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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을 앞두고 쓴 글이어서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문장 일부는 고쳤습니다. .』 |
6. 몰락한 양반의 후손 김구
공자는 15세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30세에 비로소 인생관이 섰으니 이립(而立)이라 하고 40세에 이르러 의문에서 벗어났으니 불혹(不惑)이라 하고,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으니 지명(知命)이라 한다.
한 인간의 인격은 15세를 전후로 하여 그 대강이 완성된다. 15세에 세워진 뼈대에 그 살을 채운 즉 30에 형태가 완성된 것이 이립(而立)이다. 50세를 넘어가면 거기에 더 추가할 것이 없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이루는 성취란 것도 실상 자신이 15세에 얻은 것을 반복적으로 표절하고 복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무현도 마찬가지이지만 김구의 사상도 20세를 전후로 이미 완성되고 있다. 1919년 3.1만세 후 상해 임정을 찾아가기 전인 40여세까지의 기록을 분석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 문중의 딸이 강.이씨 집안에 시집 가는 것은 영광으로 알고 저들의 처녀가 우리 문중에 시집오는 일은 없으니 이는 혼인의 천대이다. 양반의 세력을 이용해 토지를 빼앗고 소작인으로 부려먹으니 이는 경제적 압박이다. 저들은 아이라도 우리 문중의 노인에게 반말을 하고 우리 집안 노인들은 저들의 아이에게도 존댓말을 하니 이는 언어의 천대이다. [백범일지]
소년 백범은 가문의 촉망받는 재주꾼으로 자부심이 있었던 한편으로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대저 큰 인물의 소년기는 이러하다. 그 열등감 때문에 상처입고 그 자부심으로 그 상처를 극복해 나간다. 무른 쇠가 단련 되듯이 소년 김구는 강해졌다.
소년 노무현의 인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밑바닥에서의 열정을 뿜어내는 에너지는 우월감과 열등감의 혼재였다고 한다. 모범생의 자부심과 가난뱅이의 열등의식이 교차할 때, 그 모순이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서의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백범에 있어서는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자주독립의 열망으로 승화되고 노무현에 있어서는 대통령의 야심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아버님은 겨우 성과 이름을 쓸 정도였는데 골격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술에 취하면 이웃 마을 양반 강.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주고 해주 관아에 갇힌 일이 일년에 몇차례나 되었다. 인근 양반들의 질시를 받으나 그들도 어버님을 제압하지는 못하였다. [백범일지]
백범 당신의 서민적 정체성을 아버지를 대신하여 표현하고 있다. 백범이 상해 임정 등에서 요직을 맡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대개 양반의 후예 투성이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상놈 출신도 한 사람 끼워주므로서 대의명분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숨길 수 없다.
훌륭한 여성지도자가 나서야 여성의 지위가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법이다. 지역에서 고루 대통령이 나와야 지역차별이 없어지는 법이다. 상놈출신 지도자가 나서야 신분차별이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법이다.
양반들이 상민계급 출신 지도자 백범을 필요로 하는 것은, 호남지도자 DJ가 경상도 출신 노무현을 스카웃 하므로서 명분을 얻으려는 것과 같다. 당시 법적으로는 반상의 차별이 철폐 되었으나, 상놈출신 지도자가 나서지 않으므로서 여전히 차별관행이 남아 있었던 것이 대일항쟁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상놈의 입장에서 보면 양반이야말로 가해자요 일본이야말로 큰 은인이다. 그러하던 때에 상놈들이 동학농민항쟁을 주도하므로서 일본이 양반의 압제에서 상놈을 해방시킨 은인이라는 논리는 타파되었다. 이 점에서도 동학농민항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구한말 무수히 일어난 의병 가운데서 상놈 출신 의병장은 울진의 신돌석 정도가 유일하였다. 여전히 양반의 시대였고 실제로 일부 의병운동은 양반이 지배하던 과거체제로의 회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에 상놈출신으로 일본에 반대하여 봉기한 동학군의 해주 팔봉접 접주였던 소년 김창수는 양반출신 독립운동가들에게 꼭 필요한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상놈출신 백범의 가세로 하여 독립운동은 왕조시대로 돌아가려는 양반 기득권세력들의 수구반동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 국가 건설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백범은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친으로부터 이어진 서민적 정체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존위의 부친과 서당의 훈장 사이에 반목이 생겨 훈장을 해고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나 실은 자기 손자는 공부를 못하는데 나의 공부는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샘하였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동리의 부유한 상놈이 서당의 훈장을 해고하여 글공부를 중단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민과 접촉이 없는 지식인은 서민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기 쉽다. 노동자 농민 운운하며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서민은 결국 지식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서민은 자기네를 도와주겠다는 지식인을 배신하고 강한 자에게 빌붙는다. 이 지점에서 지식인은 변절한다.
