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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5792 vote 0 2008.03.01 (13:47:59)

쿨하다는 것

파울로 코엘료의 글은 아무리 많이 팔려도 노벨문학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칼릴 지브란의 글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외수의 글도 비슷하다. 문단에서도 비주류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문학의 본령은 깨달음에 있다. 많든 적든, 옳든 그르든 깨달음의 구조를 담아낸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다. 알게 모르게 다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를 직설해서는 문학이 되지 않는다.

직설하면 문학이 아니라 경전이다. 그 경전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면 혹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다면 문제다. 코엘료의 글은 상당부분 직설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의 글은 경전에 가깝다.

작가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면 실패다. 어떤 주제이든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게 해야한다. 권선징악이 주제라면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한다’고 글자로 쓰지 않았는데도 독자가 그렇게 느끼게 해야 한다.

권선징악은 주제다. 주제는 낮은 것이고 스타일이 진짜다. 주제는 에피소드들을 결합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주제가 없다면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따로 놀아서 어색해진다. 긴장감이 없다. 지루해진다.

반대로 주제가 너무 강렬하게 드러나면 답답해진다. 경직된다. 자유롭지 않다. 스타일이 진짜다. 스타일은 자유를 주는 것이다. 자유를 주면 난삽해진다. 애드립이 과하면 유치해진다.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스타일의 성공은 자유로운데도 난삽하지 않고 애드립을 해도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의 글이 그렇다. 그의 글은 긴장감이 없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연상시킨다. 주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중된다.

주제가 부각된 글은 김수현 연속극과 같아서 한 페이지를 읽으면 계속 읽어야 한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손을 뗄 수 없게 된다. 계속 읽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압박이다. 그래서 나는 읽지 않는다.

스타일이 드러난 글은 압박이 없다. 아무 페이지나 들추어 읽어도 재미가 있다. 뒤에서 부터 읽어도 된다. 스포일러가 들통나도 상관없다. 이상의 모든 글이 그렇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그렇다.

그렇게 독자에게 자유를 준다. 상상력의 여지를 준다. ‘감동해! 감동해야만 해. 이래도 감동 안할래?’하는 헐리우드식 압박이 없다. ‘이 장면에서 웃어. 이 장면에서 울어’하는 3류드라마의 압박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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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스타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그러나 대개는 실패한다. 그래서 직설해 버리는데 장선우는 다급했던지 스크린에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즉견여래’라고 써버리는 실패를 저질렀다.

그런 이유로 파울로 코엘료의 글과 칼릴 지브란의 글, 이외수의 글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직설이 일부 섞여 있다.

김기덕도 스크린에다 글자를 쓰는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 특히 그의 활은 은근하게 은유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직설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글 중 일부를 발췌해서 모아놓으면 그대로 경전이 된다.

모두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짓이다. 문제는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깨달음을 스타일로 녹여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깨달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있다.

어설픈 깨달음을 가지고 독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패다. 문단의 총체적 실패다. 실패인 이유는 평론가들에게 애초에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아주 제외시켜 놓고 있다. 평론가들은 언제라도 돌이 반쯤 섞인 금덩이 보다는 백프로 완벽한 은덩이를 선택한다. 그 금덩이에서 순금을 분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평론할 수 있는 것을 평론할 뿐이다.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게 선택된 것들은 언제나 잘 다듬어놓은 이류에 불과하다. 그들이 고흐의 그림을 제쳐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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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다’는 것은 차갑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끈하다는 의미도 된다. 뒤끝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어쨌든 찌질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주제를 버리고 스타일을 얻는 것이다.

말했듯이 주제란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긴장감을 주는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경직된다. 그것으로 앞뒤를 강하게 연결시키기 때문에 경직된다. 자유가 없다.

주제를 버리고 스타일을 얻을 때 쿨하다. 주제란? 나는 남편이다. 나는 교장이다. 나는 어른이다. 나는 아내다. 나는 권위자다 하는 식으로 자신의 배역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 돌아가기다. 왜 인간들이 주제파악에 집착할까? 그래야만 자기 할 일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 일 속에 자기자신을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색함으로 부터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데 TV가 없다면 얼마나 어색할까? 그 방 안의 공기란 얼마나 칙칙하고 무거운 것일까? 그런 거다. 어색하기 때문에 주제를 정한다. 나는 아버지고 너는 아들이다. 아버지니까 아버지의 연기를 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용돈을 주므로 간섭할 권리가 있다. 아버지의 대사는 뭐였지? ‘아들아 숙제는 했냐.’ 그렇게 말을 붙이는 방법으로 어색함을 피해간다. 그럴수록 대사의 폭은 더욱 좁아진다.

최종적으로는 세 단어만 남게 된다. 그것은 ‘밥도. 이불피라. 자자’다. 스타일의 성공은 바로 그것을 깨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부하와 상사, 지금 당장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이런 따위를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의 완성을 찾아내기다.

쿨하다는 것은 차갑다는 것이고 차갑다는 것은 체온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부하와 상사 따위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배역을 벗어던졌다는 의미다.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배역이 없을 때 더 많은 대사와 애드립을 얻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어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 용돈을 주는 대신 성적표검사의 권한을 갖는 고정레파토리를 버려야 친구가 될 수 있다.

바보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자유가 어색하기 때문에 주제를 선택한다. 아버지와 아들로 배역을 나누고 아버지의 권한으로 아들의 사적인 영역에 개입을 시도한다. 용돈을 내밀며 성적표검사를 시도한다.

인간이 찌질해지는 이유는 그래야만 할 말이 있고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살거리를 스스로 조달하지 못하므로 상대방에게서 구한다. 그러므로 개입하고 개입하므로 찌질하게 달라붙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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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는 구조가 있다. 질서가 있다. 내적 정합성이 있고 자체 완결성이 있다. 주제가 있고 스타일이 있다. 깨달음이 있다. 그것이 없이 문학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떤 용기에 담아낼 것인가이다.

