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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717 vote 0 2008.05.23 (23:06:00)

구조주의 미학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소통의 양식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일정한 양식이 필요하다. 소통의 접점에서 요철(凹凸)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입력과 출력의 볼록하고 오목한 부분이 일치할 때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전축의 바늘과 레코드판의 홈이 만날 때가 그러하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안테나가 전파를 잡아챌 때가 그러하다. 여자와 남자가 맞선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음이 통하는 온전한 만남을 위해서 절묘한 밸런스가 필요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접점에서의 일치가 일어나야 한다. 일치를 위하여 서로는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완성될 때 통한다. 통해야 낳는다. 완성이 없고 통함이 없고 낳음이 없는 채로 말로 떠드는 소통 주장은 헛될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이심전심이어야 한다. 참된 소통은 낳음을 위한 포지션들의 바른 결합이다. 공격수와 수비수 사이에 포지션들이 바르게 조합되어 있다면 구태여 말이 필요하지 않다. 절로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래야 소통이다.

닭은 때가 되어야 알을 낳는다. 그 알이 수정란이어야 거기서 병아리가 나온다. 때가 되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고 포지션들 사이에 요철(凹凸)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는다. 낳지 못하는 소통은 가짜다.

인간이 언어와 문자로 소통한다지만 자연은 언어 없이도 소통하고 문자 없이도 소통한다. 꽃은 그 화려함으로 벌을 초대하고 그 향기로 나비를 초대한다. 넉넉하게 소통하고 있다. 열매로 결실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미학적 완성도

참된 소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포지션들의 바른 결합이고 둘째는 타이밍이다. 전자는 공간이고 후자는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에서 절묘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통의 접점이 있다. 도킹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본래 불완전하다. 서로 다른 둘의 만남이기 때문에 백퍼센트 완전은 없다. 그러므로 완성도가 존재한다. 모든 소통하는 것에 완성도의 문제가 걸려 있다.

소통은 낳음을 위한 소통이며 낳는 것은 자궁이다. 자궁이 없이 태어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쳐 유도된 것이며 그것을 유도하는 자궁이 있다. 소통은 그 자궁을 세팅하는 절차다.

소통의 양식에 있어서 미학적 완성도가 문제로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자궁은 사전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일어나는 순간 타이밍과 포지셔닝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고 포지셔닝이 맞지 않으면 소통의 자궁은 해체되고 만다. 참된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말은 했는데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한다. 우이독경에 마이동풍이다. 그러므로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흉내내기 가짜 소통이냐 낳음을 끌어내는 진짜 소통이냐다. 우리가 예술을 논하고 문화를 찾고 심미안을 닦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통이 일어나는 자궁의 세팅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모든 예술작품은 자궁만들기다.

소통의 자궁

아날로그 구조와 디지털구조가 있다. 디지털구조는 완성되어 있는 자궁 속을 일(work)이 통과한다. 음식이 식도를 통과하듯 통과한다. 아날로그 구조는 그 만남의 접점에서 순간적으로 자궁이 성립한다.

전축의 바늘과 레코드판의 홈이 만나는 접점이 있다. 그 접점은 아날로그다. 자궁은 닫혀 있어야 하는데 레코드판의 홈은 열려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완벽은 없다. 퍼펙트는 없다. 약간의 잡음은 반드시 있다.

양식이란 아날로그 구조를 디지털화 하는 것이다. 디지털구조는 작용과 반작용의 접점이 파이프처럼 생겨서 내부를 통과하는 일을 보호하는 구조다. 우리 몸 속의 소화관처럼 하나의 관 형태를 이룬다.

디지털구조라도 최초의 출발점은 아날로그 구조로 되어 있다. 몸 속의 소화관은 닫혀있는 파이프 형태지만 입과 음식이 만나는 입술은 어쩔 수 없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모든 소통은 아날로그 구조에서 일어난다.

아날로그 구조는 작용과 반작용이 만나는 접점에서 순간적으로 파이프를 만든다. 그러나 작용과 반작용은 분리되어 있다. 도킹을 일으키는 두 우주선은 분리되어 별도로 있다. 성으로 접촉하는 남자와 여자는 분리되어 있다.

