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세상 사람들 내 방식의 신과의 대화에 대해
깨달음 세상 사람들도 밥먹고 살려면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 세상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방금 생각해 낸 거다. 깨달은 사람이냐 못깨달은 사람이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수준이하들을 배척하기 위함이다.
신은 완전하다. 그 완전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완전할 때 통한다. 통하는 세계가 있다. 그 통하는 세계의 연주자가 있고 또 청중들이 있다. 그 연주자와 그 청중들이 깨달음 세상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별세계가 있다.
깨달음은 신어(新語)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방식의 소통의 수단이다. 말하자면 에스페란토와 같은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은 자주 회합을 하는데 그들의 모임에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그 집단의 매력이다.
깨달음의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들도 자주 회합을 갖는데 그 모임에서도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멋진 일이 있다. 그것이 이 공간의 존재이유다. 그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주자가 있고 또 청중이 있다.
음악이 없다면 장님들이 외로웠을 것이고 그림이 없다면 귀머거리들이 외로웠을 것이다. 그 언어는 눈 멀고 귀 먹고 말 못하는 헬렌 켈러들을 위한 특별한 언어다. 그 언어는 단어를 조직하여 만들어지지 않고 인생을 조직하여 만들어진다.
완전할 때 통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그 세계의 톱포지션을 차지함이다. 톱포지션은 전지전능한 이의 포지션이다. 소설의 작중 화자가 가지는 포지션이다. 작가는 다 알고 있으니까. 작가의 입장에서 불가능은 있을 수 없으니까.
톱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주할 수 없다. 작가가 될 수 없다. 그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면 안 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
통함이 있다. 연주자와 연주자는 체험의 공유로 통하고, 연주자와 청중은 감성으로 통한다. 귀 없고 눈 없고 입 없어도 깨달음의 감성이 있으면 통한다. 다만 깨달았느냐 못깨달았느냐 수준에 붙잡혀 있으면 가망없다.
이 사이트는 내일 문닫아도 상관없다. 단지 한 명의 진짜를 구할 뿐이다. 아제님은 다섯이면 충분하다 했는데 이 넓은 세상에 설마 다섯이 없겠는가? 어설프게 주워들은 금강경 지식으로 거울닦으실 분들은 배척이다.
‘나는 바보다’ ≪- 이런 소리 하실 분들은 번지수 잘못 짚었으니 제발 얼쩡거리지 마시길. 아니면 닥치고 연주나 즐기면서 감성을 키워보시든지. 바보들은 환영하지 않는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기도 반복되면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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