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태도에 관하여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의미에 대한 설명은 사전적인 것이 아닙니다. 패턴을 추상하여 구조를 보여드리는 일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님들은 부디 제가 새벽녘에 이슬 방울을 곱게 유리병에 담은 것 같은 이것을 잘 훔쳐가세요.
1. 저의 과거를 통해서 본 구조론을 이해하는 과정
저는 김동렬님의 칼럼을 2002년에 처음 읽었습니다.
제가 진지하게 두문불출하며 김동렬님 글을 읽은 것은 2005년부터 입니다.
2007년부터 저는 까페, 사이트 등에 접속하여 저의 생각을 글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 저는 구조론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훔쳐내는데 성공했습니다.
2010년부터는 제 안에서 새로운 구조론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저 자신의 방법으로 구조론을 연구해나가고 있고 김동렬님과 서로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 구조론을 이해하는 원칙
제가 위에 말씀드린 일련의 시간사이에서 지속 되어 온 것이 있습니다.
ⓐ 저는 제가 추상한 것만 글로 썼습니다. 추상과 구조화 과정이 없이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 저는 제가 아는 것만 글로 썼습니다. 아는 것이란 그냥 보고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게 아니라, 매커니즘과 실행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습관이 오늘날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김동렬님의 프레임을 통해서 사물을 보지 않고 프레임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스스로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에 제가 김동렬님의 책과 칼럼을 읽었을 때부터 저는 그 점을 발견하고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이것입니다.
ⓐ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내면에서 판단에 사용할 프레임을 만들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있는 프레임으로 판단을 시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관련된 이야기니까 자기 이야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가장 큰 오해는 자신의 바운더리안에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 분들이 여기서 '김동렬님의 생각'과 '김동렬님의 판단'을 글로 쓰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님에게 찾아오는 모든 의식과 무의식 모두 님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뜨네기 '손님'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관찰한 적이 있다면 어느날 손님이 찾아와 또 어떤 어느날 떠나는 것을 많이 겪어 보셨을 겁니다.
어느날 번쩍, 어떠한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혹은 오랫동안 어떤 느낌을 당연히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님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면의 도구 뿐입니다. 그것이 내면의 규구준승, 즉 '구조를 발견하고 만드는 능력'입니다.
저는 최초에 저의 이야기를 이곳 커뮤니티에 쓸 때부터 제가 겪은 일과 그 일에서 제가 끌어낼 수 있는 패턴과 구조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저는 관찰해서 패턴이 발견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었던 일을 적는 것은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초등학생의 일기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스승에게 적대적으로 대들고 논쟁하라는 뜻일까요. 스승과 헤어져서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일까요.
제가 깨달은 바로 풀이하자면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피, 아 구분을 하여 나 자신의 내면이 아닌 밖에 있는 스승의 말, 스승의 관점을 통해 관찰하고 사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의 오해와 마찬가지로 많은 제자들은 자신을 스승과 동일시하거나 스승의 하부구조에 편입시켜 존재규정합니다.
저는 오랜 시간동안 김동렬님을 관찰했습니다.
저는 김동렬님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김동렬님이 도구를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여 그 도구를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입니다.
구조론의 모든 것은 그 구조를 발견하고 재구성하여 창조하는 그 도구, 그 능력을 자신의 내면에 갖추는 것인데 그것을 하지 않고 김동렬님의 안경을 빌려 세상을 보고 보이는 대로 사유하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 오해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도구를 만들고 갖추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태도를 가지고 살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김동렬님이 미리 만들어 놓은 안경을 빌려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겪은 바로는 안경을 빌려 쓰는데도 시간은 걸리고
자신이 내면에서 안경을 만들어 쓰는 데도 똑같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무형의 추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안경을 빌려 쓰는 것이 의사결정구조상 쉬운 일이라고 착각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고야 마는 인류유전자에 각인 된 오래된 습관을 떨쳐야 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나는 내 내면의 도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사유하고 살아가겠다'라는 선언과 같은 것 입니다.
나. 구조론의 보편화에 관하여
제가 연구하고 있는 방향은 구조론이라는 도구를 각자의 내면에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할 학문의 보편성입니다.
저는 이미 저 스스로는 구조를 만들고 해체하는 능력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사람들 앞에서 구조를 발견하여 분석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여 창조하는 것을 보여 줄 것입니다.
학문이 갖추어야 할 증명과 이론화, 재현가능성을 실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구조론을 만들 것입니다.
2. 팀플레이에 관하여
저는 저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알아낸 것을 님들이 다 가져갔으면 좋겠습니다. 훔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훔친다는 말을 하지만 훔친것이 아니며, 가진다고 말하지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되어 재창조되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각자의 구조론 도구를 마음에 품은 채로 '팀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유기적인 상호작용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설명하려 한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팀플레이 하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해야 합니다.
