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14번째 글입니다. 지난해 대선 이전에 씌어진 글이나, 일부는 지금 현실에 맞게 고쳤습니다.』

  13. 사회주의와 결별하며

재야활동을 하면서 노무현은 이념서적을 탐독하고 청년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이른바 ‘의식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와는 일정한 선을 긋는다. 노무현은 그 이유를 들기를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행 법체계는 헌법에서부터 일반법까지 상대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비해 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절대주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노무현이 내세우는 하나의 논리일 뿐이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 안된다.

밑바닥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실용주의자가 된다. 그들은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남의 말 믿다가 속은 것이 어디 한 두 번이겠는가? 엘리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의 가르침을 맹신한다.

아니다. 밑바닥에 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믿는다. 아니 믿는 척 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약자이니까. 어차피 싸워봤자 이길 수 없으니까. 일단은 속아주고 일단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취할 뿐, 자기 정신의 안방은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

언제나 속도가 너무 빠르다든지 앞질렀다 싶을 때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서 현실정치와 발을 맞춰 왔다고 자평한다. [노무현어록]

산전수전 다 겪은 노무현은 시류의 흐름에 편승할 줄 아는 실용주의자가 된다. 노무현을 두고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만 보는 시각은 그의 승부사적 기질과 자기연출에 능한 쇼맨십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상’이 하나의 큰 나무라면 그 나무의 기둥은 자신이 세우고 외부에서 주입된 잡다한 이념은 그 기둥의 가지들로서 필요한 만큼만 취한다. 그것이 노무현과 김구선생의 실용주의이며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커온 서민지도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엘리트들은 다르다. 그들은 좋은 선생을 만나 올바른 지도를 받는다. 그들은 스승을 온전히 믿는다. 스승 이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편협하다. 스승의 일방적인 가르침에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이 없다. 스승의 말씀에 오류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엘리트는 어떤 이념에 치우치게 되면 자기 정신의 안방을 온전히 내준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이념과 강령과 교리에 자신이 해야할 판단을 대행시킨다. 그들은 경직되어 있다.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이념과 원칙으로 도피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명예롭게 패배하는 길을 택하고 그 패배의 책임은 상대방에게 전가한다.

엘리트는 패배해도 명예만 지키고 있으면 주위 인맥의 도움으로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민지도자는 다르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패배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서민지도자는 싸우지 않고 도망치든가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길을 택한다.

노무현은 밑바닥에서부터 커온 승부사이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가역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원칙을 지키면서도, 그 원칙 안에서 실용을 취하는 전술적 유연성의 발휘를 잊지 않는다. 노무현은 진정한 의미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대신 도망친 적은 여러번 있다.  

그의 부산 출마가 그렇다. 그는 싸워서 패배한 아니라 더 큰 싸움에서의 패배가 두려워 이길 수도 있는 승부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그는 패배로 위장하여 주변을 속인 후 돌아가는 무대의 중심에서 한 발을 빼고 홀로 2라운드를 준비했던 것이다.

 

14. 노무현을 알아준 사람은 386 학생들

1987년 노태우의 629선언 직후 있었던 노동자 대투쟁은 노무현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재야운동가라면 감옥에 몇 번은 갔다와야 이쪽 세계의 어른으로 대접을 받는 법인데 노무현에겐 그 감옥의 경력이 없었던 것이다.

87년 노무현은 이석규열사의 사망으로 인한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개입하여 법률자문을 해주었다가 검찰에서 ‘제 3자 개입 금지’로 걸고 들어오는 바람에 구속된다.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지만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까지 받는다.

이 사건이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는 바람에 최초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다. 23일간의 짧은 구속이었지만 일단은 재야지도자의 자격은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비로소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신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세상이 나를 알아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슬기로운 정치가들은 이천만명 유권자들에게 인정받는 수고로움을 선택하기보다는, 단 한 명의 보스에게 인정받는 지름길을 택하는 현명함을 발휘하곤 한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있어서 그 사람의 야심의 동기가 되는 법이다. 노무현이 인정받고 싶어했던 사람은 73년에 작고한 큰형님 노영현씨였다. 형님이 사망하므로서 노무현을 인정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게 되었다.

누가 노무현을 알아줄 것인가? 노무현은 국민경선 직후 김영삼씨의 자택을 방문하여 03시계를 자랑한 일도 있고, 한때 김근태의원이 노무현을 친구로 인정해주는데 대해 감격해 한 일도 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또한 노무현의 쇼맨십이다.

밑바닥 서민출신으로서는 윗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학벌과 서열과 인맥이 없이는 얻은 지위가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장된 방법으로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척 연극하는 것이 서민출신 지도자들에게 공통된 특징이다.

노무현이 386세대 보좌관들과의 여전한 친분관계에서 보듯이 노무현이 진정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던 대상은 계보의 보스가 아니라 이들 80년대에 함께 운동한 학생들이었다.