깨달음을 건축에 비유할 수 있다. 집을 짓는 것이 건축이다. 그러나 건축자재로 집을 지어서는 그것이 집이지 문학은 아니다. 화가라면 빛으로 집을 짓고 음악가라면 소리로 집을 짓고 서예가라면 먹으로 집을 짓는다.

빛으로 짓고 소리로 지어야 예술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은 깨달음이지만 깨달음 자체를 직설해서는 경전이지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집짓는데 열중해서 그 집이 누구를 위한 집인지 잊어서는 곤란하다.

독자가 문학에서 쾌감을 얻는 것은 따로 있다. 권선징악의 교훈은 에피소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장치에 불과하다. 뭔가 교훈을 주기 위해서 문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이라야 진짜다.

문학에 깨달음이 숨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쾌감을 얻는다. 그것을 스타일로 녹여낼 수 있다면 완벽한 문학이 되겠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문학의 본령인 깨달음 자체로부터는 멀어질 수가 있다.

완벽한 자동차인데 사람이 제어할 수 없다면 문제다.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운전자가 편해야 한다. 인간적이어야 한다. 평론가들은 객관적인 자동차의 성능만 평가하고 주관적인 운전자의 편의는 평가하지 않는다.

파울로 코엘료, 칼릴 지브란, 이외수, 이상, 김기덕 등은 일정부분 깨달음을 스타일로 녹여내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분명 스타일이 있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하다. 일부 직설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평론가들에 의해 평가절하된다. 반영되어 있는 깨달음의 가치는 논외가 된다. 실제로 독자들이 쾌감을 얻는 것은 깨달음에 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평론가들은 평가할 수 있는 부분만 평가한다.

그들은 주제의 고상함이라든가, 문장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서술과 묘사의 재치라든가 작가의 입담이라든가.. 쓸데없는 그러나 평가하기 쉬운, 객관적 비교가 가능한 부분만 평가한다. 자동차의 기계적인 성능만 평가한다.

그래서 문학이 객관식이 된다. 가짜다. 문학은 주관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학작품들 중에 자동차의 기계적인 성능에 치우치지 않은 작품은 아직까지 없다.

파울로 코엘료는 위험하다. 깨달음을 직설하고 있다. 그는 스타일을 개척했지만 완벽하지 않다. 그가 깨달음의 결과로 스타일을 개척했지만 평론가들은 스타일이 부실하므로 그 깨달음도 가짜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 깨달음의 부분은 깨닫지 못한 평론가가 검증할 수는 없다. 사실이지 어설픈 깨달음은 사이비가 모방하기 쉽다. 많은 류시화식 아류와 가짜들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평가절하 된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보석같은 깨달음이 있어도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라도 흙속의 불완전한 다아이몬드 보다는 순도 100퍼센트의 완벽한 납덩이를 선택한다. 어쩌면 그게 차라리 나은지도 모른다.

그들 청맹과니들이 깨달음을 평가하겠다고 나서면 더 위험하다. 그들은 이외수의 글 따위는 무협지 작가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문열의 글이야말로 잘 쓴 무협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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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의 글에는 구조가 있다. 배워서 학습한 어떤 결론을 혹은 도덕적인 훈화를 열거형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듯이 밑바닥부터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있다. 백지 위에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있다.

그러한 쌓아감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 퍼즐의 위치를 예측하게 한다. 독자들은 거기서 통쾌함을 얻는다. 그것은 퍼즐을 맞출 때의 쾌감과 같다. 또 잘못 끼어든 퍼즐을 제거했을 때의 쾌감과 같다.

삶에도 그것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그 스타일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그 순간의 유쾌함을 생산할 수 있다. 삶의 밀도를 얻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묻노니 이미 그것을 얻었는가?

처음에는 음정만 생각한다. 음정은 앞뒤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직될 수 밖에 없다. 앞이 걸치적거려서 뒤를 방해하고 뒤의 다가옴에 앞이 쫓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강약을 알게 되면 밀도를 조절할 수 있다.

밀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음정에서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다. 그럴 때 무한한 자유가 있다. 앞이 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뒤에 앞이 쫓기지 않는다. 앞뒤가 따로놀아도 어색함이 없다. 그러므로 쿨하다.

제식훈련을 하는 군인들은 앞사람이 줄을 틀리면 뒷사람이 곤란해진다. 단 한 사람이 틀리면 전체가 다 틀린다. 그러므로 압박감을 느낀다. 주제란 그런 것이다. 옆사람에게 영향을 받으므로 개입하게 되는 것. 끈적해지는 것.

그러나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은 옆사람이 틀려도 다른 사람이 멋지게 커버해준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제식훈련의 병사들은 밀착해야 어색함이 드러나지 않지만 무용수들은 서로 거리를 벌릴 수록 자연스럽고 좋은 것이다.

덧글..

다른분 글에 리플 하나 달아보려 하다가 점점 길어져서 이렇게 되었다. 본의가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퍼즐맞추기와 같다. 좋은 글은 혹은 스타일은 언제 어디서든 가지를 칠 수 있다.

조립식 장난감이라면 부품이 반드시 정해진 위치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러므로 찌질하게 본드로 붙여야 하지만, 레고블럭은 아무데나 아무때나 아무 위치에서라도 뭔가를 생산해낼 수 있다. 깨달음은, 스타일은, 쿨하다는 것은 레고블럭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찌질하게 달라붙지 않아도, 언제라도 제 위치에서 어색함을 피할 수 있는 완성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쿨할 수 밖에. 그러므로 내려진 어떤 결론이 아니라 그것을 유도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 레고블럭은 전부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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