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이 사는 법 “이념은 사회주의를 따르고 행동은 유교주의를 따르는 식이다. 지금 민노당 안에는 이 본질에서의 모순을 지적하는 용기 있는 당원이 없다. 이대로 가면 권영길은 100살까지 해먹을 것이다.” 2004년 1월 30일에 쓴 필자의 글 일부다. 아니나 다를까 민노당은 이번에도 권영길을 선택하고 있다. 지난 시기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조금도 묻지 않고 말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4년 마다 이 기록을 들춰보고 같은 요지의 글을 쓸 계획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근 1년 이상 100퍼센트 확률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올해도 대선을 앞두고 필자에게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 올해 대선은 솔직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노당에 대해서만은 100퍼센트 권영길이 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민노당은 왜 권영길인가? 장로정치를 하는 민노당에서 권영길이 아니면 당이 깨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권영길이 아니면 당이 깨지는가? 민노당이 겉으로는 진보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본질에서는 유교주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일본 공산당과도 비슷하다. 100살에 가까운 할아버지들이 영구집권 한다. 일본 사회당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의 모습이 아니라 수구의 모습이다. 우리당은 어떠한가? 천신정을 비롯하여 소장파들이 유교주의 연공서열 시스템을 뒤집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사실도 유교주의 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거기다가 백바지 유시민까지 가세했으니 온통 장유유서가 깨진 것이다. 유교국가에서 이렇게 하면 반드시 망한다. 망하지 않으려면? 개혁을 포기해야 한다. 개혁을 포기하면? 우리당의 존재이유가 없다. 딜레마다. 민노당처럼 하면 집권하지 못하고 우리당처럼 하면 망한다. 본질에서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서구의 사민주의는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이 결합된 것이다. 우리의 유교주의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민주의 모델을 직수입하여 무리하게 이식하려는 시도는 그만두어야 한다. 서구의 모델이 한국에서의 대안은 아니다. 우리에게 맞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체질화된 유교주의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의 문제를 탐구해야 한다. 이쪽도 길이 아니고 저쪽도 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실패할 것을 알고 즐겨 실패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진다. 그렇다면? 바위가 깨질 때 까지 도전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당은 깨졌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선거는 언젠가 끝날 것이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했으니 깃발은 쓰러져도 동지는 남을 것이다. 우리당의 길은 백퍼센트 깨지는 길이지만 그래도 그 길로 가야 한다. 민노당의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 죽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어쨌든 이 선거가 끝나야 속편이 시작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유교주의가 문제인가? 권영길이 아니면 민노당이 깨지는 이유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노당에 아직도 윗사람이 있고 아랫사람이 있다. 계급이 있다. 장유유서가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지식인 집단의 한계다. 나는 아직 이 나라 안에서 그 한계를 극복한 한 명의 참 지성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유감으로 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한 계급사회다. 계급모순이 자본의 소유로만 나타난다는 것은 좌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다. 그것은 서구의 사정일 뿐 조선시대의 양반계급은 돈이 없어도 양반이었다. 곧 죽어도 양반은 양반이었다. 한국사회의 계급구조는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 민노당은 특권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정당이다. 지식계급이 서민대중을 괄시하는 정당이다. 물론 그쪽에서는 계몽이라고 말하지만 이쪽에서 보면 분명 괄시다. 계몽이 아니라 소통이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계몽하려드는 한 결코 평등해질 수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절대로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중이 민노당을 외면한다.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칠 권리가 곧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민중 위에 오만한 자세로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노당은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다. 말이 통하는 정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이 같다. 자본으로 인간을 괄시하거나, 지식으로 인간을 괄시하거나, 조직의 힘으로 인간을 괄시하거나 본질에서 같다. 그리고 다수의 한국인들은 자본의 지배보다 지식의 지배를 더욱 싫어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조직과 시스템과 패거리의 지배를 더욱 싫어한다. 자본의 지배시스템은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지식의 지배시스템은 눈에 보인다. 강령이 있고 슬로건이 있고 완장이 있고 라이선스가 있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인다. 자본은 좁은 신분상승의 통로를 열어놓고 민중을 회유하는 얄팍한 방법을 쓰지만 지식집단은 뻔뻔해서 대놓고 직접 통제하려고만 한다. 자본의 회유에 속아 지식의 통제를 거부한 것이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면 노예다. 한국인들은 특히 통제받기를 싫어한다. 자본의 통제가 싫은 만큼 지식의 통제도 싫은 것이다. 정당조직의 통제도 싫다. 정당조직과 노조조직의 통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서구의 경우는 게르만족의 종사제도 전통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한 때문이고 일본인들의 조직과 체제에 대한 순응도 사무라이 문화의 특수성에 기인한 결과일 뿐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은 아니다. 더욱 한국인들의 기질과 정서에 맞지 않다. 필자는 아직 이 땅의 진실을 말 하는 단 한명의 용기 있는 정치인을 보지 못하였다. 참으로 유감이다. 여의도 소굴에 똬리를 튼 300명 중에 정직한 자는 단 한명도 없다. 단지 곧은 것을 곧다고 하고 굽은 것을 굽다고만 하면 되는데 다들 곧은 것을 굽다고 하고 굽은 것을 곧다고 한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세상이 달라질 텐데 그 한 명이 없다. 표피의 사실을 지적하는 입바른 말 잘 하는 사람은 있는데 이면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가 썩으니 정치칼럼 쓰기도 힘들다. 옥석을 구분하고 방향을 잡아줘야 할 터인데 온통 돌밭이고 깨끗한 옥 하나가 없다. 민노당부터 한나라까지 다 썩었다. 시스템 안에서 하나가 썩으면 전부 썩는다. 상대적으로 덜 썩은 것은 의미가 없다. 오십보백보다. 문제는 유권자들이 썩은 것에 익숙하다는 거다. 빌어먹을 유교주의 때문이다. 유교주의는 무엇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일까? 유교주의의 매력은 경쟁을 줄이는 데 있다. 학력보다 실력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력경쟁의 경쟁사회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들은 경쟁을 싫어한다. 경쟁을 회피하기 위해 라이선스를 따고, 간판을 따고, 학력을 얻고 원정출산해서 미국시민권을 얻었는데 또 경쟁을 해야 하느냐다. 경쟁은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것이고 사회주의가 싫어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봉건주의와 통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왕조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경쟁이 없었다. 그래서 망했다. 서구 봉건왕조도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경쟁을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망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계급제도가 사회에 안정감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겉으로는 계급사회가 깨지기를 원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영역만은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 뉘라서 저 살벌한 실력경쟁의 바다에 내동댕이쳐지고 싶겠는가? 실력보다 학력으로 평가하면 세상이 조용해진다. 김기덕이나 심형래처럼 라이선스도 없이 옆구리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얄궂은 자는 단칼에 잘라내야 한다. 그러므로 차별하고, 담장 쌓고, 편견 심고, 색안경 끼고, 미리미리 걸러내서 경쟁의 스트레스 없는 조용한 차별사회 건설하자는 것이 민노당과 한나라당의 공통된 이데올로기다. 단지 지식으로 차별할 것인가 자본으로 차별할 것인가 하는 수법의 차이 뿐이다. 자본의 지배, 지식의 지배, 시스템의 지배, 조직과 연고와 담합과 유유상종과 학벌과 정실과 인맥과 세력과 짜고치기의 지배, 일체의 지배와 통제와 조종과 회유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강해지는 방법 외에 없다. 일체의 지배시스템과 맞서는 진정한 대안의 모색은 이 나라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