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6291 vote 0 2008.03.02 (21:01:11)

쿨하다는 것 2 

모든 글에는 구조가 있다. 운문이라면 기승전결의 정형적인 구조가 있고 더하여 압운이 있다. 압운이 없는 자유시라도 압운의 형식적 대칭성을 대체하는 내용상의 대칭성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소설이라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가 있다. 꽁트나 단편소설이라면 이러한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묘한 반전이 있거나 결말의 강한 임팩트가 있어서 형식적 구조를 내용상의 구조로 대체한다.

반드시 구조가 있다. 그 구조가 겉으로 드러나는 정형적인 구조이거나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 내용상의 구조이거나의 차이 뿐이다. 일기라도 수필이라도 논문이라도 칼럼이라도 하다못해 낙서라도 그러하다.

글짓기는 집짓기와 같아서 토대가 있고 기둥이 있고 서까래가 있고 지붕이 있다. 나무와도 같아서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다. 건물이라면 출입이 있고 나무라면 생장이 있다.

실패한 글과 성공한 글의 차이가 있을 뿐, 드러나는 구조와 은폐된 구조가 있을 뿐 구조가 없는 경우는 없다.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 산다는 것은 집짓기와 같다. 오늘 하루의 삶을 짓는 거다.

칼릴 지브란의 글에는 특별한 구조가 있다. 파울로 코엘료도 그렇고 아멜리 노통도 그렇다. 이외수나 이상의 소설도 그렇고 김기덕의 영화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쿨하다.

요즘 읽고 있는 포르토벨로의 마녀야 말로 진짜 쿨한 인간이 주인공이다. 그는 흥정하지 않고 거래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집을 짓듯이 지어간다. 능한 목수가 누구 눈치보고 흥정하던가 말이다.

그렇다. 삶을 지어가되 집을 짓듯이 누구 눈치보지 말고 애초의 설계도에 따라 척척 지어가자는 말이다. 오늘 하루의 삶을 짓기에 성공하자는 말이다. 매순간의 삶을 짓기에 성공하자는 말이다.

묻노니 그대의 삶에 애초의 설계도는 무엇인가? 그것이 있기나 한가? 그것이 없거나 희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그대의 삶에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을 연출하기에 신(神)은 오늘도 바쁘다.

쿨하다는 것은 구조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신문연재만화처럼 하루분량의 연재물 안에 기승전결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소설 전체의 줄거리에 나타나는 기승전결이 아니라 지금 전개되는 문단 안에도 작은 기승전결이 있다.

그러므로 좋은 글은 어느 페이지를 읽어도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아무 페이지나 중간부터 읽어보고 계속 읽어지면 읽고, 읽어지지 않으면 읽지 않는다.

위고의 장발장이나 뒤마의 삼총사가 이문열의 모든 소설과 마찬가지로 3류소설인 이유는 전체 줄거리를 알아야만 읽어지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도스또옙스끼의 글은 중간부터 읽어도 읽어진다.

쿨하다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지금 이 순간 안에 기승전결이 있으므로 어제와 내일과 이어질 필요없고 또 타인과 관련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쿨하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처럼 쿨하다. 내 삶의 동기부여가 나의 내부에서 유발된다는 의미다. 타인의 개입에 의해서 나의 목표가 정해지거나 영향받지 않는다. 남이야 뭐라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밀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위치에서 강약이 있고 완급이 있고 템포가 있고 리듬이 있고 그것이 조절가능한 것이다. 내가 글을 쓰되 세줄씩 띄어서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 단락 안에 대칭성 부여하기.

한 단락의 글 안에 저울 하나가 있어야 한다. 그 저울은 독립된 저울이다. 앞뒤와 상관없이 타인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평형계를 가진다. 그 저울이 기울고 바로서는 데서 긴장이 얻어진다. 고로 독자는 집중한다.

예술가들이 쿨한 이유는 그 저울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저울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들이야 뭐라든 눈치보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들은 타인의 저울을 빌리려 들기 때문에 찌질하게 달라붙는 것이다.

도공은 좋은 그릇과 나쁜 그릇을 판별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진다. 기준에 맞지 않는 그릇은 즉시 깨뜨린다. 그 판별기준의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닌데도 의외로 많이 팔렸다더라 하는 세상의 소문에서 귀닫기 위해서.

미학이 있어야 한다. 그 미학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모든 순간 모든 위치에서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기준을 가져야 한다. 젊어서는 타락했는데 나이들어 문득 깨닫고 바른 길로 왔다는 식은 유치한 거다.

찌질한 드라마의 공식은 비뚤어진 인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것을 계기로 바른 길로 돌아온다는 식이다. 이건 정말 아닌 거다. 매 순간이 찬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할 뿐.

금은 원래부터 금이다. 단지 흙속에 섞여서 그 자태를 드러내지 못했을 뿐. 좋은 스승을 만났다거나 따위의 계기가 있다면 찌질하다. 판소리 명창이 뛰어난 고수(鼓手)를 만남은 태양과 달처럼 원래 존재하던 것이 그제 드러난 거다.

이오덕과 권정생의 만남은 누가 누구를 돕고 누가 은혜를 베풀고 누가 은혜를 입고 그런거 아니다. 그러므로 권정생은 이오덕의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 너와 나의 만남은 원래 있던 것이 이제 표면화 된 것 뿐이다.

쿨해야 한다. 밀도를 가져야 한다. 스타일을 얻어야한다. 오만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강약과 장단과 완급과 리듬과 템포를 조절하는 호흡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살아있어야 한다. 내 안의 저울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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