 변한다.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은 둥글다, 코는 세모다, 손가락은 다섯 개다, 하는 식의 데이터가 개입하여 적극적으로 왜곡한다. He just smiled and gave me a vegimite sandwich (잊을 수 없는 개미와 배추만의 그 샌드위치") 팝송을 한국말로 왜곡해서 듣는 코미디가 있었다. 어떤 단어를 보여주면 그 단어로 들린다. 그렇지 않다면 영어가 안 들린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겠는가? 초딩 귀에는 들리는데 어른 귀에는 안 들린다. 2와 e의 차이는 경상도 사람에게만 들린다고 한다. 이미 귀가 왜곡되어 있다. 깨달음은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며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포지셔닝 게임이라는 왜곡된 게임의 장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원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못보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절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정하라! 당신은 지금 눈을 감고 있다. 물체의 질을 찾기는 쉽다. 옷은 섬유로 되어 있고, 한옥은 나무로 되어 있고, 기계는 쇠붙이로 되어 있다. 망치는 쇠로 되어 있지만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손잡이가 빠진다. 그 부분이 약한 고리다. 물건을 제조할 때는 되도록 같은 재료를 써야 한다. 가구를 만들 때는 가급적 못을 쓰지 말아야 한다. 나무와 나무가 잘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질 적인 것이 섞이면 반드시 탈이 난다. 이것이 질의 이해다. 디자인은 심플해야 한다. 외부와의 관계는 1 대 1 관계이므로 자체적으로 1을 이루어야 한다.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하는 부위는 최대한 가려주어야 한다. 점과 선과 면으로 꺾이는 부분은 넥타이나 손수건이나 장신구나 소매깃으로 분명하게 표시해야 한다. 이는 시각의 교란을 막는 것이다. 질의 결합원리다. 문제는 사건의 질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은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약한 고리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 창피함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기동하기 때문이다. 까뮈의 이방인이 이를 잘 말하고 있다. 법정은 어색함을 피할 의도로 뫼르쏘는 나쁜놈이라고 정해버린다. 거짓을 투입하여 자연스러움을 위조해 낸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폭로된 인간의 정체다. 약한 고리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는 약한 고리의 어색함을 폭로한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애매한 관계의 남녀가 애매한 장소에서 만나 애매한 사랑을 애매하게 연주한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뒤틀려 있다. 남녀는 그 운명의 시소에서 시소가 기울어지는대로 허둥대며 별꼴이 반쪽이 된다. 깨달음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애매한 장소에서의 어색함을 피하려는 회피기동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애매한 장소를 명확한 장소로 바꿀 때 약한 고리는 보호된다. 그것은 청중의 박수갈채다. 무대에 올랐을 때 청중의 박수와 앵콜이 그 부분을 매끄럽게 처리해준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해준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듯이, 엄마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때 아기는 비로소 철이 들 듯이, 여론이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 떼쟁이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거듭나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왜곡된 프리즘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삶의 무대 위에서 연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깨달음은 완전성의 깨달음이다. 불완전성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위화감이 드는 장면이다. 질-입자-힘-운동-량은 하나의 연속동작이므로 자연스럽다. 자연이 자연인 것은 그렇게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걸림이 없이 매끄럽게 전개할 때 자연은 아름답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11월에 난데없이 폭설이 쏟아지는 수도 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교란은 항상 일어난다. 입력부의 질과 출력부의 양이 약간 어색하다. 입자-힘-운동은 단단히 결속되어 있으나 질과 양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특히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어색하다. 무대에 오를때와 내릴때가 어색하다. 나올 때는 그나마 낫다.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내려오기 때문이다. 오를 때가 가장 위험하다. 청중의 연주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수를 치지 않기 때문이다. 약한 고리다.