모든 소통은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된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 둘을 한 순간에 한 지점에 모아서 정지시켜야 한다. 일이 통과하는 하나의 파이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여자와 남자, 꽃과 나비, 바이얼린의 활과 현, 도공와 손과 흙, 요(凹)와 철(凸)을 한 순간에 한 지점에서 정지시켜 절묘하게 맞물리게 세팅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식이 필요하고 완성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비행기를 활주로에 착륙시키는 것처럼 어렵다. 중력과 대지가 작용 반작용을 성립시켜 파이프를 성립시킨다.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다. 안전한 착륙이 있을 뿐 완벽한 착륙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말하지만 소통은 구체적인 결실을 끌어내기 위해 존재하며 그 결실은 적절한 포지션들의 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또 타이밍이 절묘하게 일치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말을 하고 문자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의미를 운반하고 가치를 판정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구체적인 알맹이가 들어 있다. 언어와 문자는 디지털 구조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자를 쓰더라도 첫 출발점은 아날로그 구조일 수 밖에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첫 대면은 아날로그다. 그러므로 포지션이 맞아야 한다. 한쪽이 등을 돌리고 있다면 소통은 실패다.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소통의 양식이며, 소통은 둘의 접점이 일치할 때 이루어진다. 그 일치를 위해 밸런스가 필요하고 그것이 양식의 완성이며 완성될 때 통하고 통하면 낳고 낳지 못하면 가짜다.

미의 완성도 5단계

미에는 다섯이 있다. 예쁘다≫곱다≫어울린다≫아름답다≫멋있다 순으로 미의 질이 상승한다. 완성도가 상승한다. 그것은 만남의 밀도다. 만나기≫맞물리기≫맞서기≫하나되기≫소통하기 순으로 더 깊숙한 만남이 된다.  

● 멋있다(통하기) - 소통의 자궁이 완성되어 있다.
● 아름답다(하나되기) - 시공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A에서 B로 통과한다.
● 어울린다(맞서기) - 둘이 일치하여 밸런스를 이룬다.
● 곱다(맞물리기) - 상대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 예쁘다(만나기) - 상대가 눈에 띈다.

예쁘다는 것은 상대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처음 만남에서의 판정이다. 곱다는 것은 상대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곱다는 만난 다음의 판정이다. 먼저 예쁘다를 통과하고 곱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먼저 만나지 못했는데 맞물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맞물린 다음에 밸런스로 맞서고 맞선 다음에 꼬치에 꿰듯 둘이 관통되어 하나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소통의 자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소통은 그렇게 완성된다.

예쁘다 다음은 곱다이다. 만약 가시가 있다면 혹은 표면에 끈적한 이물질이 묻어 있다면 혹은 냄새가 고약하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징그럽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곱다의 반대는 징그럽다이다.

포유류가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조류가 고운 깃을 가지는 것은 상대를 거절하지 않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파충류와 달리 포유류와 조류의 경우 암수가 부부를 이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울린다는 뜻은 콜라와 햄버거처럼 서로를 보완한다는 의미다. 앙상블이다. 포도주와 치즈, 막거리와 김치, 소주와 삼겹살처럼 궁합이 있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 여기에 밸런스가 있다. 그러므로 맞서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요소들이 하나의 원칙 아래 통일된다는 것이다. 아름은 팔로 안아서 한 아름이다. 요소들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있다. 반드시 있다.

소설이라면 온갖 에피소드들을 꼬치로 오뎅꿰듯 한 줄에 꿰어내는 주제가 있다. 어울린다는 것이 서로 다른 둘이 50 대 50으로 대칭을 이루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아름답다는 것은 그 밸런스의 축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이라면 뼈가 살을 꿴다. 근육이 날이면 뼈가 심이다. 심 1이 날 2를 통제한다. 그 접점에서 A와 B 사이를 관통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것이다.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에 서로 다른 둘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

어울린다와 아름답다의 차이는 움직임을 반영하는가에 있다. 어울린다에서 맞서서 밸런스를 이루는 둘 중 하나가 움직이면 균형이 무너지고 말지만 아름답다에서는 밸런스의 축이 있어서 움직여도 균형이 유지된다.

