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전 사상누각이란 말을 싫어합니다. 이른바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됨은 물론이고
그 불안함 위에 살아가야하는 자체가 저에겐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언젠가 무너질 모래로 집을 짓는 사람들의 노력은
언제나 저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 모래로 만든 집이 아무리
아름답다할지라도 말입니다. 오직 사상누각일 뿐이었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철썩같이 믿고 있던
우리의 문명이 그리고 그 문명에 바탕을 둔 제 삶자체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뒤로 저는 커다란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영위하는 이 사회의 불안, 경제의 불안,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
제 삶 자체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 저는 차라리 종말이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과 함께 성장해온 인류의 문명은 어쩌면 사상누각이 아니라
예술이 아닐까라는...
마치 얼음판 위를 위태롭게 지치면서도 애처로운 몸짓과 점프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김연아처럼 말입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그 긴장 위를 마치 얼음판을 타듯 유려하게 가로지르며
날아오르기에 그녀의 몸짓은 더욱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일으킵니다.
물론 김연아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녀를 보고
실패를 딛고 우뚝 일어서길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가 일어서든 좌절하든 이미 제 안에 김연아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 김연아는 실패가 아닌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생각이 불안 속을 헤매는 제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삶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 위에 우리의 삶은
아름답게 일어서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죠.
만일 피사의 사탑이 위태롭게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았을 겁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위태롭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삶에 대해 무관심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말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피사의 사탑이 무너질까 두렵고 우리의 삶이 무너질까봐 두려우니까요.
하지만 점과 같은 모래알갱이 하나하나의 관계가 아름다운 모래성을
잉태하듯
빙판과 스케이트날의 위태로운 접점이 하나의 조응이 되어 아름다운
김연아의 몸짓을 잉태하듯
사상누각의 위태로움이란 우리의 삶과 세상이 갖는 방향성에 대한 필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가끔은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요
문재인과 편의점의 위태로운 만남 ~ '계산이 먼저다'
물건은 평등할 것입니다.
가격은 공정할 것입니다.
유통기한은 정의로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