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3864 vote 0 2008.01.31 (22:44:56)

    

전모를 보아야 한다. 나무를 보아서 안되고 숲을 보아서도 안 된다. 손가락 끝을 보아도 안되고 달을 보아서도 안 된다. 그 가리키는 사람과 가리켜지는 달 사이에서 배달하고 배달 받는 의미를 보아야 한다. [뜰앞의 잣나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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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오류인줄 알면서도 그 오류를 답습하는 방법으로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학습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멀리 있는 금보다 눈 앞의 은을 취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지만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하여 조금씩 배워 가는 학습본능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어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된다. 배우고 깨우치려는 그 버릇을 버려야 한다. [뜰앞의 잣나무 중에서]

글쓰기와 글읽기

달을 가리키면 달을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눈으로 보아서는 자기 안의 달을 보지 못한다. 마음으로 봐야 진짜다.

TV를 시청한다면 어떨까? 드라마를 이해해야 하는걸까? 아니면 방송국과 안테나와 스크린으로 이어지는 방송의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TV를 봐서는 참되게 보지 못한다. 그 드라마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가 주인공이 되어야 진짜다.

작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드라마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신의 드라마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가주는 것이다. 그 신의 무대에서 지켜보는 신 앞에서 함께 연기하기를 원한다. 함께 그 드라마를 쓸 집필자를 원한다. 책을 읽어주는 독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달마실도 마찬가지다. 역할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독자의 포지션에 중독되지 말아야 한다. 배우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학습본능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는 진짜 역할을 찾지 못한다. 부디 이르노니 달을 보지 말라. 손가락을 보지 말라. 차라리 눈을 감으라. 달은 네 안에 있다.

작가는 독자 덕분에 수입을 올리지만, 장미는 햇볕 덕분에 무럭무럭 자랄 수 있지만, 사자는 사슴 덕분에 오늘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지만,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로부터 비롯한 인세수입이 아니고, 장미에게 필요한 것은 자라게 해주는 햇볕이 아니고, 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허기를 달래주는 사슴고기가 아니다.

신의 드라마 속에서 작가는 제 몫을 연기할 뿐이다. 다만 함께 무대를 휘저어놓을 그 연기의 파트너를 원한다. 장미는 꽃을 피울 때 까지, 향을 전파할 때 까지 진짜가 아니다. 그 꽃이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제 이름을 얻지 못한다. 사자는 그 정글의 생태계 밸런스를 책임질 때 까지 진짜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짜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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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그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왜 이야기를 꾸며내서 남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거지? 소설은 무엇이고 수필은 또 무엇이고 시는 또 무엇이지? 왜 그런 글쓰기 형식이 있어야만 하는 거지?

진짜 글은 뭐지? 수상록은 또 무엇이고 산문이면 어떠하며 운문은 또 무엇이지? 분명 글에는 형식이 있다. 왜?

진짜 글을 써야 한다. 시도 아니고, 수상록도 아니고, 운문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도, 수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기교로 꾸며진 글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토해나온 진짜 글이 있어야 한다. 큰 나무에서 떨어진 과실의 씨앗이 짐승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또다른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나듯 널리 울려퍼져야 한다. 그렇게 울림과 떨림이 전파되어야 진짜다.

명상가의 진짜 글은 무엇일까?

작가의 관점이 드러나 있는 글이 진짜 글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서 있는 위치 말이다. 어느 수준에서 바라보는가? 세상 앞에서 굽어보는 작가 자신의 포지션이 드러나 있는 글이 진짜 글이다.

실기시험의 수험생은 2분이나 3분을 공들여 피아노를 연주하지만 심사관은 겨우 2초나 3초를 듣고 점수를 준다. 1초 지나서 심사관의 어깨가 움직이면 불합격, 2초 후에 움직이면 중간점수, 3초 후에 움직이면 합격이다.

무엇인가? 관점이 있다.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는가를 본다. 달을 보는지 손가락을 보는지 아니면 진정 자기 마음 속의 달을 찾아내는지를 본다. 1초만 봐도 그 사람의 포지셔닝을 알 수 있다. 거기서 90프로 이상의 견적이 나와주는 거다. 이 게시판에 어떤 리플을 쓰건 혹은 본문글을 쓰건 3초를 읽기 전에 그 사람의 수준에 대한 판단이 선다.

이론 필요없다. 반론 필요없다. 설명 필요없다. 해명 필요없다. 명상가의 세계에는 그런거 없다. 단지 포지셔닝이 중요할 뿐이다. 이쪽에서 토스를 올리면 곧 저쪽에서 스파이크를 먹일 수 있는 포지셔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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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형식을 가진다. 소설은 위기를 조성하여 독자를 긴장시키고 그 위기의 해소를 통해 절정감을 느끼게 한다. 기본틀은 정해져 있다. 거기에 온갖 사건을 대입시키고 온갖 서술과 묘사의 양념으로 요리하기다.