멋있다는 것은 특별하다. ‘멋있다’ 개념이야 말로 미(美)의 진정한 의미에 가깝다. 아름답다가 단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라면 멋있다는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소통의 자궁을 세팅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심 1이 날 2를 통제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둘이 어떤 하나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절차가 필요하다. 완전히 다른 남자와 여자를 사랑이라는 하나의 꼬치로 꿰어내기 어렵다.

둘을 잡아주고 일치시켜 주는 자궁이 필요하다. 타이밍이 맞도록 기다리게 하고 포지션이 일치되도록 유도하는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고도의 섬세함과 정밀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양복에 넥타이라면 어울린다. 양복에 고무신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게 하려면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바닥에 은은하게 깔아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멋이다.

남자는 축구경기장에서 남자끼리 어울리고 여자는 여자끼리 까페에서 수다떨며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여자를 어울리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열정이다. 멋이다. 역시 깔아주는 것이 있다. 무드가 있다.

고흐는 진흙과 같은 두터움으로 깔았다. 배경무늬 깔듯 깔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배경음악 깔리듯 깔았다. 박수근은 안개처럼 희미한 붓터치로 깔았다. 이중섭은 어린이의 볼과 엉덩이같은 오동통함으로 깔았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서 얻은 추사체 특유의 기세로 깔았다. 석수장이가 돌을 쪼듯이 거침없이 헤쳐 나가는 속도감으로 깔았다. 원교 이광사는 단단한 화강암의 골체미로 깔았다. 양식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미의 완성은 멋이다. 멋은 사랑이다. 사랑의 결론은 낳음이다. 그것은 창조다. 멋은 창조를 위한 자궁이다. 그 자궁에서 낳는다. 아기를 싼 포대기처럼 바탕에 깔아주는 무드가 있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모든 창조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게 함에 의해 얻어진다. 천에 잉크가 묻으면 천을 버린다. 천과 물감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천과 물감이 어우러져 멋진 그림을 만든다. 낳음이다. 창조다.

어떤 것을 완성시켜 독립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소들을 꿰어내는 뼈대가 있어야 한다. 주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독립된 별개의 둘이 소통하고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궁이 있어야 한다.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미의 궁극은 그 자궁을 연출하는 것이다. 아기가 탄생할 수 있는 안정되고 편안하고 고요한 공간을 연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바닥에 깔아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향으로 깔고 무드로 깔고 배경음악으로 깔아주기다.

미는 완성으로 나아가고 소통으로 나아가고 창조로 나아간다. 마침내 낳는다. 미는 창조의 과정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액션이다. 구체적인 행동이고 실천이다. 그러므로 양식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언어로 떠벌리고 문자로 전하는 것은 이미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디지털화 되어 있는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 사랑을 품는 순간에 그 언어와 문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언어와 문자로는 소통하지 못한다. 언어와 문자는 이미 소통의 통로가 개설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진정한 소통은 전혀 모르는 남남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사제가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의 포지셔닝이다.

말로 ‘사귀자’ 해서 사귀는데 성공한 연인은 없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상대방을 붙잡아세워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게 하고 내 말을 들어주게 하고 귀기울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가치의 완성도

미는 서로 다른 둘 사이의 소통을 위한 양식이다. 의미는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며 가치는 그 연결의 완성도를 판정하는 것이다. 의미가 둘을 링크하는 것이라면 가치는 링크의 우선순위를 판정하는 것이다.

연결되어야 낳는다. 연결되지 않고 낳은 경우는 없다. 서로는 친척관계로 연결되고 친구관계로 연결되고 부부관계로 연결된다. 의미는 그 관계가 있느냐이고 가치는 그 관계가 어느 수준의 관계인가이다.

가치란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한 판정의 기준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곧 실천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 행동은 무언가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할까? 그 선택기준이 가치다. 가치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선택하든 취업을 앞두고 직장을 선택하든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를 선택하든 인생은 부단한 선택의 연속이다.

● 성속(통하기) - 창조인가 모방인가?
● 주종(하나되기) - 주도하는가 종속되는가?
● 미추(맞서기) - 보완하는가 충돌하는가?
● 선악(맞물리기) -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 진위(만나기) - 보이는가 감추는가?

