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란 무엇인가? 종교에 관한 토론은 사회의 금기다. 본질로 말하면 종교는 사(私)의 영역에 속하므로 공(公)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토론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같은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끼리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러므로 질문은 허용하겠지만 반론은 받지 않는다. 논쟁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인가? 종교는 확대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개인사를 공공의 논쟁거리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나는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공동체 운동으로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 물론 과학과 철학만으로 종교를 대체할 수는 없다. 플러스 알파로 대안의 사회운동이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본질에서 종교는 공(公)이 아니라 사(私)에 속한다. 말하자면 가족과 같은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대안가족의 형성에 있다. 교리와 교회의 조직과 무관하게 별도로 종교의 의미가 있다. 사회가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최소단위는 개인이고 최대단위는 국가(혹은 세계)이고 그 중간에 가족과 부족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부족은 해체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이를 대리한다. 같은 교회의 신도들은 대안적 의미에서의 가족 혹은 부족이다. 확대된 가족이다. 전통의 향촌사회에서는 집성촌을 이룬 대가족이 부족의 역할을 했다. 그 부족은 지금 해체되고 없다. 인생의 본질은 삶의 양식이다. 삶의 양식의 기준이 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부족이었다. 지금 부족이 없어졌으므로 부족의 역할을 대리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의 원형이 그곳에 있다. 정체성을 담보해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상주의로 연대하여 부족을 대체할 대안의 가족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면 종교는 불필요하다. 문제는 종교의 비판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종교의 교리나 교회의 조직을 문제삼을 뿐 그 본질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를 극복할 수 없다. 삶의 양식이라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언제라도 가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족은 혈연을 넘어 대안의 가족이어야 한다. 혈연의 가족은 엄밀히 따지면 모계사회에만 존재한다. 부부도 혈연의 가족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는 혈연이지만 부부는 이혼하면 그만이다. 계약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가족의 출발점은 부부다.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미래에는 결혼제도와 부부관계가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부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형태가 변할 뿐이다. 대략 7 : 3의 비율로 일부일처제 하의 결혼관계와 결혼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적 결합이 공존할 것이다. 대안의 가족은 소멸하지 않는다. 100년 후에도 7할은 일부일처로 결혼하고 3할은 다양한 형태의 대안가족을 꾸리고 살게 된다. 삶의 양식의 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삶의 양식의 완성을 통한 정체성 획득이라는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100년 후에도 인간의 절반은 종교를 신앙할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적 삶을 추구할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교리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원시의 부족적 삶이다. 이러한 본질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본질로 보면 기독교도, 불교도, 회교도 하나다. 교리를 다툼은 허무할 뿐이다. 신이 인간에게 어떠한 삶의 본질을 주었는가에 주목하라. 인간은 언제라도 완성을 추구한다. 그 완성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출발점은 3위일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복음주의 경향은 3위일체를 부정하고 3위일체 이전의 원시 기독교로 퇴행한 것이다. 물론 이 퇴행을 개혁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말하는 기독교는 세계종교로서의 기독교이며 보편성의 기독교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는 보편주의를 부정한다. 보편주의는 가톨릭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왜 개신교는 보편주의를 부정하는가? 종교의 본질은 부족적 삶의 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있는데 가톨릭의 정치개입이 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부족이 아닌 국가 혹은 그 이상을 추구한다. 원시 기독교의 부족적 전통은 오늘날 유태인의 신앙에 반영되어 있다. 유태인의 종교에서 세계종교로 발전한 기독교가 유태인의 종교로 퇴행하고 있다. 유대교의 본질은 혈연의 가족 혹은 부족주의에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의 출발점을 3위일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의 원시 기독교로 볼 것인가다. 개신교의 성립은 정치화한 가톨릭에 반대하고 원시 기독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의도가 확대되면 기독교의 근간을 부정하게 된다. 세계종교로서의 보편성을 부정한다. 유태인의 종교로 되돌아가서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착각한다. 자신만 선택받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는 신의 완전성의 부정이 된다. 예컨대 이런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2천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 시대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예수는 내일쯤 재림하여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교회도 성경도 교리도 필요없다. 