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폭도라고 불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폭도 좋지. 폭도면 어때? 폭도가 나쁜 거야? 나쁘면 어때? 더 나쁜 놈들이 있는데. 우리 솔직해지자. 그런 혼란한 상황에서 도덕을 따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오해다. 인간을 만만하게 보는 놈들이 있다. 눈알 부라리고 겁주면 쫄아서 굴복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자신이 쫄보이면 상대방도 쫄보라고 믿는다. 문제는 쫄지 않는다는 거.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나는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그런 방법이 있었어. 광주사람들이 똑똑하네. 나는 고 1에 불과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는 전두환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다. 전두환의 만행에 저항한게 아니라 광주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일어난줄로 잘못 알고 있었다. 서울역에서는 어리석게 회군했는데 광주사람이 뭔가를 아는구나. 암만. 그래야지. 지금은 시민이 무장하고 일어나야 해. 프랑스 혁명도 이렇게 시작되었다지. 나는 지금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는거야. MBC는 왜곡방송을 했지만 나는 방송이 고마웠다. 행간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때 3김이 뭔지도 몰랐다. 김대중은 알았다. 김대중은 간첩이라고 교사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또 뭐야? 김영삼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김종필은 이름 정도나 알았고. 나는 한번도 김영삼이라는 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몰랐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지나갔다. 작은 소란으로 알았다. 신문이 배달되지 않는 촌동네였으니까. 교사들은 반어법으로 말했지만` 김대중에 대해서만 잘 알려주었다. 위험하게 김일성을 건드리는 교사도 있었다. 요즘 애들은 슈머팬, 원더우먼을 이야기하고 놀지만 우리 때는 김일성 장군님 이야기 밖에 안했어. 김일성 장군님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도토리로 총알을 만들고, 모래알로 쌀밥을 만든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지. 둔갑법이며 축지법이며 못하는게 없다고 수군거렸지. 왜놈 군대가 김일성 장군을 어떻게 잡아?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그때는 다들 그런 이야기를 했어. 물론 북한에 있는 저 김일성은 가짜야. 진짜 김일성은 도술을 자유자재로 쓰고 근두운 구름 잡아 타고 다녀. 수염이 이렇게 긴 할아버지 장군이었다니까. 어느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타나서 지가 김일성이라고 우겨서 확 깼지. 웃기잖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행간을 읽는 법을 알려준 그 국어교사다. 중요한건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거. 그때 그시절 애들이 하루종일 김일성장군님 이야기만 했다는게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폭도라는 말을 듣고 곧 나쁜 사람으로 단정한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폭도는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단어다. 프랑스 혁명에 나선 시민군도 당시에는 폭도로 규정되었을 거다. 정부가 무장한 시위대를 폭도라고 부르는건 당연하다. 정부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넘이 이상하지. 사실 그랬다. 고 1에 불과했던 나는 들떠 있었다. 광주에 가고 싶었다. 나도 총을 들어보고 싶었다. 교련복 입고 카빈총 들고 카메라 앞에 폼 잡는 형님들이 부럽다. 광주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버스터미널에 가봤지만 광주행 시외버스는 없었다. 하긴 시외버스를 타본 적도 없으니.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교사에게 들은 말이다. 가슴이 뛰었다. 역사가 피를 요구하면 기꺼이 바쳐야지. 겁대가리가 없었다. 원래 애들이 그렇다. 광주가 전두환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사실은 나중 알았다. 서울놈들은 비겁하게 회군했는데 뭔가를 아는 광주 형님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터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냈구나. 근데 왜 경주는 조용하냐? 왜 민주주의 제단에 피를 안 바치냐고? 왜 학교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거야? 비겁하구만. 왜 군부독재를 때려잡지 않는거야? 나는 광주의 영령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국어교사처럼 에둘러 김일성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있고. 정치경제 선생님이 많은 것을 말해줬다. 슬슬 웃으면서 니들이 뭐를 알겠냐. 크면 다 알게될거다 하는 뉘앙스로 말해준다. 공산주의나 이런 이념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고슴도치도 때로 가시를 세운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인간의 존엄성 말이다. 인간을 만만히 보지 말란 말이다. 내게 광주는 존엄이었다. 인간선언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거다. 입을 막으면 무기고를 터는 거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용수철도 누르면 반발하는데 인간이 쉽게 굴복하겠는가? 죽은 박정희도 사람이면 광주시민에 대해 다시봤다고 존경심을 가질 거다. 유언비어 타령 하는 사람 있다. 유언비어에 속는 사람 없다. 속는 척 연기하는 것이다. 행동을 통일하려면 대본이 필요하니까. 인간은 그 상황에서 당연히 그렇게 한다. 가만이 당하고 있는 애들이 좀비다. 인간행세 해야 인간대접 받는다. 방송이 뭐라든 상관없다. 광주시민은 MBC에 불을 질렀지만 당시의 나는 MBC가 행간을 읽을줄 아는 똑똑한 국민들을 믿고 열심히 보도했다고 생각했다. 폭도가 참 나쁘다 라고 쓰고 군인이 참 나쁘군으로 읽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인가? 바본가? 척 하면 삼천리지. 눈치도 없나? 나는 말하고 싶다. 광주의 영령들은 외롭지 않다고. 나처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으니까. 그걸 못 알아먹는 좀비는 인간이 아니니까 논외로 하고. 에너지가 중요하다. 선악은 중요하지 않다. 에너지가 고이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3월 1일, 4월 3일, 4월 19일, 5월 18일, 6월 10일은 하나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토막치기를 좋아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연결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위대한 인간선언이다. 아 이 땅에도 인간이 있었다. 인간이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 역시 원교근공이다. 주변에는 도무지 말귀를 못알아먹는 똥들이 널려있을 뿐이지만 먼 곳에 뭔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니 반갑다. 그런 심리 있다. 맞은 편에서 조금만 잡아줘도 내게 큰 힘이 될텐데. 한국은 포기했고 외국에 기대할 밖에. 먼 곳에 사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