창조하는 것이 멋있고, 주도하는 것이 아름답고, 보완하는 것이 어울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곱고, 보이는 것이 예쁘다. 어떤 실천에 있어서는 이 순서대로 선택을 해야 한다. 성≫주≫미≫선≫진이다.

두 가지 선택방법이 있다. 연역과 귀납이다. 연역적 상황은 완성된 자동차를 운행하는 것이고 귀납적 상황은 그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다. 둘은 전혀 반대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선택방법이 달라야 한다.

실천에서는 연역적 선택을 해야하고 학습에서는 귀납적 선택을 해야한다. 연인을 찾을 때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연인과 사귈 때는 성≫주≫미≫선≫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이 순서를 잘못 적용하여 일어난다. 가치판단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문화가 양식을 필요로 하고 인간이 예술을 찾는 이유는 그 바르게 선택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먼저 병뚜껑을 열고 다음 물을 마셔야 한다. 이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뚜껑을 열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지 않고 물을 마실 수 없도록 사전에 세팅해 두는 것이 문화의 양식이다.

그러나 일생생활에서 부닥치는 많은 문제들은 양식이 세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순서를 틀리게 적용하고 만다.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먼저 인사하고 다음 거래해야 하는데 거꾸로 하는 것이다.

아기들은 삐치고 돌아앉아서 엄마가 삐친 자신을 발견하고 ‘왜 그러니?’ 하고 묻도록 기다리는 작전을 쓴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게 하기다. 실패다. 논객들은 공연히 화를 내고 트집을 잡으며 말을 거는 맹랑한 전술을 쓴다.

친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므로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초딩 꼬마가 관심있는 여자아이 주변에 얼쩡거리면서 놀이를 방해하듯이 말이다. 이런 소통의 시도는 실패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인사’라는 양식을 개척한 것이다. 인사는 하나의 문화적 양식이며 소통의 양식이다. 정치인은 뇌물이라는 인사법을 쓰고 연인들은 꽃다발이라는 인사법을 쓴다. 생일이니 뭐니 하며 기념일을 정하는 방법도 있다.

진≫선≫미≫주≫성

진, 선, 미, 주, 성에 계급이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이 개념들은 가치판단의 완성도에 따라 단계적 접근을 하기 위한 레벨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의 수준이다. 명백히 수준차가 있다.

진선미는 알려져 있지만 주종의 주(主)와 성속의 성(聖) 개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진선미는 주를 거쳐 성으로 간다. 그리고 완성된다. 주(主)는 상대방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다.

꼬마의 ‘삐치고 돌아앉아 상대방이 먼저 내게 말을 걸게 하기’ 혹은 ‘상대방 앞에서 방해하며 얼쩡거려서 주의끌기’ 수법은 주도권을 놓치는 잘못된 방법이다. 이런 양식으로는 상대방에 이용될 뿐이다.

성(聖)은 소통의 자궁을 완성함이다. 완전성이다. 그 완전한 자궁에서 창조된다. 모든 가치는 궁극적으로 창조에서 나온다. 낳음에서 나온다. 낳지 못하는 가치는 벤치에서 대기하는 후보일 뿐이다.

진(眞)을 단순히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판단해서는 부족하다. 만남이므로 진이다. 진정한 만남인가 잘못된 만남인가이다. 진짜는 바른 만남이요 가짜는 잘못된 만남이다. 수컷과 수컷이 만나서는 짝짓지 못한다.

조화에 날아든 벌은 꿀을 얻지 못한다. 가치들 중에서 진(眞)이 으뜸인 이유는 진으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은 시작일 뿐 끝은 아니다. 완성은 아니다. 완성은 소통이다. 성이다.

중요도가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건물을 짓는 단계에서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중요도가 결정되고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그 완성된 건물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주≫미≫선≫주의 순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무엇이 선(善)인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이다.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주었는데도 상대가 도리어 화를 내는 수가 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악(惡)이다. 악이 악인 이유는 사회로부터 배척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미(美)인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 미다.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엇이 주(主)인가? 미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주다.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주므로 가지가 자유로이 뻗어나가게 돕는다.

