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주의 교육론 창의의 구조 교육의 핵심은 창의다. 창의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다름은 같음의 전제 안에서의 다름이다. 색깔이 다르다면 컬러가 있다는 전제다. 맛이 다르다면 음식이 있어야 하고 냄새가 다르다면 향이 있어야 한다. ● 소통됨 - 이다/아니다 ● 하나됨 - 있다/없다 ● 맞섬 - 같다/다르다 ● 맞물림 - 하다/되다 ● 만남 - 맞다/틀리다 같다/다르다는 것은 그 구조가 정밀하게 맞물려 있는 수준의 정도에 따라 다섯 층위의 계급을 가지는 것이며 ‘맞다/틀리다’는 가장 낮은 표면의 같고 다름이고 점점 더 깊숙히 맞물려 들어서 ‘이다/아니다’의 소통구조에 도달한다. 이다/아니다는 근본적인 다름이다. 질이 다른 것이다. 맞다 틀리다는 양이 다른 것이다. 그 질과 양 사이에 입자와 힘과 운동의 다름들이 존재한다. 양의 다름이 모여 운동의 다름을 만들고 운동의 다름이 모여 힘의 다름을 만든다. 이러한 집적구조를 모르면 다름을 발견할 수 없다. 곧 창의할 수 없게 된다. 막연히 다름을 고안해 봤자 표면의 양의 다름일 뿐 바탕에서 질의 다름은 아니게 된다. 질≫입자≫힘≫운동≫량의 구조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는 얽힘이다. 세상 모든 다름은 얽힘이 생산한 얽힘의 다름이다. 다르게 얽혔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포지션이다. 다르다는 것은 포지션이 다른 것이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다른 것이다. 포지션이 얻어지는 이유는 대결할 상대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대결하지 않으면 다름은 얻어지지 않는다. 대칭구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질의 대칭, 입자의 대칭, 힘의 대칭, 운동의 대칭, 양의 대칭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밤과 낮은 서로 대칭된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칭된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다. 막연히 다름을 찾으려 들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칭과 평형의 집적구조를 꿰뚫어보아야 한다. 비로소 창의할 수 있다. 여자와 남자든, 땅과 하늘이든, 밤과 낮이든 모든 구분되는 것이 다 포지션이다. 세상 모든 것이 포지션의 변화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 알고 그 포지션이 대칭구조 속에서 성립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대칭이 평형에 도달할 때 더 높은 층위의 대칭으로 상승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상승이 존재의 본질과 더 깊숙히 맞물려 들어가는 량≫운동≫힘≫입자≫질의 상승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차원의 상승이 어떤 하나의 통제되는 단위 안에서 개체가 주변의 몇 가지 변수와 동시에 맞물려 연동되느냐의 수준문제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많이 맞물려 있어서 더 많은 부분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차원이다. 창의는 곧 분석과 통찰이다. 분석은 5 단계의 대칭구조 안에서 포지션 분석이며 통찰은 낮은 단계의 대칭에 따른 긴장이 일정한 조건 하에서 높은 구조의 대칭으로 옮아가면서 해소되는 단계적 상승구조를 꿰뚫어봄이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모든 창의의 아이디어들은 그 아이디어의 자궁에서 쏟아져 나오는 법이다. 그냥 창의한다는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반드시 모태가 있고 자궁이 있다. 서구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자궁에서 나왔다. 근본은 헬레니즘의 이상주의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고대 수학과 그리이스의 이상주의와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이다. 창의의 수준은 곧 이상주의의 수준이다. 창의할 수 있느냐는 이상주의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태도이다. 무엇이 완전한가? 소통하는 것이 완전하다. 계가 있다. 계 안에서의 일 사이클 진행이 있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시작에서 끝까지 인풋에서 아웃풋까지 있다. 그것이 완성될 때 소통한다. 완전한 종은 울리고 완전한 피리는 소리를 낸다. 완전한 꽃은 향기를 낸다. 완전하지 못한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는다. 무릇 인간의 창의란 그 완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상주의는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영웅숭배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완전해질 때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헥토르야말로 완전한 인격의 영웅이라는 따위의 담론들 말이다. 헬레니즘의 이상주의가 중세에 와서 헤브라이즘의 메시아 개념과 겹쳐졌다. 그들은 신(神)의 모습에서 완전을 찾았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건축, 완전한 회화, 완전한 인격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서구의 모든 창의는 이 완전성의 개념에서 유도된 것이며 여기에 수학이 결합되어 합리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수학이야말로 완전한 건축, 완전한 균형, 완전한 대칭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양에도 이상주의가 있다. 도교의 소통하는 이상주의와 불교의 초월하는 이상주의와 유교의 통제하는 이상주의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긴장 보다는 이완에서 답을 찾는다는 것이다. 반면 서구의 이상주의는 긴장에서 답을 찾는다. 존재는 포지션이며 포지션은 대칭구조 안에서 성립한다. 대칭은 긴장을 유발한다. 여럿이 하나의 지점과 맞물려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도 그에 연동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서구의 이상주의는 팔등신의 인체비례나 건축에 있어서의 황금비례나 소실점이론과 같아서 여럿이 하나의 지점과 맞물려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어긋나면 모두 붕괴된다는 점에 있어서의 긴장된 이상주의다. 반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미인을 논하되 오똑한 코와 땡글한 눈과 오이씨같은 이와 삼단같은 머리칼를 낱낱이 열거하는 식이어서 긴장이 없다. 유교가 강조하는 주나라의 이상정치나 도교가 강조하는 역설의 관점은 긴장의 해소다. 불교가 말하는 평상심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완전한 것은 소통이다. 