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건조한 이론이오. 그 건조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오. 문사철 전공한 양반이 베개머리에 눈물 쏟으며 감격해 하며 자다가 일어나 두 주먹 불끈 쥐고 굳센 방귀 한번 뀌고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봉창 두드리는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오. 과산화수소수에 이산화망간을 넣고 거기서 산소가 생기던 황산구리가 생기던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소. 단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뿐 그대 앞에 놓은 것은 황산구리나 이산화망간이나 과산화수소수나 별 차이 없다는 말이오. 어차피 모든 것을 결정되어 있소. 이번 대선은 남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결정되어 있소. 표를 많이 받는 당이 이기도록 결정되어 있소. 어차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고 딱 결정되어 있소. 단지 그 남자가 어떤 남자냐 그 당이 어떤 당이냐 그 죽는 시점이 언제냐가 결정되어 있지 않을 뿐이오. 그것을 아인슈타인이 가까이서 현미경 대고 조금 더 세밀하게 바라보든 아니면 뉴턴이 멀리서 대충 희미하게 바라보든 본질이 변하지는 않소.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전면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부정하고 극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승하는 것이오. 마찬가지로 생산관계-생산양식이라는 결정론적 토대를 전면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단지 결정론의 근거가 되는 1을 부정할 뿐이오. 원자는 없소. 그러니 1은 없소. 1이 없으니 가장 작은 것 따위는 없소. 아래로는 무한히 작아지고 위로는 무한히 커지니 결정론의 톱니바퀴가 물려서 돌아갈 그 톱니가 없소. 구조론은 원자가 위치한 자리에 그룹을 놓소. 우리가 1이라고 믿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있는 하나의 그룹일 뿐이오..(우리는 1이 가장 작은 것이라고 믿지만 구조론으로 보면 1은 너와 내가 일치하는 일치점일 뿐이다.) 옛 사람들이 지구가 땅바닥에 단단히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소. 조선 시대 양반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면 놀라 까무러치다가 벽에 뒷통수를 찧고 자빠질 일 아니겠소. 마찬가지로 1이 실은 땅바닥에 딱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이 구조론이오. 그 아래로는 무한히 작은 세계가 무한하게 펼쳐지고 그 위로는 무한히 큰 세계가 무한히 펼쳐지오. 최소 단위의 소립자? 그런거 없소. 새로운 과학의 혁신이 등장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완성하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반복되오. 인류역사를 3만년으로 본다면 그 중 99프로는 대개 매너리즘-쇠락-쇠퇴였소. 조선왕조 5백년간 여말선초에 잠깐, 선조 때 잠깐, 정조때 잠깐 세번쯤 개혁분위기가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매너리즘이었소. 서구도 마찬가지였소. 99는 쇠퇴고 침체였고 고작 1이 혁신인데 지금 우리가 마침 그 1에 있으니 인터넷이다 뭐다 하면서 목소리 좀 높여보는 것이오. 산업화를 하나의 사건으로 볼 때 19세기가 계몽이면 20세기가 투쟁이고 21세기 지금은 소통의 시대이오. 그 산업화라는 사건은 영원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에서 21세기라는 지극히 짧은 한 시기에 불꽃처럼 일어난 하나의 일대사건이오. 인류역사 3만년에서 딱 300년이오. 우주는 무한에 가깝게 넓고 그 우주가 기다려온 시간 역시 무한에 가깝게 긴데 그 긴 우주의 세월이 비하면 이 인간의 300년은 암것도 아니오. 어쨌든 기어이 일은 벌어졌소. 그것은 산업화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산업화 시대의 미학적 완성이오. 한 순간 빛날 뿐이오. 그리고 또 오랜 침체가 계속될 것이고 그 침체가 천년이 갈 수도 있고 만년이 갈 수도 있소. 어쨌든 그리스가 한 순간에 피워올린 불씨가 가늘게 살아남아 중세의 암흑시대를 견뎌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로 불똥이 옮겨붙었듯이 그 언젠가 이 불씨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 오랜시간 동안을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겠소? 그것은 아름다움이오. 이상주의요. 양식의 완성이오. 울림과 떨림이오. 소통 가능성이오. 그렇기 때문에 중세의 암흑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은 던을 얼마나 버느냐, 공장을 얼마나 크게 짓느냐, 자동차를 몇 대나 만드냐, GDP가 몇만불이냐가 아니라 이 시대 삶의 양식의 완성이오. 마침내 한국풍의 완성이오. 인터넷 양식의 완성이오. 공동체 양식의 완성이오. 이상주의 완성이오. 이 문명이 끝내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양식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젖도 아니오. 하여간 100만년 후에 어떤 유물 발굴단이 땅바닥을 조낸 파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야릇한 미소 지었다면 그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미소의 의미가 무엇이겠소? 100만년은 내가 한 숨 자고나면 백만년이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수입해 들여온 비싼 꼬냑이 아니라 1천미터 높은 산을 등산하고 500미터 중턱까지 하산하다가 중도에 만난 작은 막걸리집에서 다리쉼 하며 마시는 막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생선회는 비싼 일식집에서 먹는 생선회가 아니라 내가 서해바다에서 작은 목선타며 직접 잡아서 뱃전에서 바로 회떠먹은 그 생선회고,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은 달빛 은은한 밤중에 남의 참외밭, 수박밭, 딸기밭에서 서리해 먹은 그 과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소. 그러므로 양식의 완성이 중요한 것이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직접 요리하며 그 요리과정에서 집어먹은 그것보다 더 맛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도 좋은 친구, 반가운 손님과 함께 먹는 그 음식보다 좋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삶의 양식화가 필요한 것이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은 안쳐준다 말이오. 양식이란 그런 것이오. 양식은 곧 참여의 양식이오. 소통의 양식이고 공감의 양식이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너스레는 안쳐주오. 시중에 요리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아직 이러한 요리의 진실을 이야기 하는 진짜 식객을 만나보지 못했소. 허영만 만화 식객을 영화로 만든다던데 과연 그 영화가 이러한 요리의 진실을 담고 있을까? 그냥 비싼 요리 가져다놓고 양념이 뭐네 소스가 뭐네 유식한 척 구라치고 그러지 않을까 궁금하오. 그것들은 다 가짜배기란 말이오. 극의 극에 도달한 하나의 진짜가 있다면 천년이나 만년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소. 오직 진짜냐가 중요할 뿐 세상에서 남들 이목이 뭐라고 수군수군 따위 나머지는 안쳐준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