만약 주(主)가 없다면 마른 논에 올챙이처럼 오골오골 모여있게 된다. 리더가 있기 때문에 마음껏 날개를 펴는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들판에서 뛰놀 수 있다. 어른이 없다면 구걸해야 할 판이다.

무엇이 성(聖)인가? 성은 본래 완성을 의미한다. 제사에 쓰일 희생의 몸에 상처가 없어야 한다. 그 완전함이 신을 불러낸다. 신과 소통한다. 그렇게 통하는 것이 성이다. 완성되어야 통한다. 통해야 낳는다.

속(俗)은 불완전한 것이다. 통하지 않는 것이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을 흉내내듯이 학습본능에 휘둘리는 것이다. 낳음이 없는 것이다. 불임이다. 모방이다. 복제품이다. 향기가 없다. 아우라가 없다.

도공이 흙을 빚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가가 작문을 할 때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그 완성된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할 때는 성≫주≫미≫선≫진으로 전개된다.

● 자동차를 운전할 때 - 완성된 차인지 먼저 판단한다.(완성된 차라는 판정이 되면 진짜 차라는 점은 이미 확인된 셈이다.)

● 자동차를 제작할 때 - 장난감 차인지 진짜 차인지 판단한다.(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차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이 순서가 틀려서 일어나는 것이다. 문화가 양식을 필요로 하고 또 상류사회가 엄격한 격식을 따지는 이유는 그 순서가 혼동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사전에 절차를 세팅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가들은 그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순서를 혼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이 그 안에 있고 진정한 소통 또한 그 안에 있다. 양식을 완성한 다음에는 그 양식을 초월해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모든 음악, 모든 문학, 모든 조형, 모든 예술에 구조가 있다. 구조는 긴장을 끌어내는 구조다. 예술은 인간을 긴장시킨다. 불꽃처럼 번뜩이는 소통의 한 순간에 호흡을 멈추지 않으면 소통은 실패로 되기 때문이다.

시조를 예로 들 수 있다. 4.4조는 대칭을 이룬다. 4.4와 4.4가 또한 대칭을 이룬다. 그 겹대칭으로 이루어진 초장과 중장이 역시 대칭을 이룬다. 대칭≫대칭의 대칭≫대칭의 대칭의 대칭이다.

최후에는 (초장+중장)과 종장이 대칭을 이룬다. 초장은 문을 열고 내용물을 꺼낸다. 중장을 그것을 펼쳐낸다. 초장과 중장은 자연의 전개이다. 종장은 자연과 대칭되는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거나 혹은 정치를 풍자한다.

왜 대칭인가? 대칭이 인간을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대칭이 반복되어서는 무의미하다. 반복은 인간을 지루하게 한다. 파격이 있어야 한다. 초장과 중장은 대칭되며 반복되지만 종장에 이르러서는 파격이 있다.

종장이 홀로 초중장을 감당한다. 종장에는 밀도가 걸려있다. 접혀 있는 것이다. 어즈버! 하고 감탄할 때 거기에 여운이 있고 무게감이 있다. 그 묵직한 중량감으로 초중장의 길이에 맞선다.

반복적 대칭구조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에서 파격에 의한 무게감으로의 전환이다. 선의 길이에서 밀도의 질량으로의 차원이동이다. 그 방법으로 완성한다. 소통한다. 발사한다. 방아쇠는 격발되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그 화살이 심중에 맞을 때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파문이 있다. 여운이 있다. 쾌감이 있다. 긴장의 극점을 넘어선 이완이 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쏘아진 화살이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메아리되는 오르가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완성이다. 완성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완결된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처음 시조의 초장에서 문을 열고 다음 중장에서 내용물을 전부 꺼내놓고 종장에서 다시 뚜껑을 덮고 빗장을 채워 갈무리한다.

번듯한 형태를 이루어 완결된다는 느낌을 끌어낸다. 점에서 촉발한 사건이 선과 각과 입체로의 비약을 거쳐 메아리 있는 밀도로 끝이 나야 한다. 더 이상 아쉬움도 없고 미련도 없다는 느낌이 따라야 한다.