민중은 언제나 노무현을 배신했다. 노무현은 부산에서 세 번이나 낙선하였다. 그래도 노무현은 민중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순진해서 부산 시민을 믿은 것은 아니다. 알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서민의 사고방식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민은 눈앞의 이해관계를 쫓아 언제라도 배신한다. 왜? 지식인은 반드시 서민을 배신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배신하는 척 지식인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시험하고 흔들어도 지식인이 끝내 배신하지 않으면 그때 서민은 진정으로 지식인과 하나가 된다.
왜? 서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올인을 할 단 하나의 카드 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민의 심리를 아는 서민출신 지도자만이 끝까지 서민을 믿을 수 있다.
내 관상을 보았더니 부자가 될 만한 관상은 없고 오로지 가난한 흉상(凶相)으로만 되어 있다.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얼굴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관상이 좋은 호상인보다 마음이 좋은 호심인이 되기로 하였다. [백범일지]
백범은 해주에서 열린 1892년의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돈으로 급제를 사는 현실에 비관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한다. 대신 실용학문을 할 작정으로 토지문서 작성하기, 소송서류 올리기, 제사 축문 짓기, 혼서문 쓰기 등을 연마하는 한편으로 병서를 읽기도 하고 관상학과 풍수학에도 관심을 가져본다.
관상학을 배워 스스로 본인의 관상을 보니 천생 상놈의 상이다. 노무현도 그러하다. 좁은 이마와 도드라진 뺨이 김구를 닮은 노무현의 얼굴도 전형적인 서민의 얼굴이다.
서민의 자제들은 세상의 어두운 면들, 온갖 야비하고 치사한 속임수와 위선들을 너무 일찍, 너무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주의주장도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김구의 철학사상은 한마디로 실용주의다.
절대주의 경향의 형이상학은 지식인에게나 어울리지 토지문서 작성하기 소송서류 올리기 등 실용학문을 했던 서민적 정체성의 백범(백정이나 범부와 같은 평범한 서민) 김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상고를 졸업한 노무현의 철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고선생이 나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한 것은 과단성의 부족이었다. 매번 훈계하여 『무슨 일이나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하는데 과단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할 때에는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되 벼랑에서 잡은 가지 마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히 장부로다)의 구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백범일지]
왜놈과 싸울 사람은 백성이고 그 싸움을 이끌 사람은 양반이다. 동학농민항쟁은 조선의 양반들이 백성을 지도할 권위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농민 스스로의 자각이다. 동학의 봉기는 농민이 자각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동학의 실패는 농민 스스로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입증한 셈이 된다.
필요한 것은 양반과 백성을 이어줄 하나의 징검다리였다. 양반과 대화가 되는 농민지도자 백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백범은 안태훈, 고능선 등 양반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주목을 받는 서민출신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김구는 용맹한 사나이였다. 이는 의심할 수 없다. 고선생이 말하고 있는 과단성의 부족은 남자의 용기가 아니라 철학적 성찰에서 얻어지는 정신의 힘을 말한다. 야망은 있으되 철학이 없는 것이 상놈의 한계였다. 동학이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는 상놈으로서 신분상승이라는 가시적인 목표에 집착한데 있다 할 것이다.
신국가 신국민의 야망만으로는 용기를 내어 나무를 오르는 일은 할 수 있으나 그 손에 잡은 가지마저 놓아버릴 배짱은 없다. 그 야망까지 마저 버려야 했다. 20세 청년 김창수는 안진사의 식객이 되어 양반 가문의 가풍을 배우는 한편 유학자 고능선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유교주의 철학의 감화를 받는다. 20세 이전의 소년 김창수가 야망에 의해 움직인 평범한 사람이라면 20세 이후의 백범은 철학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
[1876~ 1895년]
★1세,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이름은 창암(昌巖)이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존위(尊位 - 세금 걷는 사람) 벼슬을 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이고 어머니는 현풍 곽씨 곽낙원(郭樂圓)여사이다.
★17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경과(壬辰慶科)에 응시하나 부패한 과거제도에 실망하고 풍수와 관상 등 실용학문을 공부한다.
★18세, 동학교도 오응선의 영향으로 동학에 입도한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친다. 보은에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만난다. 동학의 접주가 되어 팔봉산에서 봉기하고 해주성(海州城)을 습격한다. 부대를 구월산으로 이전하였다가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는다. 신천 청계동에 있는 진사 안태훈의 식객으로 은신한다.
★20세, 진사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을 만나 제자가 된다. 김형진과 함께 만주지역을 시찰하고 김이언의 의병부대와 함께 국경을 넘어와 강계성 습격에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