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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6205 vote 0 2007.08.29 (21:21:51)

내가 게을러질 때 마다 가시덤불과 쓸개를 들이미는 강제 와신상담의 전여옥.. 빌어먹을 전여옥이 그 창피를 당하고도 또 항소를 해 오는 바람에.. 항소심 비용이라도 보탤 겸 해서 재미없는 책을 한 권 만들어보려 하오. 본문은 이미 올렸고 아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라오.

들어가기

이 세상 소풍 끝나기 전에 책 한 권 정도는 남기고 싶다. 그 한 권은 구조론이다. 학문의 역사는 구조론에 대한 안내서 격이다. 구조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구조론적 세계관을 머릿속에 세팅해 두어야 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보되 입자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하는 식으로 연쇄적인 고리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구조의 세계에서 정과 반은 대립,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받는다. 이어받아 완성시킨다. 정이 반을 낳고 반이 합을 낳아 완성시킨다. 질서가 가치를 낳고 가치가 양식을 낳아 마침내 완성시킨다.

구조의 세계에서 입자는 야구공처럼 동그랗게 생긴 덩어리가 아니다. 내가 주먹으로 벽을 세게 치면, 내 주먹의 치는 힘과 벽의 맞서는 힘이 작용 반작용으로 팽팽한 맞물려 교착되는 성질 그 자체가 입자다.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깨졌는데도 아직도 세상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식계를 지배하는 마르크시즘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다. 왜 상대성이론의 시대, 양자역학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 엔트로피의 시대에 여전히 인간들은 결정론적으로 사고할까?

사람들은 말한다. ‘결정론은 절대로 틀렸어. 상대론이 절대로 옳아.’ 이 말은 자체 모순이다. 상대론이 옳다면 상대론이 옳다는 그 말도 상대적이어야 한다. 상대성의 세계관은 여전히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과 무엇이 상대적이지? 상대의 相은 서로 상이다. 서로는 둘이어야 한다. 무엇과 무엇이 둘이지? 질서와 가치다. 질서는 결정론적이고 가치는 상대론적이다. 질서는 앞에서 길을 열고 가치는 뒤에서 완성한다.

계몽과 소통이 상대적이다. 동기와 보상이 상대적이다. 긴장과 이완이 상대적이다. 이백과 두보가 상대적이다. 결정론적인 거시세계와 상대론적인 미시세계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이 양자를 통일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을 획득하기 바란다. 그것은 剛과 柔, 노자와 공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코스모스와 카오스, 교종과 선종, 순수와 응용을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어가기

 

한 줄에 꿰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각화’ 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그림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진리는 맥가이버 칼과 같아서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

진리(眞理)는 리(理)다. 리는 결이다. 결은 나이테다.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하고 바위의 결을 절리(節理)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무는 나이테 방향으로 갈라지고 바위는 결을 따라 금이 간다.

리는 외부에서 충격을 가했을 때 금이 가는 방향, 쪼개지는 방향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그 부분은 인체의 관절이다. 관절이 기계의 메커니즘을 이룬다. 그러므로 리는 메커니즘이다.

리는 자연에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도 있다. 긴장과 이완 사이에 리가 있고 동기부여와 성과보상 사이에 리가 있고 원인과 결과 사이에도 리가 있다. 구조론은 리를 다섯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자연과 인간에 리가 있듯이 사회에도 리가 있다. 그것이 이상주의다. 리는 갈라지고 합쳐지는 마디다. 소통의 막힘이 사회를 갈라지게 하고 소통의 열림이 다시 그 갈라진 사회를 합치게 한다. 소통의 양식을 창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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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구조는 이천년 전부터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다섯 단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칼 포퍼는 ‘관찰, 가설, 예측, 실험, 수정’의 다섯 단계를 통과해야 과학의 명제로 인정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컴퓨터의 구조는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다섯 단계를 가진다. 필자의 구조론은 물질의 구조를 ‘질, 입자, 힘, 운동, 양’의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은 수년 전에 필자가 정의한 것이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웹 검색을 해본다. 네이버 용어사전은 ‘입력, 기억, 제어, 연산, 출력’의 다섯 단위로 정의하고 있더라. 역시 우연의 일치일까?

시계는 동력전달 순서를 따라 ‘몸체, 태엽, 진자, 기어, 바늘의 구조로 되어 있다. 소설의 구조든 과학의 구조든 같다. 컴퓨터든, 물질이든, 시계든 같다. 모든 구조는 일의 진행순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일로 되어 있다. 일은 완성되어 하나다. 하나의 일은 시간 위에서 전개되며 사건의 시작과 끝을 드러낸다. 시작과 끝이므로 둘이다. 중간의 진행과정을 포함하면 셋이고 시간과 공간의 로직을 전부 풀어내면 다섯이다.

결이 있다. 결은 작용과 반작용이 맞서는 지점이다. 하나의 사건은 동력전달 순서에 따라 다섯 지점에서 작용과 반작용으로 맞선다. 하나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섯 번에 걸쳐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반드시 다섯 번 교차로를 만나게 된다. 계획, 착수, 시공, 마감, 입주의 각 단계에 갈림길이 있다. 어떤 사업을 하든지 반드시 다섯 번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섯 번 YES와 NO를 판단해야 한다.

흙에서, 씨앗에서, 새싹에서, 꽃에서, 열매에서 각각 판단해야 한다. 진로에서, 입학에서, 수업에서, 평가에서, 졸업에서 각각 선택해야 한다. 탄생에서, 성장에서, 결혼에서, 출산에서, 죽음에서 각각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1 사이클이 완성된다. 완성될 때 소통한다. 세상의 모든 하나는 둘이다. 모든 둘은 셋이며, 모든 셋은 다섯이다. 완성으로 보면 하나, 시작과 끝으로 보면 둘, 중간을 포함하면 셋, 구조로 보면 다섯이다.  

이러한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연역적 사고를 전개할 수 있다. 전지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한 직관에서 지식은 지혜로 바뀐다. 비로소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 구조론적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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