저랑 친해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훔치려면 저를 관찰하십시오.
저에게서 훔치고 나서 우리가 팀플레이를 하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친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친해진 사이가 될 것입니다.
3. 마무리
저는 2012년 올해로 30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16살때부터 인생의 절반을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집에서 은둔하면서 지냈습니다.
저는 사실 수줍은 사람입니다.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김동렬님은 어떤 면에서는 친구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친구라고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언가 훔치고 그리고 제가 알아낸 것을 가져가게 하는 경험은 제 인생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김동렬님은 어떤 면에서는 친구같 은 사람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친구라고 말할 사 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언가 훔치고 그리고 제가 알아낸 것을 가 져가게 하는 경험은 제 인생에서도 처음 있는 일 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들이 아주 공감이 가네요.^^
맨처음 그 말을 해놓은 사람의 말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자신안에서 그것을 증명해보이면 그것 뿐. 즉 스스로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검증이 가능. 안다는 것은 그러한 매커니즘을 안다는 것. 또한 검증이 가능하지 않으면 그 말의 프레임에 갇혀서 왜곡이 시작됨. 필요에 맞춰서 사용하거나 긍정 혹은 부정.
또한 스스로 검증이 잘 안되니 구조를 추론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함.
보아야 할 것만 그냥 잘 보기만 해도 반은 해결됨. 그러나 인식이라는 것에서 방해가 많음. 걷어내는 것에서 이미 사투가 벌어져 거기서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음. 뭔가 그동안 인식했던 것에서 다르면 공포나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이 필요해짐. 그럴때 공동체를 보는 눈이 필요함. 그래서 세력과 짝을 하거나 보편적 진리와 짝을 하게됨. 그러면 방향성이 저절로 드러남.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은 의사결정을 빨리 하지 못하면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사실 별거 아닌데.
우리 뇌 속에 있는 어떤 장치가 의사결정이 안되는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고 '스트레스'라는 고통을 주어서 빨리 의사결정하라고 등을 떠 미는거에요.
그게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외부 프레임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거에요. 의사결정이 그래도 신속하게 되는 것 같으니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때문에
마음속에서 얼른 결론을 내리고 싶어서 뭐라고 빨리 규정을 하려고 해요.
"그거 다 이미 다른 사람이 책에서 얘기한거야. 새로울 거 없어" (서양에게 박살나기 직전 청나라 중국인들의 태도)
"이건 이래서 틀렸어" (사실은 내용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음)
"아 뭐야, 너무 복잡해, 난 복잡한거 싫어" (복잡하다, 피하자)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이 세상에 이것의 무수한 변종이 있지요)
이 버릇만 버려도 사람은 많이 나아집니다.
스트레스에 강해지는 거죠.
내 주변에도 이런 유형들 널렸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것들을 피곤해 하는데 굳이 저들을 내가 괴롭힐 이유가 있을까? 그 상태에서 행복하다는데...
정말 행복한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그 복잡하다고 하는 것들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자니 머리 아프고 피곤해지는 것이라고 여겨졌어요.
그러나 쉽게 포기가 안돼.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러나 살살 달래며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도 힘듬.ㅋ~
나도 평화로운 공존을 생각해야 하고, 그들의 평화도 존중해줘야 덜 피곤하게 사는 것이고, 가끔씩 수다도 떨어야 하므로..., 어쩌면 그들에게 나는 피곤한 사람일수도 있고, 그러나 그들은 나를 어쩌지 못함. 뭐...어쩔건데...ㅋ~...한번 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고 또 열어야 하는 것이 마음이고 만남이고 관계이므로..., 그러나 그것을 중단해버릴 때가 있는데, 더이상 그럴 필요를 못느낄때 인데, 그런 경우들은 내가 피곤함을 느끼거나, 다른 것을 보았을 때이거나..., 다른 방식의 소통을 접하거나....그러고나서 또 열고 또열고..., 상대는 피곤해해도...그런데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대화가 되는 때도 있다라는 것. 같이 가고 싶은 것.
인간은 혼자만 알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자꾸 퍼트리려 하는 것. 혼자 보다는 주거니 받거니 댓걸이 하는 것이 훨씬 만족감을 준다는 것. 그런데 어느순간 다알고 자기만 아는 것이 아니면 인간은 또 내달린다는 것. 새로운거 찾으러... ㅋ~^^
멋지군요~ 요즘 좀 공허해져 있었는데... 님의 말씀을 듣고 좀 기운이 납니다. ^^
더욱 건필해주셔서 님의 멋진 아이디어를 퍼트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