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홍경래와 전봉준이 실패한 길을 가다
과객이 주인을 찾아 묵어가기를 청하면 처음에 묻는 말이 『간밤에는 어디서 유숙하였소?』 한다. 간밤에 묵은 집이 양반집이면 두 말이 없고 상놈으로 확인되면 양반이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는 괴악한 습속이 있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곳에 와보니 양반의 낙지는 삼남이요 상놈의 낙지는 서북이로다. [백범일지]
백범이 감옥을 탈출한 후 상민계급 출신 지도자들과 손잡고 지하운동을 할 계획으로 삼남일대를 여행하며 민심을 살폈으나 배우지 못한 상민계급의 한계를 느끼고 공주 마곡사에 정착하여 1년 동안 승려생활을 체험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의 몰락은 신분질서의 붕괴에 그 직접적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왕조 말년에 과거제도가 붕괴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한 것은 장사로 큰 돈을 번 상인과 광작으로 토지를 늘린 부유한 농민이 출현하므로서 몰락한 양반들이 세력을 구하기 위해 이들 상민계급과 결탁한데 그 원인이 있다.
조선후기 이후 상업과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번 중인과 상민이 경향각지에 출현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통적인 소작제가 붕괴되고 자작농으로서 머슴을 두고 광작을 하며 큰 돈을 번 요호부민이 출현하였다.
관료들이 이들 부유한 상민과 결탁하여 매관매직을 일삼으므로서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양반 위주의 구체제는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상민 중심의 신질서를 주장한 것이 곧 홍경래의 난이요 동학농민항쟁이다. 그 한가운데 해서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학의 애기접주 김창수가 있다.
백범이 목격한 해남의 경우 양반의 수탈이 극심하였으므로 세력을 얻은 부유한 농민이 출현하지 못하게 되어 여전히 윤가와 이가 두 양반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위 인용문은 백범 김구가 자신의 서민적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구는 양반출신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중에도 스스로의 서민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서민의 계급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찾아왔을 때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스님부터 『애야,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우니 이름 높은 중은 못 되겠다. 얼굴은 어찌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어라.』하신다. [백범일지]
이 시기는 민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활동이 한 풀 꺾인 시점이다. 백범의 삼남여행은 상민 위주의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무장항쟁을 시도해보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나 배우지 못한 상민계급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상민계급을 위주로 구성된 동학민중항쟁이 양반계급 위주의 기성질서에 대한 전복의 시도였다면, 유교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강력한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내건 을미의병의 실패는 역시 양반계급의 지도력의 한계를 노정한 셈이 된다. 상민과 양반이 각각 한번씩 실패했으니 필요한 것은 상민계급과 양반계급의 사이를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이다.
마곡사의 승려생활은 양반계급에 저항하는 상민계급 출신의 소년 김창수와 양반사회에 받아들여진 민족 지도자 김구를 가르는 하나의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 와서 승려계급은 천민취급을 받았으나 문자를 알므로 양반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초의선사가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와 사귄 데서 보듯이 조선후기에 와서 스님과 선비의 사교는 하나의 시대적 유행이었다. 이는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가 중인계급으로 천대받던 화가나 승려, 악사들과 사교한 것을 본뜬 것으로 조선후기 선비문화의 정수라 할만하다.
이 시기 백범은 사찰에 유람을 와서 시회(詩會)를 여는 양반들과 교유하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반사회의 법도와 문화에 적응해가는 한편, 양반의 지식과 상민의 경험을 두루 갖춘 민중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내가 그 사이에 깨달은 세계 사정이라든지 또는 고선생님이 평소에 교훈하시던 존중화 양이적(尊中華 攘夷狄)의 주의가 옳지 않은 것과, 눈이 깊고 코가 뾰족하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씀드렸다. [백범일지]
백범의 스승인 고능선선생은 전형적인 양반 유학자이다. 고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구국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양반이요 백범은 양반계급에 적대적인 상놈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용가치 있는 심복의 역할 정도이다.
고선생과의 문답에서 드러난 바 20세 소년 김구의 흉중에는 이미 민족 지도자로서 구국의 계획이 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각국의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인민의 자녀를 교육하여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고 애국지사를 규합하는 것이 그것이다.
중화사상에 빠져 턱없이 오랑캐를 배척하거나, 아니면 변절하여 일신의 출세를 바라고 친일파가 되거나, 자포자기하여 극단적인 무장투쟁에 휩쓸리거나 하지 않고, 민족교육의 100년 대계를 세우는 등 상민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데서 백범의 만만치 않은 철학적 토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로도 김구선생이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반공주의 등 시대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민족자존의 외길을 걷게 되는 것은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이 체화된 결과이다. 상민계급 출신으로 그 사상이 타인에 의해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고, 오랜동안의 여행과 모험생활을 통하여 얻은 사람의 체험에 기초하여 스스로 깨달은 즉 살아있는 지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무현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노무현은 강경한 진보주의자로 오해되고 있지만 이는 서민출신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취하는 포지셔닝일 뿐이다. 노무현은 어떤 사상에도 극단적으로 휘둘리는 일이 없는 합리주의자이다.
어떤 유행하는 사상이나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판단능력 곧 이성을 불신하고 사상이나 교리에 판단을 대행하게 하는 즉 철학적 도피행위가 된다. 이는 근대정신 곧 합리주의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이 형성됨에 있어 목수가 건물을 짓듯 바닥에서부터 한층 한층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사상에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이 없다. 그러므로 각본에 없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스스로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념이나 교리에 의존하여 이것으로 판단을 대행하게 한다. 그 결과는 비타협적이고 극단적인 원리주의로 나타난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떤 이념에 치우쳐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는 대개 근대정신으로서의 합리주의가 결여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철학적 기초이다. 그 철학적 기초는 전모를 보므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실생활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구축되는 것이 진짜이다. 주입식 교육을 받은 책상물림들에게 이러한 철학적 기초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 시대를 빛내는 위대한 지도자는 반드시 서민 출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1898~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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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인천 감리영을 탈옥하고 삼남 일대를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된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선생님을 찾아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