노무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무현이 겁낸 것은 하나 뿐이다. 이들 학생들이 노무현을 ‘그렇고 그런 정치인들’ 중의 한 명으로 보지 않을 까 하는 것이었다. 이후 노무현의 무수한 정치적 부침은 이들 고락을 함께 한 학생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소원한다. 엘리트들로 이루어진 이너서클에 소속되기를 열망한다. 18세기 부르조아 집안의 처녀들이 목을 길게 빼고 혹시 귀족들의 무도회에서 초대장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듯이,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초대장이라도 받아서 그 문턱 높은 집의 사랑방을 드나드는 멤버들 가운데 한 명으로 소속될 수 있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노무현에게는 그것이 없다. 의도적으로 거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존심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과 교유 할 때는 남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절차가 하나 더 필요한 법이다. 학벌만 있으면, 높은 사람의 소개장만 있으면 간단히 통과되는 그 문턱이 노무현에게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것이다. 필연 어색해지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왜 노무현은 국회의원이 되고도 재야운동 시절에 사귄 386세대와의 짧았던 인연을 애지중지하며 지금껏 이어오고 있는 것일까? 엘리트가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지도자가 되는 길은 단순하다. 윗사람에게 인정받으면 된다. 그들의 사랑방을 무시로 방문할 수 있는 출입권을 얻는 것이다. 룸살롱에 함께 출입하는 멤버의 명단에 드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콰큐틀 인디언들에게는 기이한 풍습이 있다. 마을의 유력자들이 포틀라치(potlatch)라 불리는 축제에서 자기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싸그리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집에 불을 질러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더 많은 재산을 불태운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아직도 이와 유사한 풍속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인디언사회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는 인디언 특유의 평등주의다. 이런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뉴기니아 마링족의 돼지도살축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평등주의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재산을 버려서 이웃과 평등해지는 대신 명성을 얻고 마을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것이다.

서민들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이기 때문에 누가 자기보다 위에 올라서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규칙을 자신과 같은 서민출신 지도자에게만 가혹하게 적용한다는 점이다. 반면 자기와 신분이 다른 귀족출신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귀족출신 지도자가 자기 위에 군림할수록, 자신을 억압할수록 더욱 순종하여 받드는 노예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이 서민이다. 왜? 행여나 귀족만이 가진 그 출세의 사다리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서민출신 지도자는 그 인맥이라는 사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보여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는 것이다.

서민은 언제나 귀족에게 1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때문에 서민은 자신과 신분이 같은 서민출신 지도자가 자기보다 위에 올라서는 꼴을 못 본다. 어떻게 해서든 방해공작을 벌여 낙마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서민인 당신이 혹 출세할 기회를 잡았다면, 소꿉친구들과는 모두 절교하는 것이 현명하다. 모르고 한 사람이라도 옛 우정을 이어가다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다 아는 이 시대 처세술의 상식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왜 그들 학생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이어오는 것일까? 노무현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왜? 그들이 노무현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능력을 알아준 것이 아니라 노무현의 진심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덧글 ..1

특히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무현을 이해할 수 없다. 김민웅, 추미애 등 엘리트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 노무현과 충돌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노무현이 한총련 학생들의 도발(?)에는 관대하지만 한화갑류의 망언에 민감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노무현을 오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18 기념식 때 있었던 한총련의 예의에 어긋난 행동에는 관대한 반면 최병렬의 ‘대통령으로 인정 못하겠다'는 발언이나 홍사덕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발언에 분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는 서민지도자 특유의 ‘가족’을 얻는 전략이다. 엘리트가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하거나 혹은 상승시키려고 하는데 비해, 노무현은 어떤 그룹 전체로부터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 밑바닥 서민들이야 말로 엘리트출신 지도자들에게는 관대하고 자신과 출신성분이 같은 서민출신 지도자에게 가혹하다는 사실을 무수한 경험을 통하여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이 얻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그 인맥의 사다리, 출세의 사다리는 자신과 같은 서민 출신 지도자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김민웅의 위협, 한화갑 추미애의 위협, 최병렬 홍사덕들의 망언도 본질에서 ‘엘리트만의 특권인 그 인맥의 사다리’에서 떨어뜨리겠다는 위협이다. 허나 노무현은 그 사다리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덧글 ..2

톨스토이가 정리한 ‘바보 이반’류 러시아민화를 보면 러시아 농민이 그들을 착취하는 원흉인 귀족들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같은 농민 출신으로 약간 출세한 마름들, 세리들에게는 귀족의 명을 받아 심부름이나 했을 뿐인데도 아주 가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귀족이 망하면 농민들이 대성통곡하며 슬퍼하지만, 같은 농민 출신인 마름이나 세리가 망하면 만세를 부르고 그 집에다 불을 질러버린다. 시체를 난도질하여 거리에 끌고다니며 모욕을 가한다. 끔찍하다. 왜?

비유하자.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지도자, 혹은 권위주의 지도자가 패배하면 민중은 그 엘리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노무현 같은 상고출신 지도자가 실패하면 그 집에다 불을 지르고 만세를 부른다. 이것이 민중의 노예근성이다.

자신과 같은 민중 출신이 출세하는 꼴을 못본다. 이를 ‘민중의 질투심’, 혹은 ‘노예근성’으로 판단해서 안된다. 당연하다. 귀족은 망해도 그 사다리가 남아있지만, 민중출신이 망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여러 행보들은 이러한 생존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당이 멀쩡하게 있는데 왜 피땀으로 일군 자기당을 깨부수고 새 당을 만드는가? 목에 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임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하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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