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와 홍상수 예술은 게임이다. 그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자기 패를 먼저 까보이면 안 된다. 뉴스가 뜬지 5분만에 감상을 토로하면 지는 거다. 자기 느낌을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무의식에 의해 조종된 것이며 집단의 스트레스가 투영된 것이다. 반응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설계하는 자가 되라. 글자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본다. 뒤통수 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반응은 둘이다. 하나는 막강 아줌마 군단이다. 이들은 김민희를 비난한다. 저런 년이 꼬리쳐서 내 남편도 빼앗을까봐 걱정된다는 자기소개다. 문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거. 어떤 사람이 발언한다. 내 의견이다. 주변에서 같은 말을 한마디씩 거들면 내 의견이 아니라 막강 아줌마 군단의 파워과시가 된다. 그렇다. 김민희 욕하는 순간 남편 데리고 사는 기득권 그룹에 소속되어 버린다. 자기 정체는 소멸한다. 인간에서 인간이하로 퇴행하고 마는 것이다. 당신은 의사결정권 없음. 발언권 없음. <- 이런 통지를 받는다. 왜? 그것은 당신의 의견이 아니고 집단의 이해관계니까. 아저씨 부대는 단결력이 약하다. 전투력이 없는 그들은 군단을 꾸리지 않고 귀엣말로 홍상수를 부러워 한다고. 그런데 부러우면 지는 거다. 부럽지? 너 패배. 글자 아는 사람들은 제법 표정관리에 성공한다. 서화담과 황진이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다. 홍상수 레벨은 지족선사급이다. 황진이의 유혹에 ‘내 평생 이런 유혹을 기다려 왔노라.’를 발표하고 3초 안에 넘어갔다. 아웃! 점잔 떨며 공인이 어쩌구 훈계를 늘어놓는 벽계수 너도 아웃. 서화담이 황진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런데 했다. 했어. 다 알잖아. 알다마다. 우디 알렌과 순이의 경우는 특별하다. 미아 패로는 짐바브웨 한국이라는 지옥에서 천사 순이를 발견했다. 한국이라는 똥통나라에서 내 저 어린 천사를 건져주리라. 근데 이게 사탄의 마음이다. 그게 인신매매라는 것을 미아 패로같은 바보가 알턱이 없다. 이 범죄자는 합법적으로 소녀를 납치했다. 순이는 이상한 감옥에 갇힌 것이다. 복수해야 한다. 가짜 엄마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이가 먼저 우디를 작업했어야만 이야기가 된다. 거기서 우디 알렌의 선택은? 이 남자는 진작에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있었다. 늘어져버린 삶에 환멸을 느끼는 중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 개떡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랑타령은 홍상수 같은 또라이나 하는 거다. 우디 알렌의 첫째는 길 막힌 천재작가의 돌파구 찾기였다. 둘째는 어설픈 인권투사 미아 패로 엿먹이기다. 지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지성인 연기를 하려 드는 미아 패로를 견딜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월의식이다. 우디 알렌은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신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해야 선택받은 자의 증명이 된다. 금도를 넘어야 우월적 지위가 확인된다. 예술가 특유의 오만이다. 마지막으로는 순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게 함으로써 순이에게 화살이 날아가지 않게 한 거. 그런데 홍상수 너는? 홍상수는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지 않도록 기동했으니 김민희만 욕을 먹고 있다. 이건 그림이 아니잖아. 변호해 줄 수가 없다. 결국 이 게임은 김민희의 설계다. 홍상수는 의사결정한 것이 없다. 우디 알렌은 아이디어 고갈 시점에 걸작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구실을 얻은 거다. 사랑운운은 개소리다. 중요한건 에너지다. 그 에너지의 출처가 어디인가다. 결국은 신분상승이다. 그것이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반대로 사회를 엿먹여서 신분상승한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순서다.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취를 원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들은 사랑을 원한다. 가짜다. 자유가 더 윗길이다. 자신의 손으로 의사결정하고 싶은 것이다. 자유도 가짜다. 존엄이 진짜다. 신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인간들의 운명을 쥐고 흔들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들 엿먹일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게 먹히면 자신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게 존엄이다. 그들은 비참 속에서 존엄으로 도약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비참이 있었던 것이다. 홍상수도 김민희도 나름대로 비참이 있었다. 인간이었다. 세상을 흔들어대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대결은 계속된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 대결임을 알아야 한다. 어느 포지션에 설 지는 자기 마음이나 그 과정에 신분을 들킨다. 주인 포지션에 선 자는 유쾌하고 노예 포지션에 선 자는 화를 낸다. 노예들은 존엄이 없어 늘 화가 나 있다.
◎ 최악 벽계수 – 자기방어를 위해 도덕적 훈계 늘어놓는 꼴통 그들은 각자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홍상수는 늘 하던대로 의사결정 못하는 찌질이 연기를 했다. 에너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피해자 연기를 하며 비난을 피해가는 홍상수는 에너지가 없다. 집으로 와서 부인과 정면대결을 벌이는만 못하다. 부인에게 너 싫다고 솔직히 말해라. 그동안 좋은 가장노릇 했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해라. 나쁜 사람이 나쁜 짓 한다. 좋은 남자가 순간의 실수로 여우에게 홀렸다는 식의 개수작이 창피하지도 않나? 부인이 한 행동이 사실은 홍상수 니가 한 행동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글자 아는 사람의 판단은 다른 거다.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장차 한국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가늠한다. 100년쯤 앞질러가면 예술가, 10년쯤 앞질러가면 지식인, 1년쯤 앞질러가면 정치가인 거. 화를 내면 지는 거. 설계하는 자가 이긴 거. 반응하는 자가 패배자. 게임은 계속된다. 이기려는 의도를 가져야 이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