서구의 이상주의가 그 소통의 조건을 충족함에 주의를 두고 있다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그 소통의 실행에 주의를 둔 것이다. 서구의 이상주의가 일 천만 시청자를 하나의 TV앞에 모아두는 긴장의 이상주의라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그 TV로 드라마를 방영하여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이완의 이상주의인 것이다. 때문에 동양의 이상주의는 수학과 결합되지 못했다. 합리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통의 실행에 주의를 두었을 뿐 소통의 조건에 주목하지 못했다. 참된 이상주의는 긴장을 거쳐서 이완으로 가는 것이다. 먼저 대칭구조를 받아들여야 한다. 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긴장한다는 것은 대장이 연병장에 모인 일만 병사를 하나의 구령으로 통제함과 같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이다.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완은 정예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서로간에 계급구분이 없이 누구든 먼저 상황을 포착하는 자가 리더 역할을 맡아 동료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서로간에 완전한 신뢰와 이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 긴장 - 리더가 요원에게 지시한다. 뇌에서 몸으로 정보를 내려보낸다. ● 이완 - 요원이 서로 협력한다. 몸에서 뇌로 정보를 올려보낸다. 인간은 직관으로 파악한다. 긴장과 이완,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으로 구조를 꿰뚫어 본다. 완전한 것은 기쁘고 자랑스럽고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다만 긴장과 이완은 불명하다. 구조로 말하면 긴장이 이완보다 먼저다. 긴장이 앞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이완이다. 긴장은 배우가 관객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며 이완은 관객이 배우와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긴장을 거친 이완이 완벽하다. 긴장은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인체의 모든 관절이 직결로 맞물려 하나가 되는 것이다. 뇌에서 내려보낸 하나의 명령으로 몸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이때 뇌는 손과 발과 팔과 손가락에 별도로 명령하지 않는다. 밸런스가 맞기 때문에 가능하다. 밸런스가 어긋나면 뇌는 손과 팔과 어깨와 허리와 엉덩이와 발에 별도로 명령을 내려보내야 한다. 이때 투수의 투구는 실패로 돌아간다.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만다. 고참 투수들 중에는 어금니가 모두 뽑아지고 없는 경우가 많다. 인체의 모든 관절을 직결시켜 하나의 명령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머리가 흔들린다면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완은 충분한 훈련에 의해 인체의 모든 관절부위에 밸런스가 정착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이를 악물고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관절이 스스로 밸런스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모든 병사가 임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대장의 명령이 없어도 팀은 완벽하게 돌아간다. 그것이 이완이다. 병사들이 충분히 임무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므로 대장이 병사를 직접 통제하는 것이 긴장이다. ● 창의는 다름을 찾는 것이다. ● 다름은 포지션 차이에서 얻어지고 포지션은 구조의 대칭성에서 얻어진다. ● 창의는 분석과 통찰에 의해 가능하다. ● 분석은 대칭구조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찾는 것이다. ● 통찰은 대칭구조가 평형에 도달할 때 만남≫맞물림≫맞섬≫하나됨≫소통함의 순으로 더 높은 포지션의 밸런스로 상승하는 원리다. ● 더 높은 포지션의 밸런스를 조정할 때 낮은 포지션에서의 모순은 저절로 해소된다. 그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 통찰력이다. ● 창의는 이상주의의 빛에 의해 가능하다. ● 이상주의는 완전성의 이해다. 완전하면 통한다. ● 완전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직관력을 길러야 한다. ● 직관력은 감정의 긴장과 이완,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으로 존재의 포지션 구조를 꿰뚫어봄이다. ● 서구의 이상주의는 긴장에 주목하고 있고 동양의 이상주의는 이완에 주목하고 있다. 정답은 긴장을 거친 이완이다. ● 긴장은 하나의 중심점에 계 전체가 맞물려 있어서 하나의 명령에 의해 전체가 완벽하게 통제됨이다. ● 이완은 각 단계의 밸런스에 의해 중앙에서의 명령과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통제됨이다. ● 긴장은 1 천만 시청자가 하나의 TV앞에 모여 함께 소통하고 한꺼번에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 이완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별도의 의사결정 구조가 있어서 획일적 의사결정에 따른 리스크가 감소하는 것이다. ● 긴장은 인체가 뇌에서 내려보낸 하나의 명령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도록 근육에 힘을 주어 인체의 모든 관절을 직결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 이완은 인체의 모든 근육과 관절에 완벽하게 밸런스가 이루어져 있어서 무리하게 근육에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직결되어 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의 원리를 파악할 때 직관력을 계발할 수 있다. 인간의 판단은 99프로가 연역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역은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고 직관은 자연의 포지션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자연의 대칭성을 포착함이다. 그 대칭이 자연스러운가 어색한가, 자랑스러운가 부끄러운가, 아름다운가 추한가, 기쁜가 슬픈가, 긴장되는가 이완되는가로 판단한다. 교과서적 지식은 직관으로 판단한 내용을 검증하는데나 사용될 뿐이다. 이성을 만났을 때 특별히 긴장된다면 내 안에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있다는 증거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경계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해 진다면 그 사랑이 완숙했다는 증거다. 그것으로 직관한다.