내일 혹은 늦어도 모레 구원될 것인데 재림할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중요하지 교리나 교회나 성경이 무에 필요하다는 말인가?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예수를 맞이하러 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부정되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에 교회 조직은 필요한가? 성경은 필요한가? 성직자의 존재는 근거가 있는가? 엄밀한 의미로 보면 종교는 필요없다. 하느님과 내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종교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가톨릭의 논리를 무한 확대하면 종교가 정치화 된다. 종교의 본래 의미를 잃게 된다. 부족적 삶의 양식을 잃게 된다. 종교가 개인의 삶의 정체성의 확립에 기여하지 못하게 된다. 종교가 인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반대의 논리를 무한 전개하면 종교가 소멸한다. 교회도 성경도 성직자도 근거가 없다.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 재림할 예수를 맞이하면 그만이다. 실제 2천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들 내일이 그날이라고 여겼다. ### 종교의 원형은 ‘부족적 삶의 양식의 완성’이며 그것은 ‘확대된 가족, 대안의 가족’의 의미이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 내가 혈연관계임을 깨닫는 것이며 그로부터 나의 삶의 정체성을 획득하는데 있다. 가톨릭은 이 논리에서 멀어져 정치화 되었고, 개신교는 이 원형을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혈연인 하느님과 내가 직접 대면하면 그만인데 교회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문제는 기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나는 기독교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의지는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2천년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도 원래 역사다. 지난 2천년간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해 온 역사적 과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성경이다. 두 번째 성경을 부정하고 제 1의 성경만 고집한다면 오히려 신의 의지를 왜곡하게 된다. 지난 2천년간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일어난 사건들이 그대로 하느님의 모습 그 자체다. 이를 부정한다면 결국 신을 부정하고 신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부정한 결과 신은 왜소해지고 만다. 성경에의 집착, 원시 기독교로의 퇴행이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정한 결과 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함있는 신이 된다. 종교의 본질이 부족적 삶의 원형의 회복에 있다면 신이 단지 작은 부족의 족장에 불과하게 된다. 2천년 전에는 실제로 그랬다. 하느님은 유태인 부족의 족장이었다. 과연 2천년 후 이 시대에도 신은 유태인 부족의 족장인가?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족장에 불과한가? 3위일체의 핵심은 신과의 쌍방향적 대화에 있다. 실제로 일어난 역사 그 자체를 신의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 해석이 들어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해석의 권한을 교황이 가진다. 교황과 교회가 그 해석의 권한을 독점하면서 개인의 욕망을 끼워넣어 신의 의지를 왜곡한 데서 개신교의 출발이 있다. 그러나 가톨릭을 과도하게 부정한 나머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정한다면 기독교는 존립이 없다. 왜 3위일체가 생겨났는가? 원시 부족신앙이었던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예수재림의 시점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즉 예수가 내일 재림하는데 왜 교회가 십일조를 거두어 내일 이후를 대비하느냐다. 교황의 존재, 교회 조직의 존재는 모두 내일 이후에 대한 대비다. 재림은 내일 일어날 것이므로 내일 이후에 대비하면 안 된다. 이 논리가 확대되면 기독교는 근거가 없다. 3위일체는 그 시점을 지워버린 것이다. 3위일체의 본질은 예수재림의 시기와 상관없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역사 그 자체에 이미 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으며 예수는 언젠가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 상에서 구원의 시점이 특정될 수 없으므로 공간 상에서도 역시 특정될 수 없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며 시공간의 특정은 그 완전성에 대한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시점을 특정하면 결함있는 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본질은 신과의 대화를 인정할 것인가이다. 신과의 쌍방향적 대화를 인정한다면 당신이 신과 대화한 그 자체로 이미 구원의 완성인데 그 밖에 달리 무슨 구원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신과 당신의 관계가 혈연이라면 당신이 ‘신에게 말걸기’를 성공한 시점에 이미 구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고 구원이 다른 형태로 특정 시점에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면 신과 당신은 혈연이 아니다. 신과 당신이 혈연이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구원은 없다. 내 아버지가 아니고 남의 아버지일진대 그 남의 아버지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신이 혈연의 내 아버지가 확실하다면 내가 구렁에 있건 지옥에 있건 아무 상관이 없다. 구원은 오직 신이 ‘나의 말걸기’를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내 아버지’가 확실하냐 뿐이며 그 밖에 다른 형태의 구원은 없다. 다른 모든 형태의 변개는 결국 신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이 된다. 완전하지 않은 신이 나를 구원해준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함있는 신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면 나는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천년 후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진화하고 적응할 뿐이다. 종교의 본질은 과학이 손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안의 가족을 건설하려는 이상주의자들의 노력이 종교의 모순을 상당부분 극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