시는 댓구의 대칭성과 압운의 반복성을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대칭과 반복을 통한 긴장과 이완이다. 댓구는 강약과 장단과 고저의 팽팽한 맞섬에 의해 긴장을 조성하고 압운은 반복으로 이완시킨다. 모든 시에는 대칭성과 반복성이 있다. 정형시든 자유시든 반드시 있다.

수필은 관찰 혹은 관조를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관찰이든 관조든 보는 데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이 은은한 긴장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위트와 패러독스의 해학이 이완시킨다. 분명히 수필의 형식이 있다. 에세이든 미셀러니든 형식이 있다. 보이는 형식이든 보이지 않는 형식이든 형식이 있다. 어떻게든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다시 이완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계속 긴장시켜도 안 되고 계속 이완시켜도 안 된다. 그러한 긴장과 이완의 대칭 및 반복의 밸런스가 그 글의 등뼈가 된다. 모든 클래식한 전통에는 그것이 강조되어 있다. 등뼈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화 되었을 때는 극적 대칭성이 약해지고 대신 반복성이 강해진다.

한 편의 드라마에는 사건영역과 멜로영역이 공존하고 있다. 극장영화든 TV드라마든 그렇다. 사건영역은 긴장시키고 멜로영역은 이완시킨다. 사건만 가지고는 드라마가 안 된다. 멜로만 가지고도 드라마가 안 된다. 사건은 문제의 해결과정을 보여주고 멜로는 그것을 관객에게로 되돌린다.

사건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다. 그냥 강건너 불구경하듯 사건을 구경하라는건 드라마가 아니다. 괴물이다, 폭탄이다, 테러다, 도둑이다, 이것만 가지고는 드라마가 안 된다. 괴물과 싸우는 가족의 이야기가 멜로처럼 깔리는 것이다. 괴물이 중요한게 아니고 가족이 중요한 거다. 괴물은 가족을 한강다리 아래로 끌어모으는 장치에 불과하다. 괴물이 사건영역이면 가족은 멜로영역이다. 괴물이 긴장시키고 가족이 해소시킨다. 항상 이러한 구조가 있다.

멜로가 없으면 그 사건이 나와 무관한 남의 이야기로 된다. 멜로는 사건을 내게로 가져오는 장치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사랑이라는 테마를 벗어날 수 없는 이치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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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가의 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명상가의 글은 수필에 가깝다. 그러나 명상이 곧 수필은 아니다. 손 가는 데로 써도 되지만 손 가는 데로 쓰는 글은 아니다.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수상록이 될 수도 있고, 일기가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높이가 드러나 있어야 한다.

결이 있다. 결이 드러나야 한다. 하나의 등뼈에서 차차로 가지쳐 나가는 구조가 드러나보여야 한다. 그것은 정상에서 본 풍경을 들려주는 것이다. 철학은 관이며 명상은 관점을 보여주기다. 시점과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기다.  

형식이 있다. 그 형식이 정형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정상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명상가의 할 일은 그 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방법으로 모두에게 되돌려주기다.

내 안에서 나의 왕국을 완성시키는 방법으로 네 안에서 너의 왕국도 완성될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기다. 부분을 철두철미하게 완성시킴으로써 전체의 완성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기다. 그렇게 지평을 열어젖히기다. 그렇게 긴장시키고 그렇게 이완시키는 거다. 그 정상의 뾰족함에서 긴장하고 그 정상이 본래 내 안에 있음에서 이완하는 거다.

너와 내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긴장시키고 네가 나의 다른 버전임을 아는 데서 이완시킨다. 긴장과 이완의 결이 있다.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처음 기초를 놓고 담장을 치고 차차로 건물을 올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다. 그 과정에 결이 드러난다. 어떤 기준에서의 일관성을 보여주기다. 그 기준에서의 미학을 보여주기다.

하얗게 쌓인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찍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뒤따르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진로가 거기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얀 백지 위에 처음 기초를 놓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그 위에 무수한 기둥과 서까래와 벽돌이 올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상가의 긴장이다. 그러나 그 기초가 이미 놓였으므로 기둥자리는 자동으로 정해져 있다. 편안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 그것은 명상가의 이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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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의 독자는 소설 읽고 그 내포한 권선징악의 논리에서 교훈을 배우고 감동하는 것으로 잘도 본전 뽑아가는 독자요, 최하의 독자는 시를 읽고 감상에 젖어 연애편지에 잘도 써먹는 현명한 독자다. 그런 바보들과 대화하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작품 속에 구축되어 있는 결을 얻어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어야 진짜다. 그렇지 못하다면 김기덕 영화 백 번 봐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제발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마라.

시인이 원하는 사람은 그 시를 읽고 감동 백배하여 책을 열심히 팔아주는 독자가 아니라 시인이 한 구를 던지면 즉석에서 댓구를 쳐주는 사람이다. 소설가가 그 수집된 에피소드들로 한 틀의 이야기를 조직하면서 부닥쳤던 온갖 문제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어야 진짜다. 세상을 창조한 신의 친구가 되려면 창조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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