지적 능력이란 무엇인가? 지능의 차이는 대부분 집중력의 차이다. 집중력 차이는 긴장하는 능력과 이완하는 능력의 차이다. 벌레도 위기를 당하면 한 순간에 지능이 급속하게 높아진다고 한다. 인간도 화가나면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된다. 인간에게 분노가 없다면 표피를 보고 안이한 대응을 일삼게 된다.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을 왜곡하여 판정한다. 분노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최근 과학계의 실험결과가 언론에 의해 보도된 바도 있다. 결국 집중력이다. 긴장하고 흥분하고 몰입하는 능력이다. 집중은 뇌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지 않고 특정 부분을 극대화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긴장이란 뇌의 많은 부분이 활동을 멈추고 특정 부위에서 활동량이 증가하는 것이다. 만약 긴장을 통제할 수 있다면 학습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다. 간단하다. 어떤 사실과 맞물려 있는 변수를 최대화 할 때 긴장한다. 단어를 암기할 때 인체의 어느 부위를 사용하는가이다. 입으로 중얼거리고 볼펜으로 쓴다면 겨우 입과 손을 사용할 뿐이다. 눈과 코와 몸을 전부 사용한다면 학습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다. 그것은 상황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가 단지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상대와의 대칭을 이루는 대결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장이 있는 것이다. 긴장한다는 것은 서로 대칭되어 있다는 것이고 밸런스가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밸런스의 평형이라는 목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 상황에서의 대칭구조를 포착하여 평형이라는 목표를 얻어 동기부여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긴장의 해소는 인간으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 쾌감에 중독될 때 학습능력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그것이 이완이다. 집중력은 긴장에 의한 동기부여와 이완에 의한 쾌감의 보상을 유도하는 능력이다. 긴장은 어떤 주어진 과제에서 구조적 대칭성을 포착함으로써 목표를 얻어 동기부여하는 것이며 이완은 그 대칭구조를 무리없이 통제하는 밸런스를 얻어 쾌감에 도달하는 것이다. 보상받는 것이다. 동기와 보상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긴장과 이완에 따른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함으로서 얻을 수 있다. 부분품이 아니라 완성품이어야 한다. 주어진 문제에 답을 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www.drkimz.com. ∑ |
위급할때 시간이 더딘 이유?…평소보다 ‘많은 기억’ 생성 탓
‘두뇌 편도체’ 풍부한 기억공간 생생히 저장…실제보다 길게 느껴져
이런 느낌은 위험을 인지했을 때 두뇌 한가운데 자리잡은 편도체(아미그달라)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서 비롯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런 순간에는 감정적 반응을 처리하고 저장해 기억을 만드는 편도체가 평소보다 많은 기억 공간을 확보해 풍부한 기억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온라인 의학잡지 <플러스원>에 연구 결과를 발표한 미국 베일러의학대학의 데이비드 이글먼 교수는 “놀랄 만한 사건은 더 풍부하고 촘촘한 기억을 만들어준다”며 “기억이 많을수록, 그 사건은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듯이 느끼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모든 게 새로운 어린이들은 기억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많은 것을 저장하면서 풍부한 기억을 만든다. 반면, 상대적으로 새로운 게 적은 어른들은 기억 공간을 많이 준비하지 않는다. 해마다 세밑이 되면 어린이들은 숱한 추억으로 한해를 돌이키지만, 어른들에게선 “시간 참 빠르다”는 반응만 나오기 일쑤다.
위험이 닥쳤다고 해서 인간의 인지·지각 능력이 높아지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150피트(약 4) 높이의 벼랑 끝에서 뒤로 넘어져 떨어지는 공포스런 상황에서, 피실험자들이 시간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조사했다. 숫자인식 장치를 보도록 한 뒤, 평소엔 알아보기 힘든 정도의 속도로 숫자를 바꿔댔다. 떨어질 때 피실험자들의 인지 능력이 향상됐다면 바뀐 숫자를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느린 화면 처리 방식은, 시간 간격을 평소보다 잘게 쪼개서 빨리 촬영한 뒤 보통 속도로 재생하는 슬로모션 영상과는 다른 셈이다.
이번 연구결과는 정신분열증 등의 시간인식 장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글먼 교수는 “우리의 뇌는 (나름대로) 가상의 현실을 구성한다”며 “잘 살펴보면 실제가 아닌 환상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