아쉬움없는 매조지를 위하여 예술에는 형식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없어도 숨은 형식이 있다. 자유시에도 보이지 않는 호흡이 있고 긴장이 있고 파격이 있고 이완이 있다. 그것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음악이라도 그러하다. 제 1악장의 장중한 전개가 있고 제 2악장의 구석구석 조용한 탐색이 있으며 제 3 악장의 강한 임팩트로 된 마무리가 있다. 1악장이 집을 건축함과 같다면 2악장은 집 주위에 정원을 꾸밈과 같다.

마무리 3 악장은 그 집과 정원에서 뛰노는 주인공들의 열정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그 집과 정원에서 미친듯이 춤을 추는 것이다. 폭풍같은 연주로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쏟아내면 미련없이 완결된다. 완전히 소진된다.

그 달아오른 절정에서 객석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고 심중에 화살은 쏘아지며 과녁에 명중하면 파문 하나 남긴다. 배우가 객석을 향해 쏜 한 발의 화살이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무수한 반향을 낳는다. 그렇게 소통은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프레이즈 안에서의 대칭을 고리로 하여 부단히 바깥에서의 대칭을 탐색하는 연쇄고리와 같다. 고리가 고리를 만들고 더 큰 고리로 나아간다. 높고 낮은 음역에서 길고 짧은 음역으로 구석구석 탐색하기다.

김기덕 감독의 활이 그러하듯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작은 긴장의 조각들을 결집시켜 하나의 큰 활에 시위를 매기고 살을 올린다. 작은 긴장들이 모여 큰 긴장을 만들고 어느 순간에 그 팽팽함을 끊어버린다. 완전히 이완된다.

미술이라도 그러하다. 동양화라면 대개 정과 동의 대칭이 있다. 산과 물, 음과 양, 빠름과 느림, 높음과 낮음, 수직과 수평, 공간과 시간의 얼개가 있다. 그리고 최후에는 덮개 역할의 어떤 통일성이 있다.

고흐는 두터운 질감으로, 박수근은 희뿌연 안개로, 이중섭은 아이의 동적인 곡선으로 통일성을 주어 부분과 부분이 분리되는 어색함과 이질감을 막고 그것으로 뚜껑을 삼고 덮개삼아 자물쇠 채워 마무리한다. 매조지된다.

미학의 최종적인 완성은 스타일에 있다. 멋의 연출이다. 그것은 곧 양식이다. 스타일이란 인식의 핵심이라 할 통일성을 성립시키는 테마가 강조될 때 주변의 배경과 분리되는 데 따른 어색함을 다스리는 기법이다.

스타일을 얻을 때 테마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어떤 작품이든 테마가 있어야 요소들이 꿰어지고 긴장이 유지되며 관객이 귀기울이고 집중한다. 그러나 테마를 강조할수록 어색해진다. 권선징악의 주제를 부각할수록 유치해진다.

틀에 맞춘 것 같고 붕어빵 같고 억지 같고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다. 그런 부자연스런 느낌을 잠재우기 위해 바닥에 깔아주는 배경음악이 있고 배경무늬가 있다. 고가의 비싼 장식품일수록 배경무늬가 화려하다.

어떤 것이든 질감을 주면 그런 어색함이 줄어든다. 동양화는 여백을 두어 산과 물이 마주치는 접점을 불분명하게 처리하는 수법을 쓴다. 모든 어색함은 둘의 긴장된 마주침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물을 그린다면 뒤의 배경과 인물의 충돌이 문제로 된다. 인간의 눈은 촛점에 모이지만 그림은 평면이라서 그 3차원의 촛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경을 또렷하게 그리면 인물이 죽는다.

근대 서양화는 배경을 어둡게 하고 인물에 조명을 주는 기법을 사용한다. 어느 면에서 유치한 기법이라 할 수 있지만 모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예술가는 이 하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만의 벗어나는 방법을 찾았을 때 진정한 작가가 된다. 그것이 스타일이고 멋이고 창조의 자궁이다. 자신만의 자궁을 얻었을 때 진정한 작가로 독립하는 것이며 남의 자궁을 빌려 낳는다면 아류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TV 개그프로그램이라도 어색해지려 하면 갑자기 웃음소리 효과를 집어넣거나 아니면 생뚱맞게도 배우들이 일제히 춤을 추거나 혹은 쓸데없이 노래를 삽입하며 장면연결을 매끄럽게 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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