문제는 관측자의 포지션이다. 인간은 입자 위치에서 보므로 입자-힘-운동-량만 포착하고 질을 빠뜨린다. 실수는 당연하다. 어색함과 위화감, 부자연스러움, 창피함을 당한다. 그 지점이 스타일로 보호해야 할 약한 고리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초읽기가 그러하다. 주변의 격려와 지지자의 응원이 약한 고리를 보호한다. 안철수는 10만 지지자를 민주당사 앞에 집결시켜 위력을 과시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어색해졌다. 특히 박선숙의 밤중생쇼는 매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문재인은 비교적 많은 박수를 받고 있다.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른다. 리허설없이 무대에 섰을 때 그곳이 약한 고리다. 청중의 박수는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장치다. 스타일의 완성은 청중의 박수를 유도하는 훈련이다. 커피는 커피잔으로 보호하고, 커피잔은 잔받침으로 보호하고, 잔받침은 테이블로 보호한다. 계속 가면 자연과 진리와 완전성과 역사와 신에 이르게 된다. 아기는 엄마가 지켜보므로써 보호되고 인간은 신이 옆에 있어서 보호된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보호받으려면 더 많은 청중의 박수를 끌어내야 한다. 환경과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상호작용 해야 한다. 둔감한 자는 청중의 박수소리를 듣지 못한다. 역사의 맥박소리를 듣지 못한다. 진리의 새벽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싸이가 8억뷰를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들은 파멸당한다. 그들은 신의 보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스타일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어색함을 돌파하는 수단이다. 모르는 남녀가 우연히 같은 공간에서 토대를 공유하게 되었을 때, 난데없이 등장한 침입자는 그 남녀로 하여금 만남의 밀도를 끌어올리게 한다. 영화나 소설의 정해진 공식이다.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관계당사자 상호간의 모순에 따른 낙차, 절묘한 조합, 환상적인 궁합, 멋진 화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정도, 공간의 비좁음, 환경의 간섭, 시간의 촉박함 따위다. 그럴 때 어색한 남녀도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는 당연히 멋진 음악이 받쳐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위대한 문학작품은 어떤 피할 수 없는 닫힌 공간에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4시’처럼 공간의 협소함과 시간의 촉박함 그리고 이질적인 침입자라는 3요소에 의해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의 전형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포착할 수 있다. 모든 소설은 일리아드 아니면 오디세이다. 일리아드는 근대성을 확보하고 있고 오디세이는 문학성이 없는 봉건소설이다. 일리아드는 닫힌 공간이고 오디세이는 열린공간이기 때문이다. 걸작이냐 태작이냐는 여기서 백퍼센트 결정된다. 대개 이야기는 주인공이 집을 떠나는데서 시작된다. 원래 이야기라는 것이 집을 나갔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봉건소설은 문학성이 없다. 주인공이 집을 나서는 순간 꽝이다. 근대문학은 닫힌 공간의 창출에서 시작된다. 일리아드의 공간은 닫힌 공간이다. 아킬레스는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전투에 말려든다. 극적인 장면은 친구 프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에 일어난다. 문재인의 운명처럼 아킬레서는 닫힌 공간에 선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불완전한 자 아킬레스가 완전한 자 헥토르와 조우한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일리아드는 말하고 있다. 인간보고서다. 그 안에 문학성의 핵심인 과학성이 있다. 과학없는 문학은 가짜다. 아킬레스의 무대는 어색한, 부자연스러운, 약한 고리다. 완전한 인간 헥토르를 만나자 고갈되었던 아킬레스의 배터리가 충전된다. 둘의 전투는 남녀의 지독한 사랑과 같다. 서로를 죽이려는 살상의 전투가 아니라 자기 안의 전부를 끌어내는 미학의 향연이 된다. 토대를 공유하는 닫힌 공간이 낳음의 자궁이며 보호되어야 할 약한고리다. 그 공간에서 시간의 촉박함, 공간의 협소함, 이질적인 요소의 매개로 에너지는 충전되고 위대한 만남은 이루어지고 관계는 완성된다. 북과 북채가 만나 소리를 낸다.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전설적인 회전은 완성되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허공을 떠도는 이야기만이 끝없이 자라난다. 오디세이는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한다. 선택은 맘대로다. 어느 길로 갈까? 상관없다. 이왕이면 용을 퇴치하여 공주를 구하는 걸로 하자. 문학성은 사라진다. 인간보고서가 아니다. 과학성도 없고 현대성도 없다. 관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김수현표 주말연속극이다. 그러나 마지막 오디세이의 귀환은 닫힌 공간에서 일어난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40여명의 구혼배가 죽치고 앉아 난장판을 벌어져 있었다. 거기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모두 죽일 수 밖에. 그들은 모두 귀족이다. 가족들이 군대를 끌고와서 복수를 한다. 파멸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길로 터벅터벅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왜?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보고서가 작성된다.
아킬레스의 등을 떠민 것은 친구의 죽음이었다. 오디세우스의 등을 떠민 것은 20년간의 방황의 무게였다. 기승전결의 결대로 가지 않을 수 없다. 방황을 끝낼 좁은 공간에 도착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집은 좁고, 20년의 여행은 길었고, 시간은 촉박하다. 부인이 남편을 선택하기로 한 날자였기 때문이다. 필연의 기승전결 구조가 작동한다. 아킬레스의 의지가 아니라 그 결의 의지가 작동한다. 역사의 의지가 작동하고 진리의 의지가 작동하고 신의 의지가 작동한다.
