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원시 부족민은 숫자를 1과 2밖에 모른다. 3을 넘는 숫자는 그냥 많다고 한다. 3을 발견하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침팬지를 인간처럼 학습시키려는 실험이 70년대에 유행했는데 대체로 실패했다. 님 프로젝트가 유명하다. 침팬지 님은 수화를 배웠지만 단어를 말할 수 있을 뿐 문장은 만들지 못했다. 2와 3 사이에 무엇이 있나? 단어와 문장 사이에 무엇이 있나? 촘스키의 인지주의와 스키너의 행동주의 간의 대결이 유명하다. 심리학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가 고작 3분 정도 검색하여 얻은 수박 겉핥기 지식으로 보면 촘스키의 선천설이 옳고 스키너의 후천설이 틀렸다. 뇌는 귀납이 아닌 연역이기 때문이다. 연역하려면 원본이 있어야 한다. 백지상태가 아니다. 스키너의 빈 서판 이론은 뇌는 텅 빈 상태이며 주입하기에 달렸다는 주장이다. 70년대에 이러한 사상이 유행했다. 여자는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틀렸다. 구조론은 선천설이다. 인간 특유의 연역구조가 뇌에 다 세팅되어 있다. 남자는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다. 남자애가 파란색에 끌리고 여자애가 핑크색에 끌리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에 따른 본능이다. 남자 어른은 파란색에 끌리지 않는다. 여자 어른은 필자가 알 수 없다. 후천설은 뭐든 학습하면 된다는 거다. 침팬지도 학습하면 인간이 된다는 주장이다. 틀렸다. 인간의 뇌는 5만 년 전부터 작아졌다고 한다. 선택압을 받고 있다고. 그런데 여자의 뇌가 더 작아졌다. 뇌가 작아질수록 사회성이 높다. 사회성이 높다는 것은 육아기간이 길다는 말이다. 소년기가 길다. 유인원은 소년기가 짧다. 동물은 한 살이면 어른이다. 사회적 동물의 사회성은 선이고 반사회성은 악이다. 사자가 호랑이보다 사회성이 높다. 호랑이는 선악이 없지만 사자는 선악이 있다.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하지만 사자는 집단생활을 한다. 늑대나 하이에나라면 특히 사회성이 높으므로 동료를 돕지 않은 늑대는 분배가 없다. 다친 늑대에게 돌아갈 몫은 있어도 배신자 늑대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다. 고기를 안 준다. 필자는 심리학을 통째로 유사과학으로 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지만 3분간 검색한 결과로 말하면 선천적으로 주어진다는 촘스키의 인지주의가 옳고 빈 서판으로 출발한다는 스키너의 행동주의가 틀렸다. 즉 지능은 복제하는 것이다. 반드시 원본이 있어야 한다. 짚신벌레도 지능이 있다면 원본이 있는 거다. 그 원본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구조 그 자체다. 대칭구조 자체가 원본 역할을 한다. 외부환경을 내부로 들여와 복제하는 것이다. 추상적 관계를 복제하는 것이 지능이다. 1은 무엇일까? 주체와 객체의 대칭이다. 2는 무엇일까? 객체 간의 대칭이다. 엄마와 아들의 대칭은 1, 형과 동생의 대칭은 2다. 3을 발견해야 한다. 3은 나눗셈에서 만들어졌다. 인류의 고민은 나눗셈이다. 고대인이 12진법을 쓴 이유는 나눗셈이 잘 되기 때문이다. 10은 3과 4로 나누어지지 않아 피곤한 숫자다. 원시인에게는 정말 골때리는 문제였던 것이다. 고기를 잘못 나누면 돌부림 난다. 그때만 해도 쇠칼이 없었으므로 돌도끼를 휘두르는 돌부림이다. 고기를 두 번 자르면 3이다. 3이 되면 3+1=4(한+셋=넷) 3+2=5(둘+셋=다섯) 3+3=6(셋+셋=여섯)으로 10까지 순식간에 간다. 열빼기셋=일고배=7, 열빼기둘=여덜배=8, 열빼기한은 아호배=9로 숫자 7, 8, 9는 열에서 마이너스다. 플러스를 마이너스로 바꾸면 3이 발명된다. 플러스 셈법은 숫자가 필요 없다. 일대일 대칭을 시키면 된다. 열 명의 사람이라면 열 명 앞에 빵을 한 덩이씩 놓으면 된다. 마이너스가 문제다. 고기를 잘라서 나눠가지다가 무수한 돌부림 끝에 피터지게 수학이 발명된 것이다. 침팬지가 수화로 단어를 말해도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문장은 주어 동사의 대칭에 목적어를 추가한다. 보통은 자극을 받는다. 배가 고프다. 먹는다. 졸린다. 잔다. 심심하다. 논다. 놀란다. 비명을 지른다. 침팬지의 어떤 행동은 내부의 자극에 대한 물리적 반응인 것이다. 내부자극과 일대일 대칭이 된다. 어떤 자극에 어떤 행동이 대칭되므로 침팬지는 문장을 구성할 수 없다. 3이 없어 외부확장이 안 되는 거다. 문장이라는 것은 나와 사과를 대칭시키는게 아니라 사과 자체의 대칭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봤다. 뭘 봤니? 사과. 사과는 왜? 노랗다. 이러면 문장이 아니다. 나는 노란색 사과를 봤다고 말하려면 나와 봤다가 대칭되면서 나+봤다에 사과가 대칭되어 추가되면서 다시 사과와 노란색의 대칭이 포착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