삼국지연의에서 문학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제갈량의 칠종칠금이다. 남만의 맹획과 싸우는 이야기는 떠나는 이야기다. 나관중에 의해 날조되었다. 반면 방어전의 묘사는 문학성이 높다. 방어전은 필연의 구조가 작동하는 닫힌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 인간은 신과 만난다. 고정된 물체의 질을 찾기는 쉽다. 추상적인 사건의 질을 찾기는 어렵다. 왜 전태일은, 안중근은, 윤봉길은, 아킬레스는, 오디세우스는 죽음을 향해 똑바로 직진하는 길을 선택했을까? 좁은 공간, 촉박한 시간, 이질적인 침입자 때문이다. 누가 그의 등을 떠밀었을까? 그 공간의 무거운 공기가 등을 떠밀었다. 중요한 것은 그 질이 관계이고, 그 관계가 A와 B 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미 무대는 세팅되었다. 빠져나갈 수 없다. 필연의 구조를 읽어야 한다. 일리아드는 말한다. 아킬레스는 그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고. 아킬레스 안의 모든 것을 들킬 수 밖에 없었다고. 오디세이는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그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고. 노무현은 말한다. 사건은 기승전결의 결따라 끝까지 진행한다고. 당신의 진정성을 들킬 수 밖에 없었다고. 그렇다. 사건 그 자체의 내재한 결에 의해 존재는 움직여간다. 그것이 질이다. ◎ 입구와 출구 부분이 취약하다. ◎ 입구 부분의 질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 인간은 어색함을 회피하므로 질을 깨닫지 못한다. ◎ 공간과 시간의 압박 및 침입자의 매개로 질은 작동한다. ◎ 질은 균일하고 심플하고 명확할 때 1을 이루어 관계맺기를 돕는다. ◎ 청중의 박수는 에너지를 증폭하여 자연스럽게 질을 성립시킨다. ◎ 스타일은 질을 압박할 청중의 박수를 미리 훈련하기다. ◎ 역사와 진리와 자연과 신의 압박이 보호자가 된다. 질의 포착은 무질서 속에서 질서찾기다. 휘저어서 에너지를 투입하거나 혹은 공간과 시간을 좁히거나 혹은 외부의 불순물을 투입하면 질이 작동하여 입자로 결과한다. 박수를 쳐주면 노래를 부른다. ◎ 언어의 질 – 대화 속에서 숨은 전제를 발견하라. ◎ 행동의 질 – 낯선 환경에서 인사를 발견하라. ◎ 게임의 질 – 시합에 앞서 소집을 발견하라. ◎ 관계의 질 – 서로 공유하는 토대를 발견하라. ◎ 사랑의 질 – 만남에 앞서 친연을 발견하라. ◎ 차 한 잔의 질 - 잔받침을 발견하라. ◎ 물건의 질 - 손잡이를 발견하라. ◎ 사건의 질 - 유도과정을 발견하라. ◎ 전쟁의 질 – 갈등의 증폭과정을 발견하라. ◎ 존재의 질 - 밀도를 발견하라. ◎ 에너지의 질 - 바운더리를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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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행은 자기 내부의 욕망 때문이 아니고 바깥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어색함 때문입니다. 하는 일의 실패 때문이 아니고 신의 완전성이 끝없이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색함으로부터 도피하려 하므로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관계의 어색함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받아쳐서 해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만났을 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몰아치는 파도로부터 숨지 말고 그 파도에 올라타야 합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권합니다.
http://gujoron.com/xe/?mid=Moon ∑ |
알바착시 확산 " " 알바믿다 참패..
구조론은 추상적 사고의 교과서가 될 것이오.
내가 학교 만들면 의무교육과정으로 넣을 것이오.
<구조론 기초> <구조론 심화> <구조론 응용>
기타 <구조론 패턴 분석> <구조론 미학> <구조 진화론> 등등.
『어색함으로부터 도피하려 하므로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관계의 어색함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받아쳐서 해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 아주 매력있는 이성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말을 걸어볼까 콩닥콩닥 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뭔가 안 좋았습니다.
왜 그냥 지나쳤는지 후회가 남더군요.
후회를 하면서도 말 걸어봤자 어색하기만 하고 안 좋았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적용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 거는 그 어색함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받아쳐서 해소하는 게 맞는 걸까요?
언어의 질 부분에서는
대화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언어의 질이 달라진다는 얘기로 생각해도 될까요?
이를 테면
제가 저희 아버지와 대화에서 예전에는 항상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대화의 핵심은 서로 함께한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인데
항상 서로의 주장을 말하다 스트레스만 받곤 했죠.
지금은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해도 제 의견과 같지 않아도
굳이 반박하거나 하지 않고 그냥 다 들어드립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저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대화에서 언어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대화의 핵심을 비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생각한 이런 부분이 말씀하신 언어의 질 부분의 부합하는 것입니까?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걸면 안 되죠. 왜? 어색하니까.
정면으로 받아친다는 말이 무리수를 두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색한 데는 어색한 이유가 있다는 거죠.
여친이 전화를 안 받을 때? - 이유가 있습니다.
여친이 화가 났을 때? -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친이 사과를 안 받아줄 때 -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 - 내가 미안하다고 두 번이나 말했는데 왜 사과를 안받아주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때우려 하면 곤란합니다.
패션의 변신을 몰라봤다든가 칭찬을 해주지 않았다든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어색한 것은 분위기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색하지 않을만큼 자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면 충분한 연습과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좀 써야 한다는 거죠. 대화술도 연습하고.
어색해도 밀어붙여라가 아니고 어색하지 않을만큼 대비하고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길거리 헌팅을 하려면 돈 좀 들여야 합니다.
언어의 질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말씀인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숨겨진 전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안철수가 배짱좋게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최후에 양보할 마음이 있으니까 저렇게 배짱좋게 나오는구나 이렇게 봤거든요.
반대로 봐야 한다는 거죠.
예컨대
한국인이 일본인 가정에 방문했을 때
'저녁 먹고 가게' 이 말은 저녁식사시간이니 당장 네 집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 듣고 흥분한 한국 네티즌들 보세요.
일본인들은 참 정이 없어.
어떻게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이 저녁을 안 준다는 말이 되냐구
동방상놈왜국같으니라고.
이렇게 화를 내지만
사실은 고도로 상대방을 배려한 말입니다.
어색하지 않게 웃으면서 헤어질 기회를 준거지요.
주인이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 손님이 버티고 있으면 서로 어색하니까요.
모든 말에는 전제가 숨어 있는데 그것을 헤아리지 않으므로 오해하게 되지요.
문재인캠프에서 형님답게 양보하겠다는 말은
아우답게 먼저 양보할 기회를 베풀어주는 배려를 하겠다는 말인데
저쪽에서는 반대로 해석하거든요.
뒷 부분의 내용은 아직 안 보셨을걸로 알고 내용을 바꿔버렸네요...
여친이 화난 이유 얘기가 나와서 좀 더 여쭙겠습니다.
제 친구나 주변의 대부분 남자들은 하는 말이
여친이나 아내가 화났을 때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나갈 때까지 버틸 뿐이라고.
어차피 이유가 없이 그런 거니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본인도 알지 못 하는데 상대가 알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에 빠질 때도 있지만
구조론 사이트에서 글을 읽으면
절대로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이든
이유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한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여친이 화났다고 했을 때
남자는 어쩔 줄 몰라하고 답답해하는 대화 형태는
개그 프로에서도 자주 다뤄지고
최근에는 문-안 두 후보에 비유되기도 했지요.
도저히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이유가 없는 거다.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냥 넘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라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말을 하지요...
이유가 있는 겁니까?
긴 설명을 떠나서 이유가 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그걸 극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유를 모르면 결코 그 차이는 좁혀지지 않는 거니까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거 시시콜콜 다 이야기 하면 연애박사로 오해될까바 간단히.
지난번 글에 ...히필 생리라서 하필 얼굴에 뽀드락지가 나서
하필 입고나갈 옷이 마땅치 않아서 등등 열거했는데..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도 분명합니다.
누나 있는 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더 잘 대응합니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남자도 잘 대응합니다.
여자도 남자를 좀 만나봐서 남자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여자의 잘못이나 착각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잘 대응하는 남자 찾다가 바람둥이 만나는 여자도 많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웃어주면 다 풀어지는데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면 다 풀어집니다.
"질이 작동하여 입자로 결과한다."
입자가 " 힘으로 "
힘이 " 운동으로 "
운동 " 량으로 "
***
세력전 " 조직전으로 "
조직전 " 돌파전 "
돌파전 " 기동전 "
기동전 " 동원전 "
***
MBЖ의 마음 " 알바의 조직 "
알바의 조직 " 알바비의 지급 "
알바비의 지급 " 알바글 등장 "
알바글 등장 " 